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eg’s cho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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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y, 2018
시작은 땅에서부터
Editor. 이수진
근사한 문장이 나오면 저도 모르게 주섬주섬 적기 시작한다. 가장 오래도록 좋아하고 있는 문장은 몽테뉴의 말.
그것은 바로 “나의 일과, 기술 그것은 살아가는 일이다.” 라는 말.
저마다 자주 쓰는 단어가 있다. 아마도 좋아하는 단어일 가능성이 높고 그게 아니라면 자주 듣는 단어일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나는 ‘조화롭게’ ‘자연스럽게’와 같은 종류의 말을 자주 생각한다. 실제 입 밖으로 말을 내는 편은 아니나, 무엇을 하건 누구를 만나건 늘 자연스럽고 조화롭게 존재하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하는 편이다. 조화롭고 자연스러운 생활 방식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미 알고 있겠지만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자기 욕망을 잘 알고 있어야 할 뿐 아니라 늘 의식하며 욕망의 가지치기를 해줘야 한다. ‘욕망의 가지치기’라니, 이런 말을 듣자마자 벌써부터 피곤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적당한 욕망에 만족하는 마음은 생각보다 훨씬 더 풍족한 삶을 살 수 있게 한다. 구체적으로 말해보자면 10을 투자해서 10 이상을 얻으려는 마음이 아니라, 10을 투자해서 7을 얻어도 기꺼이 만족하는 마음이다.
알록달록한 채소 그림으로 표지를 꾸민 『혁명은 장바구니에서』는 10을 투자해서 7을 얻는 삶을 추구하는 일곱 농가를 소개한다. 그들의 삶은 느리지만 자연스럽고, 대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지만 혁명적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면 이들은 모두 대도시의 소비자 중심적인 이윤 극대화 산업으로서의 농업을 거부하고 경제력이 없는 노인, 일하기 어려운 중증 장애인, 중노동에 힘들어하는 여성을 농업의 주인공으로 세운다. 또한 자신의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자연을 파괴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양파나 파 같은 경우 대규모로 2, 3년 재배하고 나면 아무것도 자라지 못한다. 이들은 다음 세대를 위해 대규모 재배와 같은 선택을 하지 않는다. 또한 커뮤니티를 보호하고 유지한다. 무엇보다 땅을 치유의 공간으로 만들어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삶의 터전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한다. 느리지만 지속적으로 더 나은 삶을 향해 걸어가는 일곱 농가의 모습은 케케묵은 선입견을 단번에 뒤집는 동시에 보는 이에게 진귀한 감동을 준다.
흙을 만지며 씨앗을 심고 기르는 이들에게서는 어떤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겸허함이다. 이들은 나보다 더 큰 존재인 자연을 늘 인식할 수밖에 없다. 세상 만물을 모두 통제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겸허함은 나보다 더 큰 존재인 대자연 앞에 정직하게 섰을 때 가능한 일이다. 작물을 길러본 사람이라면 어렵지 않게 누구나 만날 수 있는 경험이다. 내가 한 일이라고는 흙을 고른 뒤 모종을 심고 물을 준 것뿐인데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는 작물을 보면 한없는 신비로움과 함께 이 작물이 온전히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일곱 농가는 느릿느릿 살며 주변과 조화를 추구하고 이윤 극대화를 위해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지 않았을 뿐인데, 노동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를 뒤집었으며 현재 농업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대안을 제시할 수 있었다. 그들은 그저 착한 성정의 사람들이기 때문에 10을 투자해서 7을 얻어도 만족하는 생활 방식을 선택한 것이 아니다. 사실 자신의 욕망을 통제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두가 알고 있지 않은가. 그들은 ‘착한 사람들’ 이라기보다는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사람을 수단화하는 것과 생명이 자라는 자연을 파괴하는 농업 현장의 모습을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던 사람들이다. 일곱 농가 중에는 유명 셰프들이 너도나도 채소를 사기 위해 줄을 설만큼 성공한 농장도 있으며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사쿠라치즈’를 만드는 농장도 포함되어 있다. 이만하면 농업 분야의 거장들이라고 불러도 좋지 않을까? 농업 체계의 혁신, 노동을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 비즈니스적인 성공까지. 이 모든 걸 신경 쓰다 보니 속도는 느릿느릿할 수밖에 없구나. 책을 덮고 나니 만나본 적은 없지만 왠지 모르게 이전부터 보고 싶었던 풍경을 마주한 기분이다. 재난과 불확실성이 가득한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진단도 중요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길을 내며 살아가고 있는 새로운 모습의 생활방식을 나도 모르게 기다리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리고 역시 사람을 수단으로 바라보지 않고 자연을 파괴하지 않는 방식으로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구나?!
“인간은 귤 한 개도 자기 힘으로 만들 수 없어요. 귤을 만드는 것은 미생물이며, 귤나무인 거죠. 그런데도 농가 사람들은 ‘내가 생산자’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런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어요. ‘당신이 만든 게 아니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