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ic : 이달의 화제
재즈
에디터: 유대란
재즈는 여행과 비슷하다. 낯선 곳에서 예상치 못한 대상과 조우하며 성장하는 것이 여행의 가장 큰 묘미이듯, 재즈 역시 낯선 것들이 만나고 결합하는 가운데 탄생하고 발전해왔다. 19세기 말, 지구상 가장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드나들었던 뉴올리언스에서 탄생한 이 장르는 20세기에 들어 가장 국제적이고 다문화적이고, 또 복잡한 장르로 변이를 거듭했다. 이것이 재즈의 매력이자 정의일 것이다.
오래전 버드와이저의 공중파용 광고였던 걸로 기억한다. 황금빛 맥주가 흘러내리는 가운데 루이 암스트롱의
많은 사람이 재즈를 풍요와 연관 짓는다. 국내에서 재즈라는 장르가 유행하기 시작한 1990년대 중반, 공교롭게도 한국의
1인당 GDP가 1995년에 1만 달러를 달성했고, 당시 많은 평론가와 음악가들이 재즈의 유행과 ‘GDP 1만 달러 시대’에 상관관계가 있는 듯 이야기했다. 상관관계를 입증할 만한 실증적 근거는 빈약했지만, 심정적 근거가 작용했다. 그들은 ‘재즈의 시대Jazz Age’ 또는 ‘광란의 20년대Roaring 20s’로 불리는 1920년대, 재즈의 고향인 미국의 풍요로웠던 시대상을 이 장르에 대입했던 듯하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29년 대공황을 맞기까지 미국은 20세기 초유의 경제 호황을 누렸다. 포드사의 대성공이 대변하듯 미국의 자동차 산업이 팽창하고 소비자 기대지수가 최고에 이르며, 대량생산이 본격화되는가 하면 노동생산성이 크게 향상했다. 주식시장도 연일 요동쳤다. 당대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 『위대한 개츠비』를 읽은 독자라면 알겠지만, 작중 화자인 닉 캐러웨이는 당시 막대한 자본이 유입되던 뉴욕의 주식시장에 막 진입한 주식중개인으로 등장한다.
1920년대는 경제적으로 풍요로웠던 만큼 유흥거리도 넘쳐났다. 비록 금주법 시행으로 당시 도시민들은 뒷골목이나 지하의 스피크이지speakeasy로 불리던 불법 영업장으로 숨어들어야 했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하지 말라고 하는 일이면 더 열성적으로 달려들지 않았던가. 이런 영업장들은 규제가 강력할수록 성행했고 재즈 부흥의 장을 마련해줬다. 당시 재즈는 차분한 감상용 음악이라기보다 비트에 맞춰 춤을 출 수 있는 일종의 댄스뮤직으로 더 많이 소비되었다.
재즈가 지닌 풍요로운 이미지는 많은 이들이 낭만화하는 역사 속 특정 시기와 그 대상을 동일시하는 데서 비롯하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재즈를 들었을 때 직관적으로 느껴지는 문화적 풍부함, 한 가지로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감수성, 변주의 가능성 같은 것들이 뒤섞여 생성되었다.
미국 최고의 발명품으로 일컬어지는 재즈는 미국을 수식하는 ‘다양한 문화의 용광로’라는 표현에 가장 잘 어울리는 도시, 바로 뉴올리언스에서 태동했다. 초기 재즈는 1870~1880년대경 브라스밴드의 출현으로 그 시작을 알리는데, 그에 앞서 1800년대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링샤우트ring shout’라는 유희에서 정신적 뿌리를 찾는 이들도 있다. ‘링샤우트’는 음악과 춤이 한데 결합한 흑인의 문화 행사였다. ‘링샤우트’에 관한 기록 중에는 건축가 벤자민 라트로브가 1819년 2월에 목격한 것을 글과 스케치로 남긴 것이 유명하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현재 루이암스트롱 공원이자 과거 콩고 광장이라고 불린 곳에서 수백 명의 흑인 노예들이 타악기와 현악기의 합주에 맞춰 함성을 지르고 춤을 추는 장관을 연출했다. 그곳이 아프리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아프리카적인 광경이었다. 수많은 흑인이 음악에 맞춰 일사불란하게 반시계방향으로 움직이며 춤을 추는 모습은 미국 곳곳에서도 목격, 기록되었으며, 후대인들은 이에 ‘링샤우트’라는 이름을 붙였다.
공교롭게도 이 대규모의 가무 행위는 뉴올리언스에 최초의 브라스밴드가 등장한 시기와 맞물려 점차 보기 어려워졌지만, 흑인들의 머릿속에 각인되어 입에서 입으로 그 역사가 전해졌다. ‘링샤우트’는 후대 흑인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뉴올리언스 출신의 소프라노색소폰 연주자 시드니 베쉐는 조부에 관해 이런 이야기를 남겼다.
“일요일은 노예들이 만나는 날이었다. 그들이 쉬는 날.
할아버지는 콩고 광장이라는 곳에서 드럼을 쳤다.
그는 뮤지션이었다.
누구도 그에게 음, 감정, 리듬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할아버지 안에 이미 내재해 있었다.
그가 항상 확신하는 그런 것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