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eg’s cho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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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ctober, 2015
문득 홀로 늙어갈 것이 두려운 날
Editor. 유대란
지난 여름은 재수가 없었다. 살던 집에서 쫓겨나듯 이사를 해야 했고, 이튿날 스툴이 강타한 넷째 발가락이 깔끔하게 골절되어서 한 달을 깁스 신세로 살았다. 독거인으로서 생존에 지장은 없었다. 진료가 잡힌 날엔 콜택시, 배고플 땐 마트 배송서비스를 이용했다. 오차즈케로 끼니를 때웠는데 물에 밥 말아 먹는 걸 좋아해서 그것조차 꽤 좋았다. 그런데 일주일째가 되자 우울을 말아먹기 시작했다. 현미알갱이가 드문드문 떠다니는 녹찻물 위에 자신의 외로운 모습이 비쳤다. 칩거가 타의에 의한 것이 되자 즐겁지만은 않았다. 새삼 ‘독거’에 더해질 노화에 대해 생각했다. 관절이 닳고 팔다리는 모래주머니를 단 것처럼 무거워질, 두 눈은 침침해지고, 외출의 빈도수는 현저히 줄어들 시점이 현재의 부자유한 상황을 닮았을 거라고 생각하니 맥이 탁 풀렸다. 문득 홀로 늙어갈 것이 두려운 그런 밤들에 이 책들을 곁에 뒀다. 노작가들에 의한 이 책들 덕에 그렇게 탈 많고 재수 없던 나의 여름은 차츰 평안해졌다. 그리고 여름의 끝, 나는 물리치료실에서 만난 노인들을감히 ‘할매’ ‘할배’라고 부르면서 그들에게 말을 걸었다.
일흔 넘은 할머니가 이렇게 불건전하고 귀여워도 되는 걸까, 이 책의 ‘나’는 시한부 선고를 받은 후 그날로 잉글리시 그린 색상의 재규어를 지른다. 아침마다 항암치료로 후두둑 빠지는 머리카락을 ‘찍찍이’로 청소하면서 단순노동의 희열을 즐기고, 그것이 지겨워질 무렵 까까머리로 변신을 한다. 그리고 난생 가장 어울리는 헤어스타일을 찾았다고 기뻐한다. ‘나’보다 나이가 많고 성미가 고약한 동네 문구점 할배를 괜히 성가시게 하고 그의 화를 자극한다. 한류 드라마에 빠져서 욘사마, 이병헌, 김승우를 차례대로 짝사랑한다. 그 사랑은 오래가지 않지만. 영양실조로 어린 나이에 죽은 친오빠가 배 나온 대머리 아저씨로 늙어가는 모습을 보지 않아도 되서 다행이라고 고백하는가 하면 이혼한 전 남편을 ‘게걸스러운 술고래’라고 칭한다.
거동이 느려지고 코 앞에 보이는 건물의 입구를 찾는데 헤매면서 ‘나’는 늙음을 불평한다. 하지만 늙음으로 인한 자신의 신체적, 심리적 변화를 부정하거나 슬퍼하지 않는다. 그것을 호기심 어린 태도로 관찰하며 불편할 땐 심기 불편함을 그대로 표출하는 이기적인 할머니가 되기도 하고, 기분이 좋은 날엔 기꺼이 관대한 친구가 되어준다. ‘나’는 노인이기 전에, 일찍 일어나는 것이 싫고, 간혹 충동구매를 하고, 때로 맛없는 요리를 만드는 ‘보통 사람’인 것이다.
늙어감은 살아있는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것이지만 그것을 몸소 겪어보기 전에는 그것이 일상에 어떻게 침투하고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키고 반응하게 하는지 알 수 없다. 첫 섹스, 첫 결혼, 첫 출산, 첫 직장처럼 노화 역시 누구나 처음 겪는 일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부정할 필요도, 미화할 필요도 없는 자연스러운 삶의 과정이고 일상이다. 이 책은 동화 작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 사노 요코가 세상을 떠나기 2년 전까지 기록한 생활담으로 늙음과 삶에 대한 이런 단순한 진리를 일러준다. 이 책을 읽으며 깔깔대며 웃었고, 관대하고 현명한 늙은이가 되어야 한다는 유난스러운 결심을 폐기했다. 가끔 마주치는 노인들에게도 그런 것을 기대하지 않게 되었다. 세상의 모든 노인이 위인일 리는 없다. 그들도 가끔 친구를 만나서 일상의 번거로움을 불평하고, 자기 좋을 대로 살아가고 있는 30대의 나와 비슷한 사람 중 한 명일 뿐.
