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ic : 이달의 화제

내일의 옷장

에디터 : 박세진, 박진영, 김수미

옷을 고를 때의 기준은 무척이나 다양하고 까다롭다. 사이즈는 잘 맞는지, 기존에 갖고 있던 옷들과 색이 잘 어우러지는지, 피부에 닿았을 때 까끌까끌하거나 금방 해지지는 않을지… 엄선을 거쳐 그토록 많은 옷을 샀는데, 왜 옷장에는늘 입을 옷이 없을까? 쉽게 샀다가 금세 질려 부랴부랴 새 옷으로 채워 넣는 사이클이 이젠 좀 피곤하다면, 오래 입어도 늘 새롭고 각별한 옷을 고르거나, 기존의 옷에서 또 다른 재미를 찾는 방법에 귀 기울여보자. 내일의 옷장에는 단순한 유행템만이 아니라 좀 더 애틋하고 정든 아이템들이 차곡차곡 채워지기를 바라며!
1-패션이 가리키는 것들
패션은 사회상을 반영하는 동시에 그를 재생산하고 강화한다. 패션은 오랫동안 남성복과 여성복의 분리를 통해 그 사회가 추구하는 남성상과 여성상을 전시했다. 멋진 옷, 예쁜 옷, 바람직한 옷이라는 평가 기준에는 사회가 요구하는 몸의 생김새, 행동방식이 내포되어 있다. 몸과 다름없는 옷에 스민 기준은 사람들 사이에 내면화되고 타인을 규제하는 방식으로 자리 잡는다.
오늘날 패션의 비약적 변화 또한 사회상이 큰 폭으로 변화한 것에 기인한다. 세계 경제의 주역이자 고급 패션의 주 소비자였던 베이비 부머 세대가 물러나고 밀레니얼, Z세대가 패션문화에서도 중심이 되고 있다. 현대 문명이 안정적으로 자리 잡은 이후의 세대이자 태어났을 때부터 인터넷을 사용했고, TV나 영화보다 유튜브와 인스타그램, OTT, 인터넷 커뮤니티의 영향을 많이 받는 이들은 탈권위와 수평적 질서에 익숙하며 이전과는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
이 새로운 가치관이 이끄는 패션의 변화는 흥미롭다. 예전의 고급 패션이 소재와 만듦새, 포멀 웨어의 형식성이나 드레스의 화려함 같은 걸 중시했다면, 지금의 고급 패션은 성별 간 경계는 흐려지고 실용성과 편안함이 중심에 있다. 스니커즈와 바람막이, 후드티와 티셔츠 같은 평범한 옷들이 패션위크에 오른다. 성 다양성이나 인종 문제에 대한 슬로건을 전달하기도 한다. 이러한 상호작용의 측면에서 본다면 패션의 흐름을 파악하는 일은 앞으로의 사회를 예측하는 중요한 열쇠이기도 하다. 우리가 유심히 지켜보아야 할 3가지 키워드를 나누고자 한다.
패션의 오랜 특징 중 하나는 명확한 성별 분리다. 특히 포멀 웨어, 비즈니스 웨어 등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입는 옷의 경우 그 체계와 특성이 상당히 차이가 나고, 이것이 패션의 형식적인 미감을 만들어 왔다. 하지만 기능성 의복들의 경우는 이러한 구분이 덜 두드러진다. 예를 들어 등산복, 운동복, 군복, 작업복 등은 특정 목적을 위한 편의성과 기능성이 우선시 되고, 내구성 같은 실용적인 면모를 중시한다.
