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의 묘비명으로 어떨까?
‘그때가 좋았다.’
도시는 언제나 과거가 더 나았다. 헤이세이 시대에는 쇼와가, 쇼와에는 고도성장기가, 다이쇼의 데카당스가, 메이지의 청운의 뜻이, 가장 독창성이 풍부했고 세련된 문화가 정점을 이루었던 에도 시대가.”
여행은 깜깜하리만치 빼곡하게 채워져 있던 일상에 환한 여백을 내미는 해방구다. 누구라도 그 자리를 밝고 유쾌한 빛깔로 채우고 싶기 마련이다. 그런데 여기, 무려 ‘죽음’을 모티브로 도쿄 곳곳을 타박타박 밟아가는 이가 있다. 온다 리쿠의 소설 『에피타프 도쿄』 속 주인공 K다. 에피타프epitaph란 묘비명 즉, 죽은 사람을 기리는 짧은 문구로, ‘에피타프 도쿄’라는 제목의 희곡을 집필 중인 K는 작품 완성을 위해 도쿄에 어울리는 묘비명을 탐색 중이다. 허구인지 실제인지 알 수 없는 수수께끼의 인물 ‘요시야’가 그 곁을 동행한다. 그는 상상할 수 없을만큼 오랫동안 이 도시에 살아왔으며, 도쿄의 오랜 모습을 누구보다도 세세히 기억하고 있다고 자신한다. 두 주인공은 도쿄 타워가 있는 아카바네바시 역, 화려한 긴자, 지상 53층 미술관이 있는 롯폰기, 책방이 즐비한 진보초 거리, 도심 속 왕궁 등 구석구석을 배회하며 이 도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모든 것을 가지려 했지만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다(모파상)’ ‘그는 본래의 자기보다 나아지려고 애썼다(스티븐 킹)’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롭다(니코스카잔차키스)’와 같은 비문을 보고 있으면, 묘비명이란 마치 누군가의 생이 다녀간 자리에 남는 한 줄의 문장이 아닐까 생각된다. 살아가는 동안 우리를 구성하게 되는 셀 수 없이 많은 문장들 가운데 딱 하나만 꺼내어 두고 떠나야 하는 규칙이 있다면, 나의 자리에는 어떤 문구가 새겨지게 될까? 하지만 아직 건재한 존재의 묘비명을 짓는 일은 아무래도 너무나 막연하다. 과거를 통틀고, 현재를 정확히 직시하며, 미래까지 아주 예민하게 가늠해야만 가능한 일이니까 말이다. K가 도시의 과거 영광과 그림자를 되짚고, 사회의 필수 인프라가 된 편의점과 시냅스처럼 거리를 점령한 자동판매기로 오늘날을 조망하며, 고층 건물들과 계속되는 개발 앞에서 도쿄의 앞날에 애정 어린 걱정을 내비치는 이유도 그래서일 것이다.
온다 리쿠는 왜 도시의 묘비명에 천착했을까? K의 시선을 빌어 그가 이야기하는 도쿄는 삶과 죽음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곳이다. 흥망성쇠의 굴곡을 거듭하는 동안 수많은 생명들을 제물로 삼아 무수한 노력과 희생, 패배를 집어삼키며 거대화되어왔기 때문이다. 또한 각종 재난과 재해로 인해 늘 파괴의 예감이 도사리는 곳이기도 하다. 2011년 동일본대지진 때의 강력했던 진동, 쓰나미, 그리고 방사능과 전력난 문제 등은 도쿄시민들에게 큰 트라우마를 안겼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이 건조한 톤으로 나열되는 탓에 도시에 대한 그의 태도는 사뭇 냉담해 보이지만, 그럼에도 도쿄에 대한 화자의 애정이 반짝이는 순간들이 있다. 모든 것들이 급속히 디지털화 되어가는 속에서도 굳건한 헌책방 거리 진보초에서 찾던 책을 발견하는 기쁨, 화려한 보석 상자처럼 반짝이던 도시의 야경, 어질어질할 정도로 복잡한 백화점 지하 과자 매장에서 과자를 사는 일… 그러니까 묘비명을 짓겠다며 이 모든 번거로운 장면들을 두루 살피는 K는, 사실 집요하게 이 도시를 사랑하는 인물이 아닌가 싶어진다. 도쿄라는 거대한 장소를 시공간을 넘나드는 낱줄과 씨줄로 촘촘히 엮어낸 듯한 이 소설 또한 논픽션, 희곡, 에세이, 메모, 인터뷰 등 다양한 형식이 교차하는 다층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외부의 어떤 충격에도 쉽게 흐트러지지 않을 만큼 견고하게 패치워크를 짠 뒤 그 속에 조심스럽게 도쿄를 보관하려는 의식처럼.
『루이 비통 트래블 북』 〈도쿄〉를 작업한 아티스트 그룹 이보이eBoy의 창작물은 발랄하고 유쾌해서 언뜻 소설의 오묘한 분위기와는 어긋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컴퓨터 그래픽 이미지를 구성하는 네모난 점들의 집합과 해체로 그려내는 광범위한 도시 풍경들은 소설 못지 않게 다양한 공간과 폭넓은 시간을 포괄한다. 추상화되고 단순화된 장면과 인물들이 특정한 장면을 포착했다기보다는 감상자 저마다가 상상하는 도쿄의 풍경, 혹은 낯익은 얼굴들을 쉽게 투영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스크린을 최대한 확대해서 면밀히 들여다보다가, 또 아주 축소시켜 멀리서 줌 아웃으로 관망하기도 하는 소설 화자의 도쿄 감상법에 이만큼 잘 들어맞는 짝이 있을까 싶어진다.
영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속 어딘가 원자화된 듯한 개인들, 빔 밴더스의 다큐멘터리 〈도쿄가〉와 옴니버스 영화 〈도쿄!〉에 감돌던 공허함 같은 것들 때문일까, 도쿄는 나에게 분주하면서도 혼자일 것 같은 커다란 공간으로 정형화되어 있었다. 한편으로 누군가는 도쿄를 청결하고 질서정연한 메트로폴리탄, 화려한 네온 사인으로 가득한 거리, 정갈한 미식, 뜻밖의 요란하고 과감한 문화 등으로 떠올릴수도 있을 것이다. 이에 『에피타프 도쿄』는 그 모든 것들이 아직 도쿄를 다 설명하지는 못한다고 일러주는 듯하다. 보고 싶고, 알고 싶은 것들만 취하며 사랑에 빠졌던 이들이 이내 돌아서는 가벼운 애정이 아니라, 대상이 지닌 작은 점들까지 다 헤아리고서 끌어안는 영원한 사랑법. 그처럼 속속들이 다 알게 되고 나면, 이 도시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남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