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eg’s choice

책이 선택한 책

December, 2015

내 곁의 정치

Editor. 박소정

어른들이나 하는 것이지 내게는 관심 밖의 대상이었다. 교복을 입던 시절에는 남들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 그저 달달 외우는 과목에 불과했다. 그토록 바라던 성인이 되고부터 특히 술자리에서 누구보다 뜨거운 분노를 쏟아냈던 주제가 돼 있었다. ‘기대는 순진한 애들이나 하는 것’이라는 한 선배의 말을 듣고, ‘정치’에 대한 기대는 서서히 꺾이고 말았다. 사실은 스스로 꺾었다. 그편이 아무래도 편했으니까. 하지만 작금의 세태는 점점 외면 자체로 죄책감의 무게를 높인다. 사실 정치는 잘못이 없다. 정치를 오용한 이들의 잘못이며, 그것을 수수방관하며 투표권조차 스스로 차버린 이들의 잘못이다. 정치는 어쩌다 남의 일이 돼버렸을까. 책장의 책들을 훑어봤다. 그 책 중 남은 희망의 불씨를 되살릴 만한 책들을 꺼내보았다.

『생각의 좌표』 홍세화 지음
한겨레출판사

‘자유’의 반대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억압’이라고 정답을 내놓기도 하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자유의 반대가 마치 ‘불안’이나 ‘무질서’인 양 받아들인다. 그래서 용산 참사 사태나 쌍용차 노조 파업에서 보듯이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의 사회정의와 인권 요구를 법과 질서의 이름으로 억압하는 데 동의한다.—본문 중
몇 년 전 한 합숙 면접장에서 자정이 넘어갈 무렵 토론이 벌어졌다. 물론 시험의 일부분이었다. 주민들이 혐오하는 시설을 국가에서 최적지라 판단한 평온한 시골 마을에 들여 놓느냐 마느냐의 문제였다. 젊은 여론이 그러하듯 모두가 반대표를 들었다. 그러자 심사위원이 찬성 편을 들면 가산점을 고려해보겠다고 제안했다. 고심 끝에 나를 포함해 세 명이 찬성 편을 들었다. 찬성 측 자료를 처음으로 제대로 파악하고 부지런히 준비해 토론에 임했다. 이기는 것은 택도 없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승리의 여신은 우리를 향해 웃었다. 찬성 측이 이길 수 있었던 원인은 단순했다. 반대 측은 끓어오르는 감정이나 부정확한 정보만 지녔을 뿐 정확한 자료나 논리에 대한 이해는 부족했던 것이다.
저자가 이 책을 통해 던지는 “내 생각은 어떻게 내 생각이 되었나?”라는 질문은 당시 나에게 큰 화두였다. 세상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당연한 생각은 없다. 모두 누군가와의 대화, 교육, 미디어 등을 통해 학습된 것들이다. 1979년 남민전 사건에 연루되어 프랑스로 망명가고, 그곳에서 30년 넘게 택시기사로 지냈던 저자는 2002년 한국으로 귀국하여 『한겨레』 기획의원, 진보신당 당대표 등을 지냈다. 저자는 똑똑한 사람일수록 자기 생각을 수정하기보다 합리화시켜 자신의 생각을 고집한다고 말한다. 18세기 프랑스 교육철학자 콩도르세는 이를 두고 사람은 ‘생각하는 자’와 ‘믿는 자’로 나누어진다고 했다. 저자는 최근 사회에 대하여 무지와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것이 죄는 아니지만 몰상식의 자양분이 되며, 영악한 자들이 뻔뻔하게 군림하는 토양이 된다고 전한다. 더디지만 간혹 보이는 발전된 민주주의의 모습은 우리가 불편을 무릅쓰고 자신의 생각에 끊임없이 의심해야하는 이유기도 하다. 의심이 사라지고, 일방적인 학습이 계속되다 보면, 결국 국가의 주체는 사라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 유시민 지음
생각의길

