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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y, 2015
그래픽 노블Graphic Novel의 세계로 들어와
Editor. 유대란
그래픽 노블이 여전히 생소한 이들에겐그저 판형이 큰 만화책으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마블코믹스의 히어로물을 제외하고는 손바닥만 한 판형의 일본 만화만 알던 나도 그랬다. 짐짓 예술영화만 보는 척하던 시절에 스폰지하우스에서 우연히 ‘페르세폴리스’라는 만화영화를 보고, 동명의 원작인 그래픽 노블을 찾아보고서야 이 세계에 발을 들여놨다. 보수적인 이란의 테헤란 사회에서 마이클잭슨과 아바를 좋아하는 소녀 ‘마르잔’이 겪는 성장통에 이란의 정치적 혼란과공포가 연동되는데 흑백으로 이루어진컷 하나하나가 예술이고 ‘마르잔’은 어찌나 귀엽던지. 한 편의 장편소설을 방불케 하는 이야기의 깊이에 그림의 예술성이 더해진, 어른을 위한 그림책이라고 하면 적당한 표현일까. 그래픽 노블이라고 예술성에만 치우친 건 아니다. 상상력과 상업성, 대중성을 고루 갖추고 있으며 그 안에도 엄청나게 세분화된 장르가 있기 때문에 영화산업에서는 무궁한 소재와 영감의 보고로 여기고 있다. 지금까지 그래픽 노블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영화는 셀 수 없다.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 ‘신 시티’, ‘300’, ‘브이 포 벤데타’, ‘설국열차’ 등이 익히 알려진 예다. 이 매력적인 장르에 빠질 기미가 보인다면 그래픽 노블을 전문으로 다루는 월간지 『Graphic Novel』도 추천한다.
판타지 장르 작가 겸 건축가인 프랑수아 스퀴텐과 소설가 겸 다큐멘터리 연출가인 브누아 페테르스가 만나 『어둠의 도시들』 시리즈를 탄생시켰다. 『어둠의 도시들』은 천체의 축 반대편에 있는 가상의 행성 도시들에서 펼쳐지는 판타지 연작 만화다. 1983년 첫선을 보인 뒤 지금까지 이어지며 거대한 세계를 구축 중이다. 출간과 함께 전 세계 SF 팬들의 반향을 일으켰으며 관련 전시와 컨퍼런스가 열릴 정도로 매혹적이고 방대한 세계를 자랑한다.
시리즈에 속한 『우르비캉드의 광기』는 우르비캉드라는 도시에 출현한 정육면체에 대한 이야기다. 그곳에는 우리와 비슷한 사람들이 아르누보, 아르데코의 미학적 이상향을 완벽하게 구현한 듯한 건축적 장관 속에서 살고 있다. 어느 날 우르비캉드를 설계한 천재 건축가 ‘유겐’의 사무실에 인부들이 우연히 발견한 정육면체가 도착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한 변이 15센티미터 남짓한 정육면체는 선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재질을 알 수 없다. 그것은 느닷없이 확장하기 시작한다.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육면체가 언제까지 확장할 것인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도시는 혼란에 휩싸인다. 도시를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해서 도시의 남단과 북단을 단절시키고자 했던 정치인들과 두 구역을 연결해서 도시의 완벽한 대칭을 실현하고자 했던 ‘유겐’ 사이의 갈등이 고조된다. 육면체를 둘러싼 혼돈이 가중되는 가운데 이성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사람들이 있는 반면, 신비주의에 편승하거나, 혼돈을 이용해서 돈을 벌거나 권력을 취하려는 사람들이 생긴다. 완전무결해 보였던 유토피아는 광기에 휩싸인다(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므로 줄거리는 여기까지). 육면체가 우르비캉드에 불러온 상황이 우리의 디스토피아적 현실을 비춘다는 데는 이견이없을 거다. SF물을 해석하는 데 이처럼 편리하고 안전한 이야기는 없다. 그러나 육면체의 정체나 그것의 출현이 함의하는 의미를 풀이함에 있어서는 각기 다른 접근방식을 보일 것이다. ‘각자의 천국’이라는 말이 있듯 유토피아나 디스토피아의 필요충분 조건도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무병장수를 꿈꾸는 사람에게는 영생이, 누군가에게는 세금 없는 나라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혁명이 유토피아의 조건, 반대가 디스토피아다. 이번에 들여다보자. 당신은 어디서 살고 있고 당신의 유토피아나 디스토피아를 초래할 ‘육면체’는 무엇인지.
‘between the lines’라는 표현이 있다. ‘행간’ 혹은 ‘행간에 담긴 의미’를 뜻한다. 업무상 민감한 내용이 담긴 메일을 읽거나 함축적인 작품을 읽을 때 우리는 행간 사이의 의미를 유추해본다. 바스티앙 비베스의 작품을 볼 때도 ‘between the lines’를 염두에 둬야 한다. 물론 그래픽 노블인 이 경우에는 ‘행간에 담긴 의미’보다 ‘between the cuts’, 즉 컷과 컷 사이의 호흡과 감각이 해당한다. 『염소의 맛』에는 서사가 거의 없다. 기승전결은 물론이고 대사도 별로 없다. 줄거리는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재활치료를 위해 수영장에 다니게 된 한 남자가 그곳에서 한 여자를 알게 되는데, 막 호감이 피어날 무렵부터 그 여자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이야기. 줄거리로만 보자면 당혹스러울 정도로 단순하고 결말은 시원찮다. 대신 컷과 컷이 느슨하게 이어져 그 사이 무수한 상상과 감각을 동원하게 만든다.
