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eg’s choice
책이 선택한 책
November, 2014
가을에는 지성인 코스프레
Editor. 유대란
미모는 노력 여하에 따라 얼만큼 달라지는지 잘 모르겠지만 지성인 코스프레는 약간의 노력으로 가능하다. 문화와 취향의 상하를 나누는 것이 윤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그르다고 하지만 사실 우리 마음속에는 지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의 경계가 뚜렷이 자리잡고 있다. 아침 드라마, 아이돌은 좋아하지만 그것은 경계선 하부에 위치하고 그 실체가 잘 잡히지 않을지언정 예술과 철학은 마음속 상단 어딘가에서 우리를 내려다본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오히려 지성인 코스프레는 굉장히 쉽다. 미술과 철학과 사색에 대해서 몇 구절 읊을 수 있다면 누구나 그 상단 근처에서 서성이는 지성인처럼 보일 수 있다. 또 그리 행세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동화되기 마련이고 일단 시작이 되면, 그 밑천을 늘리기 위해 책이든 잡지든 알아서 우물을 파게 되는 경우도 많다. 시작은 코스프레지만 진짜로 거듭날 수밖에 없는 계기와 의욕을 충족시켜줄 책들을 추천한다.
“모래로 해안에서 집을 만드는 데 가장 열심히 성실히 만드는 것과 같은 것, 이런 과제, 이런 나날의 초극과 자기 극복과 어떤 눈가림을 요하는 작업이 삶이다.” -본문 중
전혜린의 팬들 사이에서도 그녀가 천재인지 아닌지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다. 그러나 전혜린이 작고한 지 4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의 글이 읽히고 많은 글쟁이들의 술자리에서 회자된다는 사실은, 그가 ‘자의식 과잉의 예민했던 한 엘리트’ 이상이라는 증거가 아닐까. 번역가로 활동하며 많은 에세이와 일기를 남긴 전혜린의 글에는 지독한 염세주의가 묻어나지만 그렇지만, 그리고, 그래서 더욱 삶에 대한 주도권에 집착하고 고민했던 모습도 여실하다. 이 책은 저자가 1958년부터 1965년까지 7년 동안에 걸쳐 써 놓은 일기를 엮은 것이다. 애초 출판의 의도가 없는, 그가 생전에 보고 겪고 느낀 일들을 순수한 시점에서 쓴 글들은 현학적이고, 정신적인 것, 영원한 것에 대한 소망이 주를 이루지만 동시에 장 볼 목록, 낙서 등과 같은 소소한 것들도 담고 있다. 어떤 정신적인 것과 이상에 대해 격정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촌스럽게 여겨지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이런 것들이 전무한 삶을 상상할 수는 없다. 사람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정신적인 것을 필요로 하는 지적인 동물이다. 하루 이틀쯤은 사색과 현학적인 고민에 촌스럽게, 그리고 격정적으로 사로잡혀보자.
“시와 철학은, 오르기만 하면 그래서 그 고도감에 적응하기만 하면, 시인과 철학자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우리 삶의 거의 모든 것을 조망할 수 있는 시야를 제공하는 빼어난 산과도 같습니다.” -본문 중
니체, 하이데거, 들뢰즈, 비트겐슈타인, 아도르노, 푸코…. 책 좀 읽었다고 자부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본 이름들일 테지만, 그들의 개념을 이해했다고 확신하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전공자가 아닌 일반 독자라면 접할 기회가 적을 뿐 아니라, 철학자들의 난해한 개념들에서 삶과의 연관성을 찾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짧고도 친숙한 우리나라 현대 시에서 연관성을 찾은 강신주 교수는 다감하고 겸손한 문체로 이야기를 풀어가며 철학과 시와 우리 삶 사이에 친절한 다리를 놓아준다. 저자는 김수영, 김춘수, 황동규, 황지우, 기형도, 최영미 등 우리에게 꽤 친숙한 21명의 현대 시인들이 고민했던 문제가 현대 철학자들이 고뇌했던 문제와 다르지 않다는 점을 이야기해준다. 독자는 머릿속에서 시와 철학 사이, 시인과 철학자 사이에 묘한 평형을 그리며 우리의 미시적인 삶의 귀퉁이도 시와 철학을 품을 수 있음을 체감하게 된다.
“돌이켜 보면 르네상스 거장 라파엘로의 작품은 크리스마스 카드의 아기 천사 그림으로 처음 접했고, 알폰스 무하의 아르누보 일러스트레이션은 어머니의 손거울 뒷면 그림으로 처음 접했다. 이렇게 많은 명화와의 첫 만남이 원본이나 원본을 충실하게 복제한 사진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 그림이 새로운 맥락에서 재현된 것을 통해 이루어진 셈이다.” -서문 중
매번 자각하지는 못하지만 우리는 영화, 광고, 포스터, 성냥갑, 카드 등을 통해 명화들을 일상에서 수없이 접하며 그것들을 무의식 속에 저장하고 있다. 그러다가 진품을 마주하거나 어떤 도록에서 이미지, 작품의 원작자, 원산지, 재료, 연도를 접할 때에 그것이 희미하게든, 뚜렷하게든 우리의 뇌리에 이미 박혀 있던 것이라고 자각하게 된다. 저자는 영화, 광고, 만화, 대중음악 등 우리가 매일 쉽게 접하는 물품이나 매체에서 재해석되고 재창조된 이미지들의 원류가 무엇이었는지 추적해서 밝혀주고 있다. 그리고 원류가 된 명화가 가진 미술사적인 가치와 그것이 어떤 연결성을 근거로 현대에서 재창조되었는지 설명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 책을 통해 독자는 두 가지를 얻을 수 있다. 새로운 시대와 매체 내에서 재해석될 수 있는 여지와 존속성을 통해 명작의 근거와 내력을 이해하게 되고(쉽게 이야기하면 왜 명화를 명화라고 하는지), 이와 더불어 재해석된 이미지의 상업적 · 문화적 가치와 그 배경에 대해 좀 더 심층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100년 전 작가의 작품이 지금 어디서, 어떻게, 왜 쓰이는 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