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eg’s choice
책이 선택한 책
December, 2015
맛과 인생
Editor. 지은경
지치고 활력 없는 삶에 생기를 불어넣어 줄 무언가가 간절히 필요할 때가 있다. “예전에 내가 어떠했더라?” 혹은 “그때는 어떻게 그 일을 할 수 있었을까?” 생각하며 나이 탓을 해버리기 일쑤다. 어릴 때는 맛에 대해 집착을 보이기 마련이다. 한겨울, 엄마 몰래 집 앞 모퉁이에서 덜덜 떨며 먹었던 부드럽고 차갑던 아이스크림은 환상 그 자체였다. 입안에 넣는 순간 끝없는 황홀함을 안겨주던 새콤달콤한 사탕은 기분 전환으로 안성맞춤이었다. 뛰어놀다 들어와 부엌에서 훔쳐 먹은 설탕 한 스푼의 기쁨을 요즘 어린 친구들은 잘 모르겠지? 조금씩 아껴먹던 폭신한 바나나, 당시 내게 과일의 왕은 누가 뭐래도 바나나였다. 그 모든 기쁨의 맛들은 지금 아무런 감흥도 안겨주지 않는다. 그렇게 나이가 들어가는 것이다. 맛들이 무의미해지는 순간 어른이 되고 다른 일에 집중할 수 있게 되며 음식 외의 고민을 하며 살아가게 된다. 그래도 되는 것일까? 맛있는 음식을 입안에 넣을 때 행복감이 사라진다는 것은 어쩌면 인생이 지치고, 뭐 하나 좋을 것 없고, 더 이상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는 우울한 상념 때문은 아닐는지.여기 우리의 미각을 통해 행복의 감정을 느끼게 해줄 책을 몇 권 소개한다.
“채소의 맛을 제대로 살리기 위해서는 몇 분 동안 가열해야 한다든지 하는 정해진 요리법이 없을뿐더러, 각각의 채소가 가지고 있는 맛과 풍미를 살리는 타이밍은 저마다 달라서 ‘자, 이제 충분히 맛있어졌어!’ 하는 신호를 담은 향이 올라올 때까지 조급해하지 말고 기다리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흡사 어린아이의 가능성을 믿고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꽃을 피울 때까지 옆에서 지켜보는 것과 같다.”—본문 중
이 책은 수필일까, 아니면 요리책일까? 채소의 맛을 빌어 인생에서 느끼는 무수한 감정을 나열하고 요리하는 채소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조곤조곤 설명하고 있는 이 책은 몇 가지 장점을 가지고 있다. 우선 책에 적힌 레시피들을 쉽게 따라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대부분의 레시피 책들이 구하기 힘든 재료와 조리법을 소개하면 요리를 할 마음이 딱 사라지는 법인데 『채소의 신』은 구하기 쉬운 재료와 조리법들을 소개하고 있다. 또 사진 하나 없이 소박한 글로만 이루어져 멋을 부리지 않아 읽는 내내 평화로운 마음을 간직할 수 있으며 부담스럽지 않아 좋다. 또 하나는 레시피와 인생의 맛을 비교해가며 쓴 글은 기분을 평화롭게 하고 최근 들어 야근 중 자주 시키는 인스턴트 배달 음식을 먹으면서도 “아, 이제 좀 채소를 좀 먹어볼까?”라는 생각을 품게 한다. 그러니 건강에도 분명 도움이 되는 책일 것이다. 이 책은 요리를 하는 사람이 재료를 대하는 자세에 대해 적잖게 설명하고 있다. 재료 하나하나가 그들만의 특성을 잃지 않도록, 마치 영화 ‘앙—단팥 인생 이야기’에서 구미코 할머니가 긴 여정을 통해 우리에게 와준 팥을 소중히 여기며 격려하고 어여삐 여기듯이, 그렇게 채소의 이야기들을 늘어놓고 있다. 피곤함에 찌들고 웃을 일도 없고, 더 이상 행복하지 않은 삶, 우리의 식생활에 작은 변화만 주어도 인생을 느끼는 마음 자세가 조금은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우리의 잃어버린 입맛을 다시 찾을 수 있기를.
