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eg’s choice
책이 선택한 책
July·August, 2018
‘지금’을 여행하는 방법
Editor. 김선주
읽고 싶은 책은 날로 늘어가는데 읽는 속도가 따라가지 못하는 느린 독자.
위시리스트의 십 분의 일도 채 못 봤는데 좋은 책은 왜 이리 많이 쏟아지냐며 행복한 불평 중.
여행을 떠나면 마치 격언처럼 쓰이는 말이 있다. 바로 “남는 건 사진밖에 없다”라는 말. 조금이라도 더 좋은 카메라로 여행지에서 만난 아름다운 것, 맛있는 것, 기억하고 싶은 모든 것을 사진으로 남기려 한다. 내가 찍는 것을 남들도 찍고, 남들이 찍는 것을 나도 찍는다. 어떻게 하면 더 예쁘게 담을 수 있을까 초점을 잡아가면서 말이다. 사진은 우리에게 너무도 가깝고 익숙한 것이고, 그렇기에 여행의 순간들을 기록하는 방법으로 그만큼 좋은 것도 없어 보인다. 보는 그대로 선명하게 담을 수 있고, 담는 데도 그저 셔터를 누르는 몇 초면 충분하니까. 하지만 과연 그럴까? 나도 멋진 풍광을 프레임 안에 가두기 바빠 제대로 보지 못하고 나중에야 사진을 보고 ‘아, 이런 모습이었구나’ 하고 놀란 적 있다. 심지어는 찍어두었던 사진을 확인하다가 기억나지도 않는 사진을 보며 ‘이게 뭘 찍은 거더라’ 싶었던 적도 있다. 사진이 여행의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좋은 기록물임은 분명하지만 결국 이미지를 매개로 하기 때문에 당시의 생각이나 감정은 흐릿할 수밖에 없다. 그럴 때 좋은 것이 노트와 펜이다. 가방에 상시 넣어 다니면서 순간순간 떠오르는 생각이나 보고 느낀 것들을 끄적이는 것이다. 『도쿄규림일기』는 바로 그런 끄적임의 모음이다.
『도쿄규림일기』는 작가가 2주간 도쿄를 여행하며 본 것, 먹은 것, 느낀 것을 습관처럼 그리고 써 내려갔던 노트를 책으로 묶은 것이다. 여행 당시에 썼던 공책 2권을 스캔한 뒤 거의 그대로 재현해, 컴퓨터 활자 단 한 글자도 없이 모두 손글씨와 손그림으로 되어있다. 제목도 빨간 라벨스티커에 손으로 쓴 것을 인쇄해 붙였다. 심지어는 문구점에서 펜테스트 했던 흔적, 물이 묻어 잉크가 번진 흔적, 마스킹테이프로 붙인 영수증, 스티커도 그대로 담겨 있어 마치 누군가의 일기장을 주운 듯한 느낌을 준다. 독자를 고려하지 않은 기록이다 보니 길거리에서, 달리는 버스에서 빠르게 휘갈긴 일기는 글씨를 알아보기 힘들 수도 있고, 펜을 바꿔 쓰면서 색깔이나 굵기가 묘하게 달라지는 지점도 있다. 이것이야말로 정말 독립출판물이라서 만날 수 있는 재미 요소가 아닐까.
작가는 킥보드를 타고, 기차를 타고 도쿄 곳곳의 문구점과 카페, 미술관을 특별한 계획 없이 여유롭게 여행한다. 그러는 동안 좋았던 음식이나 문구, 지나가는 사람들을 관찰한 모습, 소소한 지름, 문득 떠오른 내면의 생각들을 길을 걸을 때나 카페에서, 혹은 방에 누워서 그림과 글로 슥슥 기록해나간다. 한장 한장 일기와 메모가 늘어가면서 작가는 자신도 몰랐던 내면에 대해 알아가게 된다. 나는 어떤 취향이고, 어떤 음식을 좋아하고, 어떤 결정을 내리는지 말이다. 또, 게으른 나와 부지런한 나의 대결을 경험하기도 하고, 소소한 문구를 사 모으는 즐거움을 만끽하고, 여행자로서 거리를 지나는 다양한 개성의 사람들을 관찰하며 익숙한 것들을 새롭게 바라보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내면 여행의 기록들은 (비록 혼잣말일지라도) 자신이 이렇게 할 말이 많은 사람이었음을, 이렇게 기록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음을 깨닫게 해준다. 사진이 아니라 손으로 그리고 쓰며 얻은 깨달음이었다.
도쿄에서의 가벼우면서도 재치있고 시시콜콜한 일기는 지극히 사적인 기록임에도 독자로 하여금 공감하고 키득거리며 페이지를 넘기게 한다. 무엇보다 기록하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좋은 영감의 매개가 되어준다. 여행의 순간을 기억하는 방법으로 사진만큼 좋은 것이 없다고 생각할지라도 이렇게 가볍게 쓰고 대충 그려보는 시도를 한 번쯤은 해봐도 괜찮지 않을까. 사진이 아닌 내 손으로 남긴 시간은 그야말로 남들이 모르는 나만의 여행이 될 것이다. 남들도 똑같이 볼 수 있는 것이 아닌 나만 볼 수 있는 분위기, 느낌, 맛 같은 것 말이다. 사진은 나중에 보기 위한 기록이고, 글과 그림은 지금을 만끽하는 기록이다. 조금 시간이 더 걸리고 번거로울지라도 기억에 더 오래 남는 순간들을 ‘지금’ 담아갈 수 있다면 좋겠다.
여긴 평생 다시 올 일 없겠지, 했던 곳을 우연히 다시 오게 되고 여긴 또 오겠지, 했던 곳에 다시 가지 못했다. 그러니 우리는 매 순간 너무 아쉬워할 것도 없고 또 너무 집착할 것도 없이 그저 순간들을 충분히 즐기는 게 최선이겠다. —평생 안 올 줄 알았던 재작년 숙소 앞 공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