최근 몇 년 세계적으로 성 다양성, 성별 역할, 인종 다양성과 문화 다양성의 문제는 매우 중요한 화두가 되었다. 패션이 재생산해오던 전통적 성 역할의 가치문제도 이를 피해 갈 수 없었다. 이에 대한 돌파구로 등장한 것이 바로 젠더리스 패션이다. 성별 구분보다는 각자 원하는 삶을 추구하고, 사회적 편견이 강요하는 불편함을 감수하기보다 원하는 일을 편하게 하려는 추세에 발맞춰 패션계는 그 대안을 기능 중심의 일상복에서 찾았다. 이미 사람들에게 익숙하기 때문에 저항을 우려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물론이고, 옷의 성별 구분 없이 기능성과 편리함을 바탕에 깔고 이전에 없었던 패션의 새로운 미감을 찾아 나서기에도 적합했기 때문이다.
비슷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자기 몸 긍정주의도 있다. 몸은 타인이 상관할 영역도, 특정한 기준이 존재할 만한 영역도 아니고, 평가의 대상도 될 수 없다는 메시지를 담은 것이다. 몸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이런 방식은 신체가 가진 성별 특징을 극대화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젠더리스 패션과 반대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타인이 상관할 바 없는 자신만의 것이라는 가치관, 그리고 사람은 저마다 다르다는 다양성을 공통적인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앞으로의 패션에도 계속해서 반영될 것이다.
아직까지는 기능성 의류의 유니섹스적 특징을 활용하거나, 옷을 크게 만들거나 남자에게 치마를 입혀보는 식의 변형적 사용이 주를 이루지만, 디자이너들은 끊임없이 더 효과적인 패션의 미감을 만들어내고 있으며, 이를 통해 패션의 모습은 지금과 상당히 달라지게 될 것이다.
2-이제, 옷의 수명을 늘려줄 때
환경을 위해서 무엇보다 과도한 소비를 줄여야 한다는 사실은 이제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지만, 편리함에 익숙해진 현대인이 몸에 밴 습관을 버리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자기 전에 주문하면 다음 날 새벽에 도착하는 장보기 서비스, 음식 배달 서비스는 또 얼마나 편리한가. 그러나 휴대폰 화면을 몇 번터치하는 것으로 끝나는 이 편리한 쇼핑 시스템에는 수백 년이 지나도 썩지 않을 플라스틱 쓰레기와 불필요한 포장이 필수로 동반된다.
2000년대에 들어서 우리의 소비 습관이 크게 바뀐 분야가 또 하나 있다. 바로 옷이다. 그전까지 옷 쇼핑은 계절이 바뀌어서 꼭 필요하거나 특별한 날을 위한 간헐적 이벤트였다. 하지만 자라ZARA, 에이치엔엠H&M 같은 패스트 패션 브랜드가 본격적으로 출현한 이후, 옷을 사는 행위는 마트에 가서 간단한 장을 보는 것만큼이나 쉽고 흔한 일이 되었다. 이제는 적은 예산으로도 최신 트렌드를 따라잡을 수 있고, 패션에 크게 관심이 있지 않아도 멋쟁이가 될 수 있다. 패스트 패션의 등장은 처음에는 매우 반가운 일이었다. 주머니 사정이나 안목에 크게 상관없이 누구나 패션을 향유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모두에게 주어진 공평한 기회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저렴해진 옷값 덕분에 소비를 망설이는 시간도 줄었다. 쇼핑에 실패하더라도 작은 손해밖에 나지 않는 데다, 싼값에 옷 한 벌을 가지게 되는 것은 혜택처럼 느껴지니까 말이다.
내가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것이 중요해지고 시각적인 이미지가 가장 큰 콘텐츠가 된 시대에, 인스타그램과 유튜브, 틱톡에 넘쳐나는 언박싱과 하울 영상은 이러한 소비를 더욱 부추긴다. 많은 사람들의 옷장 안에는 미처 태그도 떼지 않았거나 두세 번 정도 겨우 입은 옷이 있을 것이다. 내 옷장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매 계절 가진 것을 다 입기도 힘든 옷의 풍요 속에서, 옷을 입는 즐거움보다는 어쩐지 더 피곤해진 기분도 든다.
