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을 오르며 좋아하는 순간을 떠올려 본다. 숨이 턱까지 차서 헉헉대며 올라가다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 한 점에 금세 식어버리는 땀방울, 어느 정도 능선에 이르러야 내려다보이는 미니어처 블록 크기의 높은 빌딩들, 마지막으로 산 정상에 올라 자연이 만든 한 폭의 수묵화를 가만히 바라보는 일.
겨울 산이라고 하면 잎이 다 떨어지고 삐쩍 마른 나뭇가지만 남아 있는, 볼품없는 모습을 떠올리기 쉽지만, 초록 잎이 무성한 봄과 여름, 빨갛고 노란 단풍으로만 가득한 가을에 비해 오히려 가장 변화무쌍한 산이다. 겨울 산은 오르기 힘든 만큼 자신의 민낯을 그리 쉽게 보여주지 않는다. 함박눈이 내린 날에는 온 산에 피어 있는 나뭇가지를 눈꽃으로 뒤덮은 모습을 보여주는가 하면,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겨울 하늘에 비친 산세는 푸르른 여름날보다 웅장하다. 임채욱 작가의 『블루 마운틴』은 겨울 산 중에서도 쉽게 보기 힘든 푸른빛의 얼굴만 골라 담았다. 덕유산과 대둔산 일부에서 촬영한 사진들로, 작가가 백두대간 중심부에 있는 덕유산의 주봉 향적봉에 올라 충청도와 경상도, 전라도 등 주변에 있는 산들의 경관을 360도 돌면서 찍었다.
가장 선명한 푸른빛의 산을 보기 위해서는 까다로운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바람 불지 않는 낮은 기온의 맑은 날씨에 오전 9시에서 12시 사이, 산을 등지고 해가 비추는 역광이나 측면에서 만 가장 짙푸른 산을 관찰할 수 있다.
2009년 초겨울 덕유산에 처음 올라 “그렇게 푸른 쪽빛의 산들을 처음 보았다”라고 말한 작가의 사진을 보며 덩달아 푸른 산을 본 기억을 되짚어 본다. 더위를 많이 타는 탓에 유독 겨울에 등산을 많이 다녔다. 지리산인지 덕유산인지 태백산인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당시에도 굴곡진 산맥이 유난히 파랗다고 생각했다. 분명 ‘하늘에 비쳐서 파란 걸까, 해무의 영향일까?’ 정도로 가볍게 여겼을 터. 산은 계절과 시간에 따라 언제나 다른 모습으로 반겨주기에 깊이 생각하지 않았는데, 지금 보니 작가가 말한 ‘까다로운 조건’을 충족했기에 운 좋게 볼 수 있었던 풍경이었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던 12살의 임채욱은 화실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우연히 마주한 수필집의 독수리 그림에 푹 빠진다. 그가 동양화를 처음 시작하게 된 계기다. 신기하게도 독수리가 그려진 수필집 『화실의 창을 열고』는 훗날 서울대 동양학과에서 스승으로 만난 일랑 이종상 선생의 작품이었다. 임채욱은 전통적인 한국화 작업을 하던 스승을 운명적으로 만나 한지 문화의 가치와 특성을 이해하게 되었다. 한지를 구긴 후 먹으로 산을 표현하거나 닥종이로 입체 산수화를 만들어 보는 등 다양한 한지 기법을 배워 작품에 응용하였다. 졸업 후, 후배의 졸업작품 발표를 위해 사진을 한지에 프린팅하는 작업을 돕다가한지 특유의 거친 질감 탓에 사진의 발색이 좋지 않은 것을 깨닫게 된다. 그 이후 작가는 2009년 전주의 한지 업체와 사진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사진 전용 한지’를 개발하고, 2013년부터 직접 개발한 한지에 < 산> 시리즈를 프린팅해 작품으로 발표하고 있다.
대부분 한국의 전통 산수화는 바위가 돋보이는 암산을 주로 그렸다. 진경산수화에서 바위가 많은 금강산, 삼각산, 인왕산 등이 단골로 등장하는 이유다. 그래서 동양화를 전공한 작가들도 그 산의 풍경을 주로 그리기를 반복해 왔다. 한국 산의 전형적인 특징인 ‘겹침의 미학’과 ‘쪽빛의 가치’를 새롭게 조명하려 한 < 블루 마운틴> 작업은 그동안 한국 미술사에서 등장하지 않았던 산에 주목하고 한국 산의 고유한 가치를 찾기 위한 새로운 접근이다. ‘블루 마운틴’이라는 지명은 호주와 자메이카에도 있지만, 두 곳 모두 더운 지역에 자리 잡고 있어서 한국처럼 추운 겨울의 맑고 깊은 푸른빛을 감상하기는 힘들다. 어쩌면 한국에서만 진정한 블루 마운틴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임채욱 작가의 홈페이지(www.limchaewook.com)에 방문하면 지리산 노고단 정상에서 바라본 푸른 산의 능선과 남해의 섬들, 섬진강 물길을 함께 담은 블루 마운틴 시리즈의 신작을 만날 수 있다. 지리산, 인수봉, 설악산, 인왕산, 낙산 등 흑백 사진으로 산을 표현한 전작은 물론, 최근 전시 정보까지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