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이 펼쳐진 대지 위로 싱그러운 이슬을 머금고 서 있는 포도나무들 사이, 구름이 낮게 드리워져 있다. 이곳에서 대자연의 공기와 습도, 흙의 영양분을 먹고 자란 포도로 와인이 만들어진다. 성경에도 나오는 인간의 오랜 친구 와인은 여전히 우리 삶에서 중요한 존재다. 처음 와인의 맛을 봤던 우리는 그 시큼털털한 맛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와인잔의 우아한 선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입속에 맴도는 수십 가지의 풍미를 하나씩 깨우쳤기 때문이었을까? 시간이 지날수록 와인은 자연스럽게 우리 삶 속으로 스며들었고, 환영 받았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내추럴 와인이라는 또 하나의 세계를 마주한다.
“와인은 좋은데, 내추럴 와인은 아직 잘 모르겠어. 밍밍해. 뭐랄까, 거북한 맛이 나는 경우도 종종 있더라고.” 선물 받은 보르도 와인을 맛보시고는 이렇게 신 것을 어찌 먹냐며 설탕 한 숟갈을 듬뿍 넣으시던 우리 외할머니처럼, 내추럴 와인을 접한 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의 나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익숙한 맛에만 의존하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새로운 모험을 떠나볼 수 있는 법! 고정관념에 휩싸여 그냥 놓쳐버리기엔 내추럴 와인이 지닌 매력은 너무도 무궁무진하다.
‘오랜 전통을 이어오는 최고의 떼루아’ ‘으리으리한 성에서 만들어지는’ ‘장미 꽃잎과 젖은 돌의 향’ ‘산딸기 맛이 가미된 듯한’ 등등의 수식어가 따라붙는 고급 와인들은 비교적 안정적인 맛을 낸다. 그에 비해 내추럴 와인은 해마다 기후와 강수량에 따라 맛도 일정치 않고, 와인을 생산하는 와이너리의 규모도 소박하기 이를 데 없다. 그렇다 보니 전통 방식으로 와인을 만들고 토착 품종을 주로 사용함에도 컨벤셔널 와인과는 맛과 향이 달라 지역의 품질 등급 심사를 통과하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하지만 가만 생각하면 우리네 인생도 마찬가지 아니던가. 변화무쌍한 자연과 동고동락하는 인간은 매번 달라지는 내추럴 와인의 맛에 결국 감복하게 된다. 코카콜라처럼 매번 같은 맛을 공식처럼 낼 수는 없지만, 자연 그대로를 담은 각양각색의 맛은 다양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내추럴 와인과 함께 하는 일상은 그렇게 풍성해진다.
1960년대 프랑스 보졸레의 쥘 쇼베(Jules Chauvet)에 의해 시작된 내추럴 와인 운동은 보졸레 지역의 핵심 인물 5인방(마르셀 라피에르(Marcel La pierre), 기 브르통(Guy Breton), 장폴 테브네 (Jean-Paul Thévenet), 장 포야르(Jean Foillard), 조제프 새모나르(Joseph Chamonard)에게 전파되며 확산되었다. 그들은 밤새 와인을 마시고도 다음날 숙취 없이 밭에서 일하고 싶었다. 그래서 밭에 살충제를 뿌리지 않고, 양조 과정에서 보존을 위해 넣던 이산화황을 제외했다. 인공효모 대신 야생효모가 자연스럽게 포도즙에 더해지도록 하며, 와인의 맛을 조절하기 위해 흔히 사용하는 설탕이나 산, 제산제, 인공영양분과 탄닌, 착색료는 그 어떤 경우에도 더하지 않는다. 정제과정도 없고 필터링도 없다. 포도를 직접 손으로 수확하고 유기농, 혹은 자연농법으로 재배한다. 8,000년 동안 이어온 전통 방식을 포도밭과 양조장에 다시 적용하고, 대자연에 경의를 표하는 이러한 방식은 내추럴 와인 생산자들을 장인이라 불리게 한다.
