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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uary·February, 2016
불안과 마주 앉기
Editor. 박소정
첫 등교, 새 친구 사귀기, 시험 결과. 지금 생각해보면 별일 아닌데, 당시에는 왜 그리도 불안에 떨었는지 모르겠다. 아마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성인이 된 지금은 경험한 것 때문에 불안을 겪기도 한다. 믿었던 이로부터 받았던 외면과 이별통보, 강하기만 했던 부모님의 여린 모습, 생각보다 더 부조리한 세상 등 불안의 유발점은 넘쳐난다. 최근 남부러울 것 없어 보이던 한 연예인이 불안장애를 호소하며 모든 일을 멈추고 휴식에 들어갔다. 누군가는 그에게 배부른 소리라고 야박하게 굴 수도 있을 테지만, 그를 이해하고 응원해주는 이들이 훨씬 많다. 그만큼 많은 이들이 알 수 없는 불안이라는 공포에 공감하기때문이 아닐까? 1978년 미국 심리학계에서 ‘사기꾼 증후군’이라는 말이 처음 쓰이기시작했다. 성공하고 주변의 인정을 받았더라도 스스로는 무능하다고 생각하며 이를타인에게 들키지는 않을까 불안해하는 증상이다. 당당하고 자신 있는 태도를 선호하는 현대 사회에서 불안은 숨겨야 할 대상이됐다. 하지만 그럴수록 불안은 그 크기를 키워간다. 누군가에게 말하지 못하더라도 불안에 대응할 방법이 있다.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자리한 불안이란 존재를 관찰하고 논해온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이것이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리고 불안과 마주 앉아 그 정체가 무엇인지살피는 것이다. 희미했던 불안의 정체가 뚜렷해질수록 우리는 그 테두리 밖으로 걸어나갈 힘을 얻게 될 것이다.
학창시절부터 친하게 지내온 친구 둘이 있다. 각자의 취향은 다르지만 서로 자라온 환경이 비슷했던 덕분인지 지금까지도 돈독하게 지내고 있다. 그런데 각자 일을 시작하고, 소위 사회에서의 지위가 달라지고 어울리는 사람들이 달라지며 보이지 않는 벽이 생겼다. 그중 친구 A가 점점 바빠지고 승승장구하자 어쩔 수 없이 친구 B와 둘만 만나는 시간이 잦아졌다. 그리고 어느 날 친구 B는 애써 불안한 기색을 감추며 말했다. “나, 사실 걔한테 연락하기도 좀 뭐하고, 괜히 질투 같은 게 나더라.” 뭐 그럴 수도 있다며 대충 넘어갔지만, 사실 친구가 한 말이 정확히 내 마음과 같아 당황스러움을 감추느라 애썼다.
불안은 무엇보다 불황, 실업, 승진, 퇴직, 업계 동료와 나누는 대화, 성공을 거둔 걸출한 친구에 관한 신문 기사 등으로 유발된다. 질투(불안도 이 감정과 관련이 있다)를 고백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안을 드러내는 것 역시 사회적으로 경솔한 행동이며, 따라서 이 내적인 드라마의 증거는 흔치 않다. —본문 중
작가는 불안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불안을 위와 같이 정의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구나’ 하고 위로를 받는 대목이다. 사실 오래된 친구와 나 사이에 그 어떤 경쟁의식 따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 자체가 어리석은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는 불안의 원인과 해법을 다루며 우리가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는 불안을 정면으로 마주 보게 한다. 그는 불안을 ‘현대 야망의 하녀’라고 얘기하며 사랑 결핍, 속물근성, 불확실성과 같은 것들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우리가 문명의 발달로 실제 궁핍이 적은 사회에 살게 된 것이 사실이지만, 자신이 부족하다는 인식과 궁핍에 처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늘어난 것은 역설적이기도 하다. 알랭 드 보통이 전하는 이야기에는 사실 불안에 관한 정답은 없다. 그는 불안의 상황에 대처하는 가장 유익한 방법으로 불안한 상황을 이해하고, 이를 밖으로 꺼내어 이야기해보자는 제안을 내놓는다. 우리는 이 제안을 통해 친구에게 숨겨두었던 속마음을 이야기하고 이해받게 될 때의 속 시원함을 느낄 수 있다.
누군가의 쓰라린 경험은 나에게 약이 되기도 한다. 술자리가 무르익을 때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불행 배틀’이 시작된다. 누군가는 아침 드라마에서도 듣지 못한 지질한 가정사를 말하고, 다른 이는 회사에서 자신이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지 고백하며 술을 들이켠다.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다 보면 어느 순간 ‘나 정도는 양반인 편’이라고 위안을 받는다. 이상하고도 잔인한 노릇이지만, 언제부터 세상이 사랑과 정의가 넘치던 초원이었던가 싶다.