‘왜 나는 저축을 못 할까’ ‘왜 홈쇼핑에서 파는 물품은 다섯 가지 색일까’ ‘왜 우리는 가는 식당만 갈까’. 『꿀잼 경제학』은 이같이 궁금하지만 어디다 물어보기도 뭐하고 논쟁을 벌여봐도 속 시원히 알 수 없는 의문들에 답을 제시하는 행동경제학의 맛보기 같은 책이다. 행동경제학은 심리학과 밀접한 학문으로 사람들이 경제 활동을 할 때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연구하는 분야다. 행동경제학에서는 인간이 그다지 합리적이거나 경제적이지 못하다고 전제한다. 인간의 정보 수집 도구가 되는 감각조차 불완전하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신이 절대 틀리지 않는다는 ‘우월의 착각’에 빠져 있다. 그래서 편향된 판단을 내리거나 오류를 범한다. 그것을 ‘휴리스틱에 의한 바이어스’라고 한다. 이 책은 다양한 사례를 들어 우리가 경제 활동에서 범하는 바이어스의 종류를 세부적이고 구체적으로 나열한다. 여기서 소개하는 바이어스는 비단 개인의 경제 활동으로만 그 영향 범위가 국한되지 않는다. 이 책에서 분석하는 비합리적 사고와 시야의 편협함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관찰되고 확장, 적용된다. 보고 싶은 것만 보는 ‘확증 바이어스’, 승세를 잡은 편을 지지하고 싶어지는 ‘밴드왜건 효과’, 복잡하게 비교를 해야 할 바에는 선택을 포기해버리는 ‘디폴트 선호 경향’, 변화가 가져오는 위화감으로 인한 ‘현상유지 바이어스’ 등은 우리가 재화나 서비스를 구매할 때도 나타나지만, 선거에서 후보를 선택하고, 타인과 관계를 맺고 자기계발서에 중독되고 습관을 형성하는 데도 어김없이 나타난다. 이를테면 이렇다. 정책이나 이념을 굳이 지지하지 않는 정치 후보라 하더라도 승세를 잡았다면 자신의 표의 유효성을 지키기 위해 그에게 표를 던지거나(밴드왜건 효과), 이성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는 사람은 상대가 다양한 모습을 보여줌에도 자신의 믿음에 부합하는 면을 발견하면 편견을 더 공고히 한다(확증 바이어스). 생활과 밀접하면서도 적용 범위가 무궁무진하다는 점이 행동경제학을 매력적인 학문으로 만드는 것인 듯하다. 어떻게 보면 삶이 곧 경제 활동이라는 해석에 이를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행동경제학을 통해 자신의 불완전함을 직시하는 것으로 우리는 나아질 수 있을까? 이것도 ‘우월의 착각’의 일종은 아닐까.

『표백』 장강명 지음
한겨레출판사

나는 세상이 아주 흰색이라고 생각해. 너무너무 완벽해서 내가 더 보탤 것이 없는 흰색. 어떤 아이디어를 내더라도 이미 그보다 더 위대한 사상이 전에 나온 적이 있고, 어떤 문제점을 지적해도 그에 대한 답이 이미 있는, 그런 끝없이 흰 그림이야. (…) 나는 그런 세상을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라고 불러.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에서 야심 있는 젊은이들은 위대한 좌절에 휩싸이게 되지.—본문 중
대학을 졸업할 무렵부터 취업활동을 시작했다. 학점 관리, 어학 등 스펙을 쌓은 것부터 따지자면 대학을 들어서면서부터 시작한 셈이었다. 같은 꿈을 꾸는 이들과 스터디를 하고, 매일 도서관과 카페를 전전긍긍하며 취업준비를 하길 몇 년, 결국 원하는 곳 언저리에서 일하는 행운을 얻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사회 초년생의 어리버리함을 벗고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내가 원하는 일이 아닌, 규격화된 거대한 틀의 부품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회사에서 자유도 주어졌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아주 사소한 것에 불과했다. 그 탓에 방황을 하다 조금 더 자유를 얻고자 그곳을 나왔다.
『표백』은 훨씬 더 넓은 관점으로 젊은 세대의 꿈과 좌절 그리고 순응하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세상을 고하고 있다. 소설의 주인공은 대학의 한 행사를 통해 세연, 휘영, 추 등과 어울린다. 함께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무엇도 부러울 것 없는 처지의 세연이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후에 ‘와이두유리브’라는 웹사이트를 통해 자살선언문이 발견되는데, 주인공의 지인들은 이곳에 글을 올린 뒤 하나둘씩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것도 그들이 사회에서 가장 성공한 삶이라고 말할 수 있는 타이밍에 말이다. 여기에서 자살이라는 것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표현하고 있는 셈이다. 작가는 이미 완성되어 파이가 얼마 남지 않은 이 사회에 좌절하고 그 세대에 표백되어갈 수밖에 없는 이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글로 풀어냈다. 과연 우리는 자신만의 색을 찾아낼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색으로 기존의 정해진 선을 이탈하여 새로운 미래를 그릴 수 있을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