Topic : 이달의 화제
그림책
에디터 : 박중현 김지영 김선주
자료제공 : 비룡소, 미메시스, 북극곰, 한솔수북
다시 그림책의 세계로 초대합니다
세상에 그림책이 처음인 사람은 드물다. ‘엥, 아닌데? 나는 그림책 안 읽는데?’라고 되묻기 전에 생각해보자. 기억도 안 날 만큼 어린시절 그림책을 읽거나 보거나 혹은 들으며 자라지 않았는지. 보통 그렇게 까마득히 잊어가거나 부모가 되어 자식을 위해 다시 찾곤 하던 그림책, 오늘날 좀 달라졌다. 어른을 위한 동화부터 예술적인 그림과 내러티브를 보여주는 그림책과 아트북, 더 친숙하게는 각종 그림 에세이까지. 반갑기는 한데 다음과 같은 물음을 품으며 조금 낯설어 하는 이도 있을지 모르겠다. ‘정확히 뭐가 그림책인 거지?’ ‘어떻게 읽어야 좋은 거지?’ ‘이거 어떻게 읽었더라?’ 그런 당신을 다시 그림책의 세계로 초대한다.
그림책이라고 불리는 책들이 있다. 서점이나 도서관 서가 분류에 등장하기도 하고, 부모가 아이를 위해 찾아보기도 하고, ‘뭐야, 그림책이네’라는 식으로 입에 오르내리기도 한다. 어딘지 새삼스러우면서도 막연한 그 이름, ‘그림책’은 정확히 무슨 책일까?
두 가지 기준으로 이야기해볼 수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쪽은 물리적 형태에 따른 구분이다. 거창하게 폼 잡았지만 말 그대로 ‘그림 있는 책’이다. 주로 서가의 어린이책 코너에 꽂혀있는 책들로, 글과 그림이 있으며 큰 그림이 페이지를 가득 채우기도 한다. 책의 크기와 판형도 일반 책과 달리 매우 다양하다. 흔히 떠올리는 그림책의 인상이다. 하지만 사실 먼저 한정한 ‘어린이책’이라는 카테고리에서 벗어나면 삽화책, 사진책, 만화책, 심지어 지도까지 세상에 ‘그림 있는 책’으로 묶일 수 있는 것은 너무나 많다. 실용서에서 에세이, 문학에 이르기까지 그림의 영향력이 커져가는 오늘날 더욱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단지 그림의 유무로 그림책을 정의하는 일은 그 매체적 의미를 밝혀주지 못한다. 개념 혹은 성분에 따라 그림책을 정의할 필요가 있다. 이에 따르면 오히려 ‘어린이책’이라는 하나의 카테고리 안에서 간명한 구분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안데르센 동화집』이나 오스카 와일드의 『행복한 왕자』, 유리 슐레비츠의 『SNOW』는 모두 ‘그림책’ 서가에 꽂힐 수 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안데르센 동화집』 『행복한 왕자』와 같은 책은 글로 이루어진 이야기가 주를 이루는 가운데 삽화가 곁들여진 삽화책illustrated book이며, 『SNOW』만이 이 안에서 진정한 그림책picture book의 성분을 갖추고 있다. 그렇다면 ‘진정한 그림책’이란 무엇일까?
앞서 언급한 랜돌프 칼데콧이 이야기에서 그림의 역할을 강조한 때, 즉 이전까지 그림을 부차적이거나 글에 종속된 존재로 보던 것에서 벗어난 시기를 그림책의 진정한 기원이라고 본다면, 이는 19세기 후반의 일로 그 역사는 150년도 채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림으로 소통하는 스토리텔링의 역사는 3~6만 년 전 동굴 벽화로까지 올라간다. 이는 ‘만화’의 역사와도 공유하는 부분인데, 마찬가지로 기원전 2세기 초 로마 트라야누스 원기둥에 새겨진 그림들 역시 연속된 그림 서사라는 점에서 만화와 그림책 양쪽 모두의 역사에서 거론된다. ‘책’의 물성에 좀 더 주목할 때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삽화책은 기원전 2세기경 제작된 이집트 파피루스 두루마리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순서대로 이야기가 진행된다거나 글과 그림을 함께 보게 한다는 점에서 오늘날 그림책과 유사하다. 1세기경 창안된 코덱스codex 역시 책과 그림책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데, 파피루스나 양피지 등을 네모난 형태로 잘라 묶어 가죽 표지로 싼 것으로 오늘날 책의 실질적 원형이다. 이전에 둘둘 말아야 했던 두루마리 방식은 말고 펼치는 과정에서 그림에 균열을 발생시켰으나, 코덱스의 발명을 통해 비로소 다양한 색과 삽화 스타일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중세 시대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림책의 ‘황금기’로 꼽힌다. 당시 그림책의 위상이 가장 높았기 때문인데, 주로 성경의 내용을 담은 이 시기 그림책들은 하나의 예술품으로 취급받았다. 다양한 화가들이 수작업으로 성서의 내용을 나타냈고 그림책은 사치재에 가까웠다. 소수의 성직자 및 귀족들만이 지닐 수 있었다.