“이것이 바다에서 항구로, 항구에서 내륙 도시로, 그리고 군이나 면을 거쳐 이 깊은 산속으로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과 손을 거쳤을까? 하지만 그 덕에 동태 멸치 따위와, 고등어의 미덕은 방방곡곡 어디나 있다는 것이다.”—본문 중
요리를 말하는 책들이 지금까지 요리법과 테이블 장식에 급급했다면, 『내 밥상 위의 자산어보』는 삶의 무게, 인생살이, 재료를 대하는 마음, 재료가 가진 진정한 매력을 써내려간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지은이는 바다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인물로, 바다에서 나는 재료들을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설명해간다. 생계형 고기 잡기, 고기를 잡으며 벌어지는 해프닝들과 풍경들, 기다리는 시간들과 크고 작은 난관들에 관한 많은 이야기가 바닷바람과 함께 책 위를 흐른다. 책을 통해 해산물에 관한 방대한 지식은 물론 재료가 가진 특별한 맛을 매우 쉽게 서술하여 문득 바닷가에 앉아 조촐하지만 신선한 상차림을 마주하고 있는 듯한 평화로운 마음을 갖게 한다. 흔히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이라는 말을 한다. 성의 없이 들려오는 말이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먹고사는 것이 아니라 좋은 사람들과 혹은 혼자서 조용히, 축복이 넘쳐나는 근사한 밥상을 누리기 위해 우리는 고군분투하는 것이다. 좋은 음식,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그저 그 순간에 먹어 없어지는 것이 아닌 그것이 내 몸으로 들어가 나의 살과 피가 되기에 먹고사는 문제는 그리 간단한 문제도 아니요, 또 쉽게 대충대충 먹기 위해 사는 삶은 더욱 아닐 것이다. 책의 표지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다.
“내 이별이 뭔고 했더니 허공에 떠 있는 푸른 물방울 이었구먼 그래. 이 푸른 물방울 행성의 가여운 종족, 지금 바다로 달려가 소주 마시며 울고 싶은 당신에게 바칩니다.”
이 책을 읽으니 바다를 바라보며 소주를 마시고픈 욕망이 왜 이는지 알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맛’에만 민감한 시대. 맛의 이면에 있는 ‘미’에는 둔감한 시대. 요리를 마음으로 즐기는 사람은 운치에 무게를 두고 자연을 소중히 여긴다. 식 재료에 대한 생각, 요리를 사랑하게 되면 많은 것들 에 애정의 눈을 뜨게 되는 법이다. 맛있는 요리의 근본인 재료. 특히 일본 음식에서 훌륭한 재료는 거의 모든 것을 의미한다. 일본 음식은 재료의 맛과 질감을 그대로 살리는 조리법이 대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소중한 것, 좋은 것을 가까이 두고 느끼면 그에 대한 애정이 피어나듯 좋은 식재료를 그대로 마주하다 보면 재료가 가진 소리와 색, 냄새, 질감, 씹을 때 입안에 감도는 향까지 알게 되고 그 가치를 마주하게 된다. 음식을 어떤 방식으로 먹어야 좋은지도 매우 중요하다. 초밥은 한입에 먹어야지 두 입에 나누어 먹으면 맛이 떨어지고 고추냉이는 곁들여 먹는 것만으로도 간장의 풍미를 한층 품격 있게 만들어준다. 『로산진의 요리왕국』은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있는 재료들을 하나하나 나열하며 어떻게 먹고 어떻게 느껴야 하며, 또 어떤 식감에 집중해야 하는지를 매우 친절하게 설명한다.
“나는 많은 사람이 하루하루 적당히 주어지는 음식물을 먹는다고 생각한다. 아내가 대충 차려준 밥, 요리인이 대충 내놓는 요릿집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는 모습을 볼 때마다 맛의 세계에 무지한 사람이 꽤 많다는 사실에 경악한다.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인지에 대한 지각이 없어도 너무 없다. 들새나 야수처럼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자꾸 자꾸 찾아 먹으며 충분한 영양을 섭취하는 자유를 모르다니. 어느 시대에 생긴 관습인지 모르겠으나, 이 점은 가축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본문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