저자는 10대 때부터 신문 배달을 시작으로 갖은 일을 하다 어느 순간 ‘항상 엔진을 켜둘게’라는 유명한 노래의 가사를 쓰고, 라디오의 음악작가가 됐다. 그리고 현재는 작가의 길에 서 있다. 책에서 ‘그’라고 불리는 이는 작가와 오랫동안 환자와 의사로 지내온 정신과 의사다. 둘이 듀엣을 하듯 주고받는 이야기의 주제는 불안이다. 여기에서 불안은 극복의 대상이 아닌 평생을 함께하는 존재로 나온다. 작가는 불안과 우울은 농담을 모른다고 말한다. 그에게 친한 이들과의 술자리, 예능 프로그램 등 그 어떤 것도 웃음을 선물하지 못한다. 그리고 불안과 우울은 자신이 약해진 틈을 타 급작스럽게 덮쳐와 도무지 익숙해질 수 없는 존재라 말한다. 겨울날의 인정 없는 바람도, 사려 깊은 봄날의 햇살도, 집중할 수 없는 책도 그에겐 모두 불안의 대상이다. 하지만 의사는 ‘불안’은 불안한 관계, 불안한 세상, 불안한 청춘 등 어디에 붙여도 말이 된다고 하며, 작가에게 싫은 것 혹은 자신이 싫증 난 것에 불안이라는 이름표를 붙이는 것은 아니냐고 반문한다. 하지만 그 역시 불안은 어디에나 존재하는 것이라는 것에 동의한다. 안타깝게도 사람은 만족하는 순간조차도 언젠가는 이 만족이 사라질 것을 두려워해 제대로 행복의 순간을 즐기지도 못한다고 한다. 그래서 세상을 대하는 날을 조금 무디게 만들 필요가 있다. 그는 계속 날을 세우고 있다면 멀리서 날아오는 새 한 마리를 포탄으로 오인할 수도 있다고 한다. 스스로 ‘일희일비’하지 말자는 다짐을 한 지 오래다. 그래서인지 기쁨에는 어느 정도 덤덤하게 반응할 수 있지만 작은 비극에는 속절없이 무너지며 불안거리를 만들어내게 된다. 그럴 때면 불안을 가라앉히고자 그 정체들을 노트에 써내려간다. 그러면 마음이 한결 차분해지고, 평정심을 되찾아간다.
먼저 대담하게 자신을 믿는 것이 좋다. 그대들 자신과 마음을 믿는 것이 좋다. 자신을 믿지 않는 자의 말은 언제나 거짓이 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본문 중
“만약 지옥 길을 걷고 있다면, 계속해서 전진하라.” 영화 ‘내부자들’에서 경찰 출신으로 힘들게 공부해 검사가 된 우장훈이 고시 공부를 하던 시절 책상 위에 써 붙여놓은 문구다. 영화에서 짧게 스쳐 지나갔지만, 아직도 그 울림이 남아 있다. 누구나 그런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원대한 꿈을 이루기 위해 모든 것을 내버린 채 이를 악물고 달렸던 시간 말이다. 그리고 어두운 터널 같은 시기를 한 줄기 빛과 같은 문구를 하나씩 가슴 속에 품고 견뎌냈을 것이다. 허무주의를 말하며 초인Übermensch으로서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늘 변화를 꿈꾸는 능동적인 인간이 될 것을 강조했던 프리드리히 니체는 19세기의 가장 위대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으며 그가 남긴 이야기는 오늘날 많은 이들의 정신적 지지대가 되어주고 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더욱 많은 이들이 니체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니체의 어려운 사상들을 삶 속에서 풀어놓고 있다. 그는 사람들이 매일 목욕을 하는 것처럼 평소에도 두려움과 소심함 같은 정신의 때를 철학적 사고를 통해 벗겨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니체가 『아침놀』에서 “뱀이 허물을 벗지 못하면 죽듯 인간도 낡은 사고의 허물에 갇히면 죽고 만다”고 말한 것을 일본 영화계에 빗대어 표현하며 이해를 돕는다. 한때 세계 영화계에서 명성이 높던 일본 영화가 어느 순간부터 ‘의미 없는 안일함’에 기대어 누가 보아도 쉽게 이해하고 감정 이입하기 편한 영화를 만들며 세계 영화의 변방으로 밀려났다. 물론 현재 일본 영화에서 주로 이야기되는 소소한 즐거움을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하지만 장 뤼크 고다르의 영화와 같이 관객에 따라 여러 해석과 이야기가 나오고, ‘의미 있는 난해함’을 가질 때 비로소 더 발전할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전한다. 시간이 흐르며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하나둘 늘어나고, 삶의 의미가 희미해질 때 일독을 권한다. 니체는 당신에게 ‘왜?’라는 질문을 던지며 무뎌지고 약해진 가슴에 불을 지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