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eg’s choice
책이 선택한 책
July·August, 2018
우리 모두가 꿈꾸는 완전한 사회는 가능한가?
Editor. 지은경
인간관계도 그렇고 사회도 그렇고 완전한 것이란 없는데
모순되게도 우리는 참 그런 것만을 바라니 늘 실망감을 맞이하는 것 같다.
사실 SF는 영화로나 만날 뿐 책으로는 거의 읽은 적 없는 것 같다. 이는 아마도 SF를 이해하려면 화려한 장면을 상상하며 읽어 내려가기 버겁다는 등의 게으름, 혹은 그러한 ‘허무맹랑함’에는 별 관심이 없다며 해온 무시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대부분의 한국 소설을 재미없게 읽는 나에게 한국 SF소설은 어떠한 읽을 가능성도 없는 부류다. 그런데 한국 최초의 SF소설, 그것도 1965년도 추리소설 공모전에 당선해 1967년 책으로 탄생한 작품이란다. 60년대 당시의 꽉 막힌 사고방식으로 써 내려간 글을 읽는다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불편하다. 기껏해야 시대적 분위기 정도의 상상력만을 미세하게 자극할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이 책 『완전사회』를 손에 집어 드는 순간 나는 묘한 매력에 빠져버렸다. 우선 표지에서 느껴지는 문양이 딱 60~70년대 원단에 사용했을 법한 패턴이다. 어쩐지 SF와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다. 하지만 동시에 눈을 강렬하게 자극하는 효과 하나만큼은 탁월했다. 게다가 책을 이루는 서체와 질량, 디자인 등이 시대적 분위기를 상상하게 하면서도 매우 자신만만한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한국 최초의, 그것도 매우 훌륭한 작품, 그러나 여태까지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이라고 하니 한번 읽어보겠다는 생각까지 이르렀다.
소설은 미국 뉴욕의 높은 호텔 방에 있는 한 남자의 모습에서 시작한다. 더 미래지향적인 모습을 나타내기에는 한국보다 뉴욕이 잘 어울린다는 생각에서였을까, 처음엔 그가 선 창가가 외부로부터 비춰지고, 이어 복잡하고도 서글픈 그의 감정이 찬찬히 드러난다. 어두운 미래를 예측한 현대인은 완전한 육체를 가진 한 인간을 골라 수면에 빠지게 한 뒤 타임캡슐에 넣어 미래로 보내기로 결정한다. 이름하여 ‘미래로의 수면여행’이다. 그리고 착실한 회사원으로 살아가던 ‘우선구’라는 한국인이 미래로 수면여행을 하게 될 ‘완전인간’으로 발탁된다. 우선구 역시 약간의 고민 끝에 미래 세계로 떠나는 것에 동의한다. 기분 좋은 잠에 빠져든 우선구는 정확히 161년 뒤 깨어난다.
잠에서 깨어난 미래는 오로지 여성만이 존재하는 세상이었다. 주인공을 깨우는 미래인들은 우선구가 잠자기 전 받은 따뜻한 환송식과 달리 매우 냉담하고 서먹하다. 오히려 담담하게 상황을 이해하려는 주인공과 달리 미래인들은 주인공의 존재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듯하며, 중요한 존재로 대하기보다는 성가시지만 어쩔 수 없는 의무감으로 대하는 첫인상을 준다. 주인공이 잠든 동안 미래는 3차 대전이 일어나 전체 인구의 90%가 몰살되고, 기상 무기와 생화학병기의 등장으로 세계는 4차 대전으로 치닫는다. 세계는 정치가 아닌 과학자들이 직접 만들어 세운 ‘과학센터’에 의해 통치된다. 과학발전을 이룩하고 세상은 점차 평화를 되찾는가 싶더니 어느새 인간 사이의 갈등이 다시 시작된다. 그리고 5차 대전이 발발하는데, 이번에는 여성과 남성의 전쟁이다. 전쟁에서 이긴 여성들이 이룩한 사회, 그리고 그 이후의 세상은 단순히 호기심을 자극하기 위해 그려낸 이야기는 아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온 남성 중심 사회의 입장과는 매우 대조적인 여성의 사회는 마치 현시대 페미니즘 문제를 예측한 것은 아닌지 감탄하게 한다. 또한 과학자들의 경쟁 개발에 점점 아둔해지는 현대 인간의 초상을 정확하게 그려낸다. 여성들만의 사회에 홀로 남겨진 우선구는 가지각색의 경험을 하게 된다. 작가가 이 작품을 통해 보여주려 한 사회는 어쩌면 당시 시선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흘러 읽은 이 작품의 통찰력과 진정한 완전사회, 즉 유토피아를 바라던 작가의 선구자적 시각은 우리를 당혹케 하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정확히 50여 년 전에 그가 바라보았던 미래인 오늘날 우리는 그의 소설 『완전사회』를 실제 살아가는 듯한 느낌을 준다. 지극히 비관적인 책 속 이야기는 작가가 품었던 인류와 사회에 대한 따뜻한 애정을 드러낸다. 1967년 1월 1일, 작가 문윤성은 다음과 같이 썼다. “완전한 사회에 살고파라. 꿈이라도 좋다. 아니 내일의 실현을 위해 오늘은 꿈을 꾸자.” 그는 인류를 구할 유일한 존재는 바로 우리 자신이며 사회 구성원 간의 관계라고 말하려던 것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