언젠가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그동안 저렴한 옷을 사는 데 써온 돈이 아깝다’는 글을 보았다. 대부분 한 철만 입고 버리거나, 싸다는 이유로 더 자주 소비하게 되어 오히려 지출이 늘어났다는 이유에서다. 앞으로는 한 벌을 사더라도 만듦새가 좋은 옷을 선택하고, 지속 가능하지 않은 소비를 줄이겠다는 내용의 이글에서 특히 기억에 남는 건 댓글로 이어진 활발한 토론이다. ‘비싼 옷도 몇 번 입으면 똑같은 옷을 입는 게 부끄러워져 못 입게 된다’ ‘좋은 옷은 잘 관리해서 입어야 하는 점이 오히려 귀찮고 부담스럽다’ ‘한 철 입고 버리는 것이 편하고 경제적’이라는 의견이 다수였다. 이게 바로 옷을 대하는 현대인의 태도 아닌가 싶다. 우리는 저렴한 물건을 많이 소비하는 생활 방식에 너무 익숙해져 있다. 이를 바꾸기 위해서는 물건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인식하는 일이 먼저 필요하다.
자라의 창립자 아만시오 오르테가는 옷을 생선이나 요구르트같이 금방 부패하는 상품처럼 취급하기로 유명하다. 유행이 지난 옷은 신선도를 잃었으니 폐기해야 하는 식품처럼 여긴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라의 관점과 전략은 오늘날 패션 산업의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냈다. 하나의 제품이 매장에 머무는 시간은 겨우 3~4주에 불과하고, 기획부터 출시까지 최소 1~2주 밖에 걸리지 않는 패스트 패션의 속도는 하이엔드 컬렉션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봄/여름(S/S), 가을/겨울(F/W) 연 2회 정도 발표하던 패션쇼는 이른 봄, 이른 가을, 리조트, 캡슐 컬렉션 등 여덟 번에서 열 번까지 세분화되었다.
이에 따라 생산량 또한 폭발적으로 늘어 2000년 500억 벌이었던 세계 의류 생산량은 2015년 1,000억 벌로 두 배나 증가했다. 지구의 인구가 80억 명 정도라는 것을 감안할 때 상당히 과도한 수치다. 게다가 쇼핑을 즐겨하는 주체는 지구 인구 전체가 아니라 물질문명의 혜택을 누리는 선진국의 일부 사람들이다. 대체 구매력 있는 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 양의 옷을 구입하고 있으며, 얼마나 많은 옷이 팔리지도 않은 채 버려지고 있는 건지 아찔한 기분이 든다. 많은 저개발 국가에서는 태우거나 매립하지도 못해 산처럼 쌓이는 옷 때문에 몸살을 앓는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나면, 오늘날 ‘옷을 기부한다’거나 ‘중고 의류를 수출한다’는 말은 정말로 이상하게 들린다. 물건의 새로운 사용처를 찾아준다는 점에서 기부와 수출은 어쩌면 매립하거나 태우는 것보다는 은 방법이 될 수도 있지만, 처치가 곤란한 의류 쓰레기를 가난한 나라에 떠넘기는 행위를 가리는 표현일지도 모른다. 한국은 놀랍게도 세계 5위의 중고의류 수출국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만큼 유행에 민감한 나라도 없다.
