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eg’s choice

책이 선택한 책

July·August, 2016

‘오글보글’ 열매 따기 좋은 날

Editor. 이수언

『나는 다만, 조금 느릴 뿐이다』 강세형 지음
김영사

어렸을 적 나는 오글 열매를 많이 달고 다녔다. 언니를 따라 이소라의 라디오를 들으며 라디오에 입문했고, 라디오 작가를 해야겠다는 일념으로 수첩에 끄적끄적 글을 쓰기 시작했다. 수첩에는 지금도 차마 볼 수 없는 오글거리는 감상을 많이 남겼다. ‘난 가끔 마음이 아파서 눈물을 흘린다. 마음으로 우는 내가 좋다’와 같이 민망한 것들. 고등학생 때까지만 해도 이런 부끄러운 말들로 친구들한테 욕먹기 일쑤였는데, 언제부턴가 이 열매를 딸 수 없게 됐다.
여덟 번째 주머니 속 그 책은 이런 오글보글한 감성 열매를 다시 따고 싶은 마음이 드는(?) 사람들을 위한 감성 안내서다. 강세형의 에세이 컬렉션 『이야기와 나 세트』에 속한 미니시리즈 중 하나인 『나는 다만, 조금 느릴 뿐이다』다. 두루마리 휴지 한 장 반 크기로, 책을 들고 조용히 볼 수 있는 장소를 모색한다면 읽을 준비는 끝났다(눈물 대비 휴지 2칸 정도도 필요하더라). 저자의 일상이 담담히 펼쳐지는 이 책은 그동안 우리가 잊고 있던, 삶을 돌이켜보는 순간들로 가득하다. 쉽게 아파했던 나날, 어른처럼 보이기 위해 애쓴 순간들, 나이가 먹고도 무엇을 할지 몰라 방황한 시간 등. 화장실에 들고 가 ‘감성 에세이 너무 뻔하지 않나?’ 하며 읽다가, 큰일을 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는 못생긴 열매를 마주했다. 나를 판단하는 타인이 싫었지만, 진지한 마음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심사가 뒤틀린 채 지내온 것은 나였음을. 너무 무디게 살아왔음을 반추해보았다. 그러니 누구나 ‘오글보글’한 열매를 언제든 따 먹을 수 있는 나무 한 그루쯤은 마음속에 키워야 함을, 나무를 키우기에 참 좋은 계절임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