녹이 슨 쇠가 서로를 문지르는 듯한 불편하고 아픈 소리. 최승자의 시에서는 그런 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시는 1980년대 숱한 청춘들을 ‘감염’시켰다고 한다. 최승자의 첫 시집 『이 시대의 사랑』은 2000년대에 20대가 된 나의 마음도 마구잡이로 후비고 팠다. 힘든 기억을 잔잔하게 흘려 보내기에는 너무 어리고 뜨거웠던 20대 때 최승자의 도발적인 언어는 아픔과 후련함으로 다가왔다. 심란한 기억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휘휘 저어 마음속에 흙탕물을 일으키고 싶은 날 그녀의 시를 읽었다. 그녀는 자신을 ‘곰팡이’에 비유했다. 가을은 “개 같고”, 사랑은 “벼락처럼 왔다가 정전처럼 끊기는 것”이라며 사랑에게 자신의 ‘몸을 분지르고, 사지를 꺾어 꽃병에 꽂으라고’ 선언했다. 정말이지, 멋졌다. 청춘의 우상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최승자는 다섯 번째 시집이 나온 지 11년 만인 2010년에 『쓸쓸해서 머나먼』을 냈다. 그쯤에야 시인의 삶이 그녀의 언어 이상으로 처절했다는 것을 알았다. 고시원을 전전하고 소주 외에는 먹지 않았던 시기를 거쳐 정신병원에 입원을 했다. 시인의 삶이라고 험난해야 하는 것은 아닐 테다. 그러나 그녀의 시가 자신의 살을 깎아먹으며 만들어진 것이라 유독 절절하게 다가왔던 것이라고 여겼다. 한편, 내심 이제는 시인이 좀 편안해지기를 바랐다. 당시 서른이 된 나로서도 삶을 얼만큼 뜨겁게 대할 것이냐보다는, 어떻게 음미할 것인지에 관심이 많아졌고, 애정하는 시인이 자신의 건강을 담보로 삶을 전복시키려 하지 않길 바랐다. 영웅으로서 요절하는 것보다 생의 구차함을 최소화하면서도 삶을 지탱시키는 것이 더 멋질 수 있음을 알려주길 원했다.
다행히 시인은 그렇게 되어 있었다. 여전히 허무와 절망을 안고 있었지만, 시장통을 돌고, 감자, 고구마, 생선을 구경하고, 가로수 길을 걷고, 예쁜 아이들과 산을 쳐다보며, 요리를 시작했다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그녀는 『쓸쓸해서 머나먼』 속에서 구름과 나무와, 계절을 이야기했다. 초기 시들이 비명에 가까웠다면 이 시들은 적막에 가깝다. 서행해야 비로소 눈에 드는 것들을 그린다. “별빛 아래 홀로 가는 낙타 하나 / 볕 아래 잠도 없이 홀로 가는 낙타 하나”처럼. 시인은 삶과 점차 화해하고 시간의 치유력을 믿게 된 듯했다.
7백 페이지가 넘는 이 책에 덜컥 도전한 건 학창 시절 국어 과외선생님이 생각나서였다. 교과 성적을 높여주길 원하던 엄마의 바람과는 달리 선생님은 교과서 바깥의 것들을 가르쳐줬다. 그것도 상당히 멀리 떨어진 것들을. 생일에 기형도의 『잎 속의 검은 잎』을 선물하고 홍세화의 책을 읽혔다. 어느 날은 복사물을 갖고 왔다.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저술의 일부로 노인의 성에 관한 내용이었다. 노인의 성욕을 죄악시 하고, 때로 그것의 존재 여부조차 파악하려 들지 않거나 부정하는 현상에 공모하는 사회적 현실을 이야기했다. 충격적이었다. 그때 나는 난생 처음으로 쓸 만한 생각을 몇 가지 했다. ‘보이지 않는다고 부재하는 것은 아니다.’ ‘남들이 생각하는 ‘나’와 내가 생각하는 ‘나’는 불일치한다.’ 대학에 들어가고 또 새로운 선생을 만나 보부아르의 『제 2의 성』을 읽게 된 후에는 좀 더 유식한 말을 배웠다. ‘타자화’.
보부아르는 ‘타자화’된 계층의 소외를 지적하고 현상을 캤다. 『제 2의 성』에서는 여성, 『노년』에서는 노인을 다뤘다. 개인의 주체성을 제한하는 환경, 유전, 사회적 조건에 평생 반기를 들었던 저자로서 여성과 노인이라는 사회의 타자를 그 누구도 보부아르보다 제대로 다루지는 못했을 것 같다. 『노년』은 노인에게 지정된 자리는 무엇이고 그들을 표상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물학, 신화, 역사, 사회학을 통해 설명한다. 보부아르가 바라보는 노인의 조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노인의 지위는 결코 자신이 정복해 취득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주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런 노인의 지위는 시대와 사회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어느 시대의 어떤 사회에서든 노인은 고정된 행동거지를 강요받으며 ‘나’와 ‘남이 보는 나’ 사이에서 분열을 겪는다. 여기서 보부아르도 부인하지 않는 사실이 하나 있는데 살 날이 급격히 제한된다는 조건, 즉 사회나 타인이 부과하지 못하는 이 공평한 조건 역시 노인이 자신의 존재를 축소하는 데 기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보부아르는 결론에 다다라서는 덜 전투적인 어조로 이렇게 이야기한다. 마치 노년의 자신을 달래듯, 그리고 다른 노인들에게 당부하듯 “모든 환상들이 사라지고 생명의 열기가 식었다 하더라도 계속 삶에 밀착하기 위해서는 차라리 노년에 대해 너무 생각하지 말고, 정당하고 참여적인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낫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