그림책에서 글은 그림을 반복하지 않으며, 그림도 글을 반복하지 않는다.
—유리 슐레비츠Uri Schulevitz(1935~)
그림책에 대한 재미난 정의로 ‘글과 그림의 행복한 결혼’이라는 말이 있다. 그림책을 읽는 진정한 방법이자 즐거움은 글과 그림을 함께(하나로) 읽는 데 있다는 표현이다. 이런 그림책을 두고 기호학적으로는 ‘아이코노텍스트iconotext’라고 표현한다. 그림책은 글과 그림이 각각 정체성과 독자성을 유지하면서 하나의 기호로 동기화된 일종의 ‘제3의 텍스트third text’라는 소리이다. 그래서 긍정적인 의미로 그림책에서 글과 그림이 ‘따로 노는’ 경우는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 그림은 글을 설명하지 않고, 글도 그림을 묘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글은 그림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소리나 움직임, 시간의 흐름을 나타내기도 하고, 이해에 방향성을 부여하거나 해석을 풍부하게 해 극적 효과를 높이는 등 그림책의 기술적·물리적 한계를 극복하는 연출을 보여주기도 한다. 더욱이 오늘날 접지 방식을 달리하거나 팝업 요소를 가미하는 등 상호작용이나 경험적인 측면까지 자극하는 그림책이 많아, 좋은 그림책은 그 자체로 하나의 작은 연극과도 같다.
오늘날 그림책이 더이상 어린이의 전유물은 아니다. 그림책의 대상 연령도 더는 0~2세라든지 3~7세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굳이 표기하자면 0~100세일까. 작가가 읽어주었으면 하고 떠올리는 얼굴이 곧 대상일 따름일 테다. 오늘날 그림책의 독자로 성인이 떠오르기 시작한 것은 7~8년은 된 현상이다. 어른들의 그림책 독서 모임도 많아졌으며, 문학과 미술이 함축적으로 응집된 장르인 그림책을 대하고 “지친 일상의 회복” “그림책의 여백이 주는 해방감” 등 위로와 공감을 표하며 소위 ‘재발견’을 겪었다. 전문가들은 이 배경에 두 가지 시사점이 있다고 분석한다. 먼저 국내 창작 그림책의 비약적인 성장이다. 2000년대부터 최근까지 볼로냐 라가치상이나 브라티슬라바 일러스트 비엔날레상 등 유수의 그림책 상을 한국 작가들이 휩쓸고 있으며, 2015년에는 라가치상 전 부문을 한국 작가가 석권한 기록도 있다. ‘그림책 작가는 1쇄 작가’라는 슬픈 말이 도는 한국의 그림책 수준은 이미 세계적이다. 두 번째로는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국내 그림책 도약기에 그림책을 읽고 자란 세대나 그 시기 자녀한테 읽어준 세대 중 일부가 성인 혹은 중장년에 접어들며 그림책을 찾게 현상이다. 그림책 특유의 간결함이 직관적으로 어필하기도 하고, 이미지와 영상에 친숙한 시대에도 들어맞는다는 것이다. 출판사에서도 이미 이러한 움직임을 감지해 비룡소에서는 2012년부터 어른을 겨눈 ‘지브라’ 시리즈를 내놓고 있고, 보림 역시 ‘예술성 짙고 실험적인 그림책’을 표방하며 다소 고가이지만 예술성 높은 ‘더 컬렉션’ 시리즈를 2015년부터 내놓고 있다. 이외에도 다양한 출판사나 서점 등에서 역시 그림책에 대한 주목이 높다. 이러한 움직임은 일상에서 비교적 저렴하고 쉽게 예술활동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문화적 빈부 격차 해소에도 도움을 준다. 독자와 창작 범위가 늘어나고 북 아트와 경계를 허물고 있는 오늘날, 바야흐로 그림책의 이름은 다시 쓰이고 있다.
책의 물성이 만드는 서사를 좇아,
『까만밤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여러 실험적 형식의 책을 만들었던 작가 브루노 무나리의 『까만 밤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는 일반적인 ‘그리기’의 개념에 갇히지 않고 ‘책’이라는 물건 자체가 지닌 특성을 그림의 요소로 활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