여백이 많은 표면에 다양한 수를 놓을 수 있는 것처럼 바스티앙 비베스는 단순한 플롯 위에 푸르른 색면과 감각을 입혔다. 수영장을 배경으로 하는 이 작품은 실내수영장이라는 공간에서 맞닥뜨리는 익숙하고도 비연속적인 찰나들을 섬세하게 그린다. 시점과 공간을 넘나들며 묘사되는 수영장 컷들은 수영장을 가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통되게 경험했을 감각을 깨운다. 물속에서 바라본 천장의 너울거리는 모습, 잠영 후 수면 위로 떠올랐을 때 거대한 조명이 눈을 때리는 시림, 어쩌다 들이켠 수영장 물에 밴 염소의 비릿한 맛, 타인의 반라를 바라보며 자신을 더욱 의식하게 되는 순간 피부의 쭈뼛함과 같은 순간의 감각을 섬세하게 표현했다. 거기에 알 듯 말 듯한 주인공의 연애 감정이 얇은 막처럼 입혀져 독자의 마음을 아련하게 한다. 물속에서 두 남녀가 침묵 속 소통을 시도하는 장면은 네오리얼리즘 영화 속 느릿느릿 흘러가는 신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런 순간들과 독자의 기억은 때로 맞닿기도 하고 비켜나가기도 하면서 감각을 끊임없이 자극한다. 그래서인 것 같다. 『염소의 맛』을 선물한 사람들 중 ‘재미있다’고 소감을 밝힌 사람은 없었어도 ‘좋더라’고 표현한 사람은 많았던 것이. ‘거듭되는 반전’과 ‘숨막히는 서사’랄 건 없어도 어슴푸레한 기억과 섬세한 감각이 주를 이룬다. 이 작품은 작가에게 앙굴렘 국제만화 페스티벌에서 ‘올해의 발견 작가’상을 안겨주기도 했다.
캐나다의 소도시에서 장난감 가게를 운영하며, 만화책을 모으는 몬티는 철부지 노총각이다. 몬티에게 변화는 거추장스럽고 불필요한 것일 뿐. 그가 사는 세상은 피겨와 만화책으로 둘러싸인 가게와 나이가 지긋한 친인척과의 만남을 위해 외출하는 인근의 시내가 전부다. 그는 우편 주문 신부로 한국인 여성 경을 자신의 세상에 들인다. 그러나 경은 순종적이고 가정적인 동양 여자에 대한 몬티의 환상과는 거리가 멀다. 경은 ‘다르게 살고 싶어’ 타지에서의 삶을 선택한 단호하고 주장이 강한 여성이다. 서로 다른 희망을 품고 시작한 결혼 생활은 시작부터 난항을 겪는다. 경은 남편의 반대를 무릅쓰고 예술가 친구들을 사귀고 사진작가 친구의 누드 모델이되어주는가 하면 예술사 수업을 들으며 자유롭고 열정적인 삶을 갈망한다. 경은 완전한 캐나다인이 되고 싶어하지만 남편 몬티는 신비롭고 순종적인 역할과 이미지를 경에게 강요한다. 경에게 나타난 자유분방한 친구 이브는 경에게 사진 촬영 여행을 제안하며 부부 갈등을 최고조로 올려놓는다. 경은 머리를 짧게 자르고 몬티를 떠날 각오를 하지만 잠시 도시를 떠났던 이브가 결혼 소식을 갖고 돌아오면서 경은 좌절한다. 몬티를 떠남으로써 진정한 독립을 쟁취할 수 있을 거라고 여겼으나 그녀는 몬티나 이브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걸 깨닫고 만다.
작품 내 갈등이 문화적 정형이나 동서양 간의 것만이 아님을 결정적으로 드러내는 순간이다. 그런 틀에서만 보자면 몬티는 서양·가부장적 가해자, 경은 동양·가부장의 피해자라는 단순한 대결 구도가 나오겠지만 무릇 사람은 그것보다 훨씬 복잡한 생명체다. 둘 간의 충돌은 자신의 결핍을 서로에게 투사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자신의 성적 매력에 대해 평생 불안을 느끼고 있었던 몬티는 고분고분한 아내를 맞아 불안을 비교적 편리한 방식으로 해소하고자 했지만 이런비겁함을 경에게 들키는 순간 그의 불안은 부메랑처럼 돌아와 자신의 안전한 세계를 산산조각 낸다. 경은 자신의 국적과 문화를 완전히 갈아치우고 타지에서 완벽한 캐나다인으로 거듭나고자 했지만 오히려 그럼으로써 자신의 열등의식을 드러내고 정체성을 굴복시킨다. 경은 결국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될 기회를 떠내려 보내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