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eg’s cho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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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h, 2016
개인의 틈
Editor. 박소정
신호를 기다리며 무심결에 건너편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닌 사람들이었지만, 모두 한 치의 틈도 보이지 않는 무표정을 하고 있다. 혹여 길을 물어야 한다면 꽤 용기를 내야 할 것 같았다. 우리 사회에서 무표정은 낯설지 않다. 표정의 변화를 보이는 것은 감정의 변화를 뜻하며, 이는 곧 타인에게 개인의 틈을 보여주는 것과도 같다. 사회에서는 이를 ‘어른스럽지 못한 것’으로 평할지 모르겠지만, 개인들은 끊임없이 다른 개인의 틈을 찾아 헤맨다. 여기 개인의 틈을 직업적으로 감추어야 하는 이들이 있다. 판사, 기자, 작가로 활동 중인 이들은 모두 사회를 관찰하고 평가하는 일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이 자발적으로 쓴 글 속에는 그들의 틈이 존재한다. 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속에 그들 또한 ‘나와 같은 사람이구나’ 하고 유치한 안도감을 느낀다.
고등학교 시절, 새벽부터 0교시 수업을 듣고 자정이 되어서야 반쯤 감긴 눈으로 친구들과 집으로 돌아가던 기억이 아직도 선하다. 혼자라면 못 견뎠을 시간이었다. 공부 때문에 힘들었던 기억보다는, 친구들과 함께 매점으로 달려가던 기억, 일찍 끝나는 날이면 다 같이 영화를 보러 갔던 기억이 선명하다. 이렇게 좋았던 추억뿐인데 이상하게도 동창회 소식은 달갑지 않다. 친구의 꼬드김에 딱 한 번 참석한 적이 있다. 몇십 명이 되는 인원이 고깃집에 어색하게 둘러앉아 비슷한 말을 주고받고, 기억나지 않는 것도 기억난다는 듯 크게 웃었다. 한국의 집단주의 문화를 답습한 모양새였다. 다행히도 나와 비슷한 눈치의 몇 명은 자연스레 무리에서 이탈해 마음 편한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현재 인천에서 부장판사로 일하고 있는 저자 문유석은 겉치레와 집단주의가 만연한 한국 사회에서 당당히 ‘개인주의자’임을 밝힌다. 하지만 그는 개인의 자유를 침해당하지 않기 위해 회식 자리와 같은 어울리는 자리에서 곧잘 타인들이 원하는 사회인 코스프레를 수행해낸다. 한국 사회에서 요령껏 사는 방법을 터득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개인주의자로서 사회생활을 하며 참을 수 없는 것들에 대해 토로한다. 그는 온라인상에서 ‘팩트는 팩트’ 혹은 ‘개인의 취향 존중’을 운운하며 날생각을 무심히 던지는 이들에게 ‘아무리 사실이라 한들 함부로 말할 권리는 없다’ 고 단언한다. 하늘 아래 정확히 가치 중립적인 팩트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예로 백인이 흑인을 비하하는 의견을 표출하는 것은 오랜 시간 노예로서 불평등을 겪어온 그들의 역사에 대해 무지한 것으로, 팩트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온라인상에서 소수자, 약자에 대한 혐오 발언들이 쏟아지는 판국에 유의미한 지적이다. 그리고 그는 대한민국이 행복지수를 높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수직적 가치관과 집단주의에서 탈출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말한다. 과학적으로 인간은 인간관계에 의해 행복을 느끼는 동물인데, 한국은 인간관계가 주요 스트레스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일단 ‘싫은 건 싫다’고 말하는 것부터 권한다. 무난한 사람이라는 테두리에서 벗어나겠지만, 자유와 행복의 가치는 그보다 훨씬 크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 기자로 일한 저자 남재일은 누구보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대중문화를 분석하고 있다. 집단주의 속 개인의 초상부터 근대 한국의 문제점, 성적 욕망, 소통, 예술 등 다양한 분야를 주로 영화를 매개체로 하여 저자는 자신의 시각을 전달한다. 그는 ‘모든 집단은 불온하고, 집단 속의 개인은 불구’라고 평하며 집단에 대해서는 불신하지만, 자유로운 개인에 대해서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또한 한국 사회에서 끊이지 않는 자살 문제를 여러 가지 측면에서 고찰한다. 헤밍웨이나 버지니아 울프 등 세계적인 작가들의 자살은 작품과 결합하여 그럴듯한 하나의 이미지로 받아들여진다. 그런데 무명 작가, 즉 우리가 모르는 타인의 죽음에 대해서는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가? 뉴스에서 흔히 접하는 자살 소식을 들으면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왜?’와 ‘어떻게?’라는 두 가지 질문이 떠오른다. 따라서 뉴스는 이 두 가지를 중심으로 자살 동기와 현장의 상태를 필수적으로 보고한다. 하지만 저자는 한 개인의 자살 동기는 그 누구도 명쾌하게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도 뉴스에서 몇 개의 항목으로 자살 동기를 명쾌하게 단정 짓는데, 이는 우리가 한 개인이 삶을 포기한 진짜 이유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숱하게 들어온 가정불화, 실연, 생활고 등 자살 동기는 죽은 자의 사연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산 자에게 희망의 똥침을 놓기 위한 것’이라고 전한다.
