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eg’s choice
책이 선택한 책
July·August, 2018
에세이 읽는 날
Editor. 박중현
불친절하고 사적인 에세이 독서법
1. 제목 끌리는 책 선택 2. 목차에서 관심 가는 부분만 찾아 읽기
3. 맛집 메뉴판 정복하듯 다 읽으면 완성 ※단, 끌리는 게 없을 시 1~3 중 언제라도 외도한다.
그런 사람이 있다. 떠올리면 좋지도 싫지도 않고 그냥 아무 생각 안 드는 사람. 내게 그런 사람이 ‘A’라고 한다면, 그리고 누군가 내게 “A씨 말야, 어떻게 생각해?” 하고 묻는다면 아마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해저 플랑크톤의 삶에 대해 곱씹을 기회를 부여받은 듯한 표정이 되겠지. ‘음… 뭔가 긍정적인 측면을 조명해 보아야 할까요!?’ 굳이 떠올린다는 행위가 어색할 정도로 뭔가 나와는 영영 평행선일 듯한 존재. 나쁜 뜻이 아니다. 우리는 대체로 그런 무수한 관계망 안에서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살아간다. 맞닿는(혹은 이미 맞닿아버린) 인연이란 좋고 나쁨을 떠나 순수히 힘이 든다.
에세이는 내게 그런 인상이었다. 딱히 좋지도 싫지도 않고 사실 난 의미를 잘 모르겠(안 와닿)지만 누가 좋아한다고 해서 딱히 반감이 들지도 않고 ‘아 뭐 의미가 있겠거니’에 그치거나 ‘아, 좋죠’ 다음에 딱히 부연할 감상은 못 찾겠는 대상. 가치를 존중하지만 메커니즘이나 알레고리까진 관심 가지 않는 무언가. 당연하게도 그간 읽어온 에세이 책 수는 손에 꼽을 정도고 독서 욕구가 별로 들지 않았는데, 지난 보름 정도 본의 아니게 에세이 두 권을 읽었다. 정신 차리고 보니 읽어버렸다고 할까, 사실 근래 취미 삼아 읽어오던 것은 하루키의 『1Q84』였는데, 2권까지 읽고 문득 책장에서 눈에 띈 다른 책을 가볍게 집어 들게 되어 보니 『온전히 나답게』였다.
건강한 어른은 자신이 항상 옳지는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어른일 거다. 실수를 하거나 실패를 했을 때 사과할 줄 아는 어른일 거고, 완벽하진 못해도 좋아지려고 노력하는 어른일 거다. 농담하는 여유를 잃지 않고, 크게 웃는 법을 잃지 않고, 싸울 때는 싸울 줄 알고, 화해할 때는 화해할 줄 아는 어른일 거다. —한수희, 『온전히 나답게』 중 「개와 고양이에 관한 진실」
그리고 묘하게도 그 가벼움을 유지하며 다 읽었다. 문장을 인용하여 발문하니 흡사 잠언처럼 의도치 않은 중량감을 주지만, 눈에 띄는 목차만 골라 읽고 줄거리 신경 쓸 것 없이 라디오나 팟캐스트를 듣듯 때때로 공감하거나 피식하거나 놓쳐도 가며 함께했다.
대단한 깨달음을 얻었다거나 스펙터클한 이야기를 소비했다는 느낌은 없다. 작은 눈이 소리도 없이 내리듯 무언가 알듯 말듯 부드럽게 와 앉았을 뿐. 순서 상관 않고 읽었으니 아마 두서없이 쌓였겠지.
그리고 우연히 인터넷 서점을 기웃거리다 권여선 작가의 『오늘 뭐 먹지?』가 나온 것을 알았다. 지난 3월호 작가 인터뷰(역시 술 얘기가 있다!)를 통해 신간 한 권을 또 앞두고 있다는 이야기를 접했는데, 그 책이 바로 『오늘 뭐 먹지?』였던 것이다. 사실 나는 여선 작가님의 팬이다. (고백하자면 제대로 읽은 건 「봄밤」뿐이지만 한 작품 읽고도 팬 되지 말라는 법은 없잖은가. 첫눈에 반하는 사랑을 존중해달라!) 당장 미리 보기를 읽었고, 이미 읽을 책과 흘린 책 지출 출혈이 상당했지만 서점으로 달려가 구매하고 말았다.
술꾼은 모든 음식을 안주로 일체화시킨다. (…)내게도 모든 음식은 안주이니, 그 무의식은 심지어 책 제목에도 반영되어 소설집 『안녕 주정뱅이』를 줄이면 ‘안주’가 되는 수준이다. 이 책 제목인 『오늘 뭐 먹지?』에도 당연히 안주란 말이 생략되어 있다. “오늘 안주 뭐 먹지?” 고작 두 글자 첨가했을 뿐인데 문장에 생기가 돌고 윤기가 흐르고 훅 치고 들어오는 힘이 느껴지지 않는가. —권여선, 『오늘 뭐 먹지?』 중 들어가는 말 「술꾼들의 모국어」
서점으로 달려가게 한 주요 공신이 된 머리말이지만, 이 문장이 가장 좋았던 건 아니다. 특별히 하날 이야기하기 멋쩍게 다 좋다. 좋은 작가에게 ‘발췌할 문장을 찾’는 일 따위가 애초에 의미 없게 느껴질 정도. 왜냐면 다 좋으니까, 다 유기적이니까. 그래서 솔직히 말하자면 『오늘 뭐 먹지?』에서 ‘가장’ 좋았던 건 작가의 음식 편력이라든지 맛 묘사 같은 게 아니었다. 음식과 사람이 버무려진 ‘글’이 참 맛깔났다.
책이란 게 다 그렇지만, 그중 에세이는 참 묘한 녀석이다. 무수한 눈과 손을 거쳐 상업자본에 의해 만천하에 출판된 것인데도 읽고 있으면 뭔가 저자와 내가 내밀한 얘기를 나누고 부쩍 친해진 느낌이다. 관심과 감성의 비슷한 교집합을 확인한 데서 오는 설렘일까, 아님 위안일까. 어쩐지 이젠 누군가 에세이를 읽는다면 눈이 갈 것 같다. 적적하긴 한데 말할 기운이나 신경 따위 쓰고 싶지 않다면 눈에 들어오는 에세이 한 권 없는지 찾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