『와인에 쓸데없는 건 넣고 싶지 않아요』의 저자 카밀라 예르데(Camilla Gjerde)는 노르웨이 출신의 정치학 박사다. 와인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던 그는 2008년 이탈리아 시칠리아의 내추럴 와인 생산자 아리안나 오키핀티Arianna Occhipinti의 일 프라파토를 처음 마신 후 매료되어 내추럴 와인 생산지에 방문하고, 페어에 참여하거나 강의를 들으며 다양한 방법으로 내추럴 와인의 세계를 탐험하기 시작했다. 그 이후 컨벤셔널 와인은 완전히 끊었다. 그는 와인을 만드는 사람들의 열정적인 삶과 그들이 들려주는 와인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했다. 내추럴 와인 생산자들, 더구나 여성 와인업자들의 삶을 취재한 이 책은 경건하고도 즐거운 내추럴 와인의 세계로 우리를 초대한다.
저자는 이탈리아, 프랑스, 오스트리아에서 내추럴 와인을 만드는 9명의 여성 와인메이커를 만났다. 와인에는 마실 때마다 놀라게 하는 힘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탈리아 에밀리 아로마냐의 엘레나 판텔레오니(Elena Pantaleoni), 장인 정신으로 만든 와인이 같은 등급의 와인과 맛이 다르다는 이유로 매번 등급 심사에서 탈락하는 이탈리아 토스카나의 프란체스카와 마르게리타 파도바니(Francesca & Margherita Padovani) 쌍둥이 자매, 오스트리아 수도 한복판에서 와인을 만들며 그래픽 디자이너에서 와인 생산자로 직업을 바꾼 것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라 말하는 유타 암브로지치(Jutta Ambrositsch), 오로지 자신의 직감과 포도만을 신뢰하며 발효가 멈췄을 때 포도액과 효모와의 교감으로 이를 해결한다는 프랑스 쥐라의 알리스 부보(Alice Bouvot), 와이너리를 물려준 아버지의 잔소리가 심해지자 신경 끄시라고 선언한 오스트리아 부르겐란트의 슈테파니와 주자네 레너 (Stefanie & Susanne Renner), 영화 제작자에서 와인메이커가 된 뒤 다양한 실험을 하며 극소량의 와인을 만드는 프랑스 쥐라의 카트린 아눙(Catherine Hannoun), 스물한 살 때부터 시칠리아에서 혼자 와인을 만들었으며 미래 세대를 위해 자연을 지킨 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라는 이탈리아 시칠리아의 아리안나 오키핀티. 저자는 이렇게 여성 와인 생산자들과의 만남을 통해 그들의 일상과 포도밭, 그리고 남다른 철학을 포착했다.
이탈리아에서 만난 프란체스카 파도바니는 이렇게 외쳤다.“와인에 쓸데없는 건 넣고 싶지 않아요.” 쉬운 맛, 일정한 맛을 내기 위한 첨가물은 일절 넣지 않고 옛날 방식을 고집하는 이 용감한 여성 생산자들은 와인에 강인한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이는 깨끗한 와인을 만들겠다는 의지와 더불어 땅을 존중하고 자연을 건강하게 보존하려는 신념 때문이기도 하다. 이들은 고되고, 위험이 따르고, 수익이 보장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의미 있는 일을 하기로 결심한 사람들이다. 대부분 가족과 남성 중심으로 돌아가는 와인 업계에서 여성 생산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내추럴 와인 산업은 가족력이 없더라도 훌륭한 와인을 만들 수 있음을 증명해왔다. 이 무모하고도 아름다운 여정에 뛰어든 현대 여성들의 수는 결코 적지 않다. 자신의 삶을 자연에 발맞추는 여성들, 남성 중심의 와인 세계에서 본질의 힘을 믿으며 나아가는 이들의 여정은 내추럴 와인이 과연 무엇인지를 깊게 일깨운다.
20세기 중반에 도입된 현대 농업 방식은 더 많은 양의 수확물을 얻게 했을지 모르나 그만큼 땅을 망치고 자연을 훼손시켰다. 질 좋은 와인의 맛은 질 좋은 포도로부터 나오고, 이는 곧 땅이 살아 있어야 가능하다고 믿는 내추럴 와인 생산자들은 3대, 4대째 이어오는 명품 와인이 아니라 그보다 더 오래된, 수천 년 동안 인류가 지켜 온 방식에 가치를 두고 와인을 만든다. 이들은 자연을 지키는 사람들이자 모험가·실험가이며, 와인업계의 아웃사이더들이다. 이들의 와인을 마시며 책 속 여성들의 삶과 이야기를 여행하노라니, 순간 아웃사이더의 삶 또한 퍽 괜찮다는 깨달음이 인다. 내추럴 와인에는 생산자들이 꿈꾸는 행복과 평화로움, 그리고 자연에 대한 사랑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