저자 남재일이 자발적 미혼모로 나선 마돈나를 바라보는 시선도 조금 남다르다. 당시 여론과 언론 모두 시대를 앞서간 행보라며 박수갈채를 보냈다. 하지만 그는 독자에게 ‘서울의 평범한 20대 회사원이었다면, 내 가족이라면 어땠을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자발적 미혼모’는 가부장의 그늘에서 벗어나 온전한 삶을 이룬 상징으로 유통되었지만, 실은 그런 삶을 이루기 위해서는 경제적 조건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래서 저자는 마돈나는 페미니즘에 대한 각성이라기보다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확인시켜주는 상징이라고 말한다. 알아야 할 진실을 인터넷 뉴스의 헤드라인으로 접하는 이들에게, 또 모든 것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이들에게 ‘다시’ 생각해볼 기회를 제공한다.
맏이인 탓일까, 어릴 적부터 언니와 오빠가 좋았다. 아침부터 내복 바람에 친한 언니와 오빠네 집을 전전하다가 엄마에게 심한 꾸중을 들은 적도 있다. ‘첫째로서 모범이 되지는 못할망정 동생들을 챙기지 않고 놀러만 다니면 어쩌느냐는 것’이 훈육의 요지였다. 하지만 그럴수록 나는 청개구리 심리가 발동하여 더욱더 언니와 오빠들을 따라다녔고, 그런 습관은 20대 초반까지도 이어졌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무의식중 한 살이라도 많은 이를 더 신뢰했던 것 같다. 나보다 더 일찍 배우고, 경험해보았으니 조금이라도 의지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믿음은 성인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미성년자에서 탈출해 남들이 해보는 이런저런 것들을 겪어보니 내가 그렇게 믿었던 언니, 오빠들이 하는 얘기들은 ‘어른의 이야기’라기보다는 한 개인의 경험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라디오 작가로서 그리고 최근에는 『나는 아직, 어른이 되려면 멀었다』를 히트시키며 글로 대중과 소통하고 있는 강세형 작가는 이 책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와 픽션의 경계에서 개인, 일상, 음악 등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그는 “어른이 되려면 멀었느냐”고 묻는 기자에게 “좋은 어른이 되려면 멀었다”고 답하며, 개인적으로 ‘좋은 어른’이란 무엇일까 고민한다. 그는 ‘자신을 의심하지 않는 어른’, ‘내가 알고 있는 세상이 100% 옳은 것이라 확신하는 어른이 무섭다’며 그가 생각하는 좋은 어른의 기준을 우회하여 말한다. 작가는 어른의 삶이란 아슬아슬한 줄타기의 연속이라고 전한다. 친한 친구 사이에서도 비밀을 가져야 하고, 나와 다른 삶을 존중해야 하며, 넘어서 안 될 경계선을 잘 알고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의심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의 의견에 동의하는 바다. 나 또한 누군가보다 어른으로서 조언 같은 것을 할 때가 있는데, 처음 의도와 달리 말을 할수록 내 의견에 100% 확신하며 ‘꼰대’처럼 말할 때가 있기 종종 때문이다. 이미 흐른 말을 주워담을 수 없지만, 잠자리에 들기 전 허공에 하이킥이라도 날려본다. 그리고 다짐한다. 어른이 되지는 못할망정 꼰대는 되지 말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