3-오트 쿠튀르는 문학을 사랑해
‘고급 의류’ ‘고급 의류 상점’을 뜻하는 오트 쿠튀르Haute Couture는 19세기, 상류층 고객들에게 디자인을 선보이기 위해 프랑스에서 시작되었다. 오늘날에는 1년에 두 번 열리는 럭셔리 브랜드의 컬렉션을 의미하는 것으로 더 널리 받아들여지는데, 이 쇼에서는 시즌마다 각 브랜드가 지향하는 가치의 정수를 한눈에 볼 수 있다. 당대 최고의 디자이너들이 선보이는 실험적이고 파격적인 의상들은 실용성보다는 예술성에 가치를 두었기에 일반인들이 접근하기에는 제한적이지만, 다른 디자이너들에 영감을 주고 기성복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패션 트렌드의 가장 선두에 서 있다. 그런데, 최첨단의 트렌디함으로 시선을 사로잡는 오트 쿠튀르가 긴밀하게 영감을 길어 올려온 영역이 있으니, 바로 문학이다.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의 『올랜도』만큼 패션계의 사랑을 듬뿍 받아온 소설이 또 있을까? 칼 라거펠트, 앤 드뮐미스터, 17년 동안 버버리를 지킨 크리스토퍼 베일리 등 세계적인 디자이너들이 ‘올랜도’에게서 영감을 받은 바 있다. 가장 최근에는 펜디FENDI의 아트 디렉터 킴 존스Kim Jones가 『올랜도』와, 20세기 초버지니아 울프를 중심으로 모여 런던의 문화 예술을 이끌었던 문학가 집단 ‘블룸즈버리 그룹’에서 영감을 받아 2021년 봄 오트 쿠튀르 컬렉션을 선보였다.
전기 양식을 표방하면서도 시대와 성별을 넘나드는 파격적인 캐릭터를 통해 플롯이 전개되는 이 소설은 16세기를 살던 소년 올랜도의 이야기에서 시작해 1928년 남편을 기다리는 여성 올랜도의 모습으로 끝맺는다.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부터 300년을 거쳐 흐르는 시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주인공의 성적 전환은 관습이나 제도, 규범이 절대적인것이 아니라 각 시대·사회적 산물임을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이 과정에 기여하는 중요한 장치 중 하나가 의상이다.
17세기 후반, 깊은 잠에 빠졌다 깨어난 뒤 여성의 몸으로 변화한 올랜도는 꽃무늬가 새겨진 실크 드레스나 비둘기색 견직 드레스, 포도주색 양단 드레스 같은 것을 입게 되고, 뾰족한 슬리퍼와 진주 목걸이, 에메랄드 반지 등을 착용한다. 입어야 하는 의복에 맞춰 달라지는 행동을 자각한 그는 여성에게 강요되는 사회 규범을 남성과 여성 모두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게 된다. “그들이 똑같은 옷을 입었더라면, 그들의 세계관은 동일했을 것이다”라는 올랜도의 말은 1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사뭇 의미심장하다. 이러한 도발적인 발상과 전개는 다양한 예술 분야뿐만 아니라 여성학, 동성애, 젠더 연구의 주목을 받았는데, 성별의 경계가 화두인 패션계의 관심 또한 각별할 수밖에 없었다.
버지니아 울프는 지방시의 2020년 봄 쿠튀르 쇼에서 뮤즈로, 2019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코스튬 인스티 튜트가 개최하는 자선 모금행사인 ‘멧 갈라Met Gala’에서 고스트 내래이터로 활약하는 등 사후에도 끊임없이 패션계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치는 인플루언서다. 울프는 단지 등장인물을 설명하기 위해 의상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속해 있는 사회의 질서, 요구받는 역할 등을 반영하기 위해 의상을 주요한 장치로 활용했다. 과거 그의 모습을 담은 사진 속에서 종종 보이는 오버사이즈 코트, 크고 대범한 칼라, 챙이 넓은 모자 등을 통해 짐작하건대 그 자신에게도 의상은 자아를 반영하는 중요한 수단이 아니었을까.
의상은 세계에 대한 우리의 관점과 우리에 대한 세계의 관점을 변화시킨다. (…) 옷이 우리를 입는 것이지, 우리가 옷을 입는 게 아니라는 견해를 많은 사실이 뒷받침한다. 우리는 팔이나 가슴의 모양새에 맞게 옷을 만들지만, 옷은 우리의 마음과 두뇌, 혀를 그것에 맞게 만들어 낸다. _버지니아 울프, 『올랜도』 중
October22_Topic_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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