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eg’s choice

책이 선택한 책

December, 2016

빛 좋은 개살구, 엉망진창 나라

Editor. 김지영

날이 점점 추워진다 싶으면 크리스마스 노래를 들으며 소녀 감성에 젖길 좋아한다.
털모자를 쓰고 크리스마스트리 앞에 선 나를 상상하곤 하지만, 실행에 옮길 수 있을지 확신은 없다.

『엉망진창 나라의 앨리스』
존캔드릭 뱅스 지음 알버트 레버링 그림
책읽는귀족

좋아하는 동화 두 편이 있다. 『라푼젤』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라푼젤』은 10대 초반부터 지금까지 내 마음속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스무 살 무렵 영화채널에서 조니뎁이 출연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우연히 본 후 그 매력에 빠져 『라푼젤』과 비등해졌다. 사실 주인공 ‘라푼젤’을 소재로 새롭게 창작된 영화나 드라마, 책이 거의 없다. ‘라덕(라푼젤 덕후)’ 입장에서는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나마 내가 위안을 얻을 수 있는 건 앨리스라는 캐릭터를 살린 작품들이 많이 쏟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개봉한 <거울나라의 앨리스>를 VOD 서비스로 열 번 정도 돌려보고 소유욕이 불타올라 ‘덕질’을 감행했다. 라푼젤과 앨리스를 사이에 두고 양다리를 걸치는 것 같아 꺼림칙했지만, 기왕 마음먹은 김에 실행에 옮겼다. ‘나름 덕질’의 첫 번째, 인터넷 뒤지기. 앨리스 시리즈의 탄생부터 비화 혹은 원작의 이야기를 모두 파헤쳐 ‘앨리스 덕후’ 반열에 오르면 다음으로 넘어간다. 두 번째 앨리스 관련 물품 모으기. 인터넷 사이트에서 ‘앨리스’를 검색하고 관련 물품이나 도서를 찾아봤다. 여기서 『엉망진창 나라의 앨리스』를 알게 됐다.
이 책을 발견했을 때 내가 모르던 앨리스 시리즈가 있다는 충격에 정신없이 조사하기 시작했다. 앨리스 시리즈의 저자 루이스 캐럴의 작품이 아닌 존 켄드릭 뱅스의 작품으로 한국어 번역판이 처음 출간됐지만, 사실은 100년 전에 지어진 작품이다. 미국 근대 문학에서 풍자로 유명했던 그가 ‘앨리스’라는 소재를 사용해 보여주고자 했던 건 무엇이었을까.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기존 앨리스 시리즈 속 인물들의 성격을 그대로 지녔으며 소설은 당시 사회상을 날 선 시각으로 그려냈다. 어디로 튈지 모를 모자장수가 세운 엉망진창 나라는 극단적인 공산주의 국가를 표방했는데, 그 나라의 제도는 가히 입이 딱 벌어질 정도로 예사롭지 않았다.
움직이지 않는 열차, 향기로운 가스 공장, 여유롭게 차를 마시고 잠을 푹 잘 수 있는 경찰 등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에서는 일어날 수조차 없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이 소설의 첫 장을 읽을 때는 ‘정말 엉망진창인 나라구나’ 정도에서 머물렀던 생각이 3장 향기로운 가스 공장에서 혀를 차는 지경에 이르렀다.
가스를 생산하는 공장에서 악취가 나지 않고 향기가 난다? ‘모자장수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지’로 넘어갔던 부분은 중반부에 이르러서야 물음표를 변했다. 가스는 사람이 불을 더 쉽게 사용할 수 있는 매개 역할을 한다. 사람에게 불은 무엇보다 중요한 도구이며 조금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사용해야만 하는 생존의 문제라고 말하고 싶다. 가스를 향기롭게 만들기 위해 제조방식을 무시하고 가스제조 개혁을 했다는 건 내 상식에서 용납할 수 없다. 세금은 세금대로 내고 제 기능을 잃은 가스를 공급받는다는 건데, 이는 분명 오롯이 ‘독재자 모자장수’ 혼자만의 생각이다. 이 점을 꼬집어 반발하는 이들이 분명 있다. 다만 향기로운 가스를 가지고 불만을 토로했다간 엄청난 벌금과 구금을 면하지 못한다는 게 그들의 입을 다물게 했다. 더 큰 문제는 모자장수가 자신의 계획이 무조건 맞다고 판단하고 강제적으로 시행한다는 점이다.
시의회 의원들 역시 문제점을 알고 있다. 그들도 엉망진창 나라의 국민이고 가스를 사용하는 이용자로서 불만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향기 나는 가스가 터무니없다는 말을 꺼낸다면 그 끝이 어떨지 불 보듯 뻔했다.
선거 역시 마찬가지다. 엉망진창 나라는 아직 선거를 하고 있지 않지만, 분명 이 안에서도 선거에 대한 문제를 언급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시유제 조직 내에 상당수의 유권자들을 고용했거든. 우리 임기가 끝나면 정확히 그네들의 임기도 만료되지. 그러니까 유권자들이 우리에게 반대하는 투표를 한다면, 결국 자기 자신들에게 반대하는 표를 던지는 셈이야. 바로 이런 식으로 우리 시유제 체제는 자기 범죄를 유지하는 거지.”
‘독재자 모자장수’ 말에 책을 들고 있던 손의 맥이 풀렸다. 엉망진창 나라 안에서 선거는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짓이다. 독재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 제멋대로, 엉망진창인 나라. 그 굴레에서 벗어나기에 얽히고설키고,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기엔 이미 많이 걸어와 버렸다.
이번 ‘앨리스’는 재미로 봤던 기존의 ‘앨리스’ 시리즈가 알록달록한 이야기와 색채로 내 마음속 판타지아의 문을 열었다면, 이번 『엉망진창 나라의 앨리스』는 100년이 지났지만 무릎을 치고 혀를 찰 수 있는 이야기로 지금 시국에 딱 알맞은 책이다. 이 책을 다시 한 번 읽고 나면 오랜 기간 부동의 1위를 차지했던 라푼젤이 그 자리를 앨리스에게 내주어야 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