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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mber, 2016
공생: 나의 유토피아를 위해 너의 디스토피아를 만들지 않는 것
Editor. 한진우(메디치미디어 편집자)
메디치미디어 편집부에서 근무 중. 취미는 사무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청와대 지붕을 보며 불순한 상상을 하는 것.
국정원이 싫어할 책을 출간했으나 몇십 권 사가고는 절대시계 하나 보내오지 않아 좌절 중이다.
공생이라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 말인가. 경제·사회·문화·국제 관계에서 공생을 모색하는 일은 분명 인류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할 것이다. 하지만 이상과 달리 현실에서 공생이 실현 가능할지는 생각해볼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공생에는 여러 형태가 있겠지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경제적 공생’이다. 한때 자본가의 잉여가치 독식이나 상위 소득자에게 더욱 큰 부를 보장하면 노동자 및 하위 소득자에게 부의 일부가 돌아간다고 믿는 이들이 있었다. 이른바 낙수효과인데, 믿는 이는 있되 실재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이제 거의 종교의 영역에 들어섰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공생의 효용성을 부정한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경제적 공생은 거시 경제를 안정케 하고, 중산층 비율 유지의 원동력이 된다. 2015년 IMF의 발표에 따르면 상위 20%의 소득이 1% 증가하면 국가성장률은 오히려 0.008% 하락하는 반면, 하위 20%계층의 소득이 1% 증가하면 국가성장률은 0.38% 상승한다고 한다. 즉 기업 중심의 성장을 복지보다 우선시하는 한국의 보수정당이나 미국 공화당 트럼프는 틀렸다는 말이다.
하지만 한국·미국·일본 등 수많은 국가에서는 투표 때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곤 한다. 저소득층 비율이 높은 지역이 오히려 부자를 위한 공약을 내건 정당과 후보를 지지하는 것이다. 소득 양극화와 경제 불평등의 원인을 저소득층에게 있다는 말은 아니지만, 최소한 그 간극을 투표로써 메울 기회를 저들은 스스로 걷어차고 있다는 뜻은 된다.
현대 뉴노멀 시대는 소수의 자본 독식을 더욱 가속한다. 개인과 개인 혹은 기업과 개인 단위에서 미담으로 전해지는 공생은 얼마든지 있을 테지만, 이는 각개전투에 가깝다. 간혹 FTA나 경제협력체 등 ‘윈윈 전략’이라는 이름의 공생이 성립하곤 하지만, 실상 이는 당사자 모두 ‘내게 좀 더 이득이겠지’라는 계산을 깔고 가기 때문에 진짜 공생과는 거리가 있다.
공생을 이야기하다가 더욱 우울한 이야기로 빠져들고 말았지만, 현재 한국 사회는 저성장·저물가·저투자·저금리(전환형 복합불황)의 늪으로 대표되는 신4저 시대에 접어든 것이 사실이다. 이때 우리가 읽어봄 직한 책이 『뉴노멀 시대 어떻게 생존할 것인가?』다. 이 책에는 네 명의 저자가 10여 년 동안 인도, 방글라데시,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가난한 이들이 다양한 금융 수단을 이용해 난관을 돌파한 이야기를 담겨 있다. 이들의 연구 결과는 일일 소득이 2.5달러 이하인 전 세계 30억 인류에게 빛이 될 수 있다. 차세대 금융과 다국적 기업의 지원은 지원으로 그치지 않는다. 30억 인구의 소득 증대와 경제권 편입은 이들 삶의 질을 향상할 뿐 아니라 훗날 세계 규모의 거시 경제에 새로운 노동력과 시장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위의 책이 그나마 공생의 희망을 전한다면, 한국의 근미래를 회색빛으로 전망한 책도 있다. 『세계가 일본된다』는 한국이 근미래 일본화 현상에 빠져들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블랙홀에서 탈출하기 위해 한국이 일본처럼 저성장·저물가·저투자·저금리의 늪에 빠지고, 저성장·우경화·위험사회가 될 것이라 경고한다. 공생이 주제이면서 뜬금없이 이런 암울한 전망의 책을 꺼낸 이유는 블랙홀에도 슈바르츠실트 반경이라는 탈출 한계점이 있듯이, 공생의 여유가 사라지는 지점이 우리 사회에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상기하기 위함이다. 혁신과 자본주의가 한계에 부딪힌 지금이야말로 일본이 가지 않은 길을 참고해 최소한의 공생이라도 가능한 경제 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
저명한 과학작가인 ‘파토’ 원종우 선생님의 한 글귀는 우리에게 공생이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그 부분을 옮겨본다.
“부와 기술의 향연이 벌어지는 곳은 대부분 불과 10km 떨어진 곳에 빈민가를 마치 위성처럼 두고 있습니다. 이쯤되면 이 세계는 유토피아가 있기 때문에 디스토피아 역시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만약 우리 모두에게 행복한 세계를 만들기로 마음먹는다면, 세상 곳곳의 디스토피아를 조금이라도 더 사람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서로에게 해줄 말이 있습니다. ‘나의 유토피아를 위해 너의 디스토피아를 만들지는 않겠어’라는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