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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의 추억

에디터: 유대란

파송송 계란탁.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이 여섯 음절만 들어도 양은냄비에서 보글보글 끓는 라면을 떠올리며 허기를 느낀다.
그것은 각자의 추억과도 얽혀있다. 군대에서 먹던 ‘뽀글이’, 견습생 시절의 눈물 섞인 라면, 만화방 출입의 하이라이트, 한 영화의 유명 대사 ‘라면 먹고 갈래?’를 써먹은 순간들···. 그뿐이랴. 건더기 수프가 먼저냐 양념 수프가 먼저냐, 3분을 끓일 것인가, 4분을 끓일 것인가를 논의할 만큼 한국인의 라면 사랑은 대단하다. 한국인 한 명당 라면 소비량은 연평균 약 74개로 세계 최고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랑하는 이 음식은 어떻게 우리 삶에 들어오게 되었을까.
경제위기, 전쟁발발설, 자연재해 등으로 사회 분위기가 뒤숭숭해지면 사람들은 라면을 사재기한다.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고 비교적 가벼워서이기도 하지만, 라면이 한국사람의 주식으로 자리 잡았다는 걸 새삼 방증하기도 한다. 마트에서는 쌀보다도 라면이 많이 팔린다. 이제 라면을 먹는 것이 곤궁한 처지를 대변하던 시대는 지났지만, 사연 많았던 현대사 속에서 우리와 고락을 함께해와서인지 이 음식을 떠올리면 어딘지 처연한 마음이 든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사람이 있다. 삼양식품의 명예회장인 고 전중윤 회장.

남대문의 꿀꿀이죽
삼양라면을 탄생시킨 전중윤은 한국 식품산업의 대부이자 ‘라면 황제’로 불린다. 원래 그는 1950년대 말, 동방생명을 설립하고 제일생명을 이끌었던 기업가였다. 그가 안정된 일을 버리고 식품산업에 뛰어든 것은 전쟁 이후 비참한 현실 속에서 살고 있던 사람들을 목격한 것이 계기였다. 국가 재건과 국민의 ‘생활의 불안을 없애고 상부상조, 근검저축의 정신을 함양’하려던 원대한 목표를 생명보험의 사업적 기지로 삼고 있었지만, 전쟁 이후 가난에 허덕이는 대다수의 사람에게 먼 미래를 바라본다는 것이 어려운 일임을 그는 통감하고 있었다. 당시는 국민소득이 100달러에도 미치지 못했고, 농촌에는 하루 세 끼를 먹을 수 없는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제일생명의 6대 사장으로 취임한 지 얼마 안 됐을 무렵 전중윤은 제일생명 본사 건물 앞에 있는 남대문 시장에 갔다. 거기서 긴 행렬을 봤다. 사람들이 순서를 기다렸다가 5원을 내고 커다란 솥에서 따라 주는 무언가를 먹고 있었다. 버스 요금이 8원이었던 시절이었다. 그가 행렬에 합류해서 자신의 차례가 되었을 때 받아든 것은 건더기를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탕 같은 것이었다. 거기에서는 깨진 단추 조각과 담배꽁초가 나왔다. 미군 기지에서 배출된 음식물 쓰레기를 끓인 ‘꿀꿀이죽’이라는 것이었다. 충격과 슬픔에 휩싸인 그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통곡했다. 그때 그는 모두가 배곯지 않고 맘 편히 먹을 수 있는 사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며칠 후 시찰차 방문한 일본에서 즉석라면을 맛본 전중윤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의 윤곽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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