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ure Report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죄와 벌』가난한 사람들의 비참하지 않은 이야기

에디터. 서예람 / 그림. 켈리 비맨 / 자료제공. 루이 비통 © Louis Vuitton / Kelly Beeman

“‘자신의 행복을 감내할 수 없는’ 청년이라는 타입은 너무도 러시아적이어서 서구 독자의 마음을 강하게 움직일 수는 없다.” 『역사란 무엇인가』로 유명한 영국의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E. H. Carr가 『도스또예프스끼 평전』(열린책들)에 쓴 문장이다. 러시아사에 정통했던 카는 문학가 도스토옙스키를 본인의 첫 역사적 탐구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만큼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에 지극히 러시아적이면서도 인간의 정수를 파고드는 무언가가 있다는 방증이 아닐까. 10년 전 에디터 본인도 겁 없이 러시아로 떠나게 만들었던 소설, 『죄와 벌』과 미국의 시각예술가 켈리 비맨Kelly Beeman의 그림들을 통해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다시 여행해보려 한다.
『죄와 벌』은 1866년 1월부터 12월까지 『러시아 통보』라는 월간 문예지에 연재되었던 소설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배경으로 한다. 러시아 북서쪽, 발트해 핀란드 만을 면하는 상트페테르부르크는 1703년에 러시아 제국의 차르(왕)였던 표트르 대제가 건설한 계획도시이며, 18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200여 년 동안 러시아의 수도였다. 밤중에도 해가 지지 않는 백야의 수도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에서는 주인공인 라스콜리니코프가 느끼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 가난에 대한 자격지심, 자기 영혼을 팔아먹지는 않겠다는 자존심에서 비롯한 처절하고도 연약한 사상이 마구 쏟아져 나온다. 특히 살인을 저지르기 전에 그가 거리에서 보고 듣는 장면들, 계획된 살인과 계획에 없던 두 번째 살인을 저지른 뒤 현장을 빠져나가고, 이후 불안에 사로잡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서성일 때의 심리 묘사는 혀를 내두를 정도로 치밀하다.
소설의 시작점, 라스콜리니코프의 하숙집이 위치한 ‘S거리’는 실제 도스토옙스키가 하숙했던 스톨랴르니 거리다. 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 지하철의 주황색 라인 스파스카야 역이나, 보라색 라인 사도바야 역을 통하면 그 근방에 내려 걸어가볼 수 있다. 작가가 살았던 하숙집에는 ‘도스토옙스키의 집’이라는 명패가 붙어 있고, 거기서 한 블록 떨어진 곳에 학자들이 소설 속 라스콜리니코프의 집으로 특정한 건물이 위치한다. 대학생인 라스콜리니코프는 집세가 몇 달째 밀려 있다. 무더운 7월, 그는 집주인과 마주칠까 두려워하며 길을 나선다. 집에서 730걸음 떨어져 있는 노파의 전당포에 가기 위해서다. 걸음 수까지 기억하는 걸 보면, 그가 이미 여러 차례 전당포를 찾았고, 꽤나 강박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집을 나선 그의 차림은 빈민가에서도 눈에 띄게 남루하다.
전당포에 가긴 했지만, 소득은 그리 좋지 않다. 오래된 은시계를 넘기고 단돈 1루블 15코페이카를 받아 나온 그는 거리에 즐비한 선술집 중 한곳에 들어간다. 그곳에서 비열하고 무능한 인간, 소냐의 아버지인 마르멜라도프를 만난다. 그리고 자기 집에서 돈을 훔쳐 나와 며칠째 술로 탕진하고 있는 그의 뻔뻔하고 긴 주정을 듣는다. 그의 말마따나 성경 속 ‘소돔 같은 곳’에 사는 생활은 비참하다 할 정도이며, 마르멜라도프는 거기에 위악으로 대응하고 그런 자신을 떠벌리기까지 하는 인물이다. 그런데 주머니 사정은 그와 별다를 게 없는 라스콜리니코프는 ‘고매한’정신으로 인해 괴롭고 혼란스러운 것이다. 결국 그를 집으로 바래다주고 나오는 길, 라스콜리니코프는 본인도 돈이 없으면서 소정의 돈을 그 집에 두고 나온다.
이후 라스콜리니코프의 비뚤어진 이상주의는 점점 그 모습을 드러낸다. 생계를 위해 하던 과외 일조차 그만두고, 방 안에서 ‘생각하는 일’을 한다면서 단번에 큰돈을 벌겠다는 헛꿈을 꾼다. 혀를 차던 하숙집의 식모를 통해 그는 어머니가 부친 편지를 한 통 받는다. 그 안에는 가난한 사정으로 인해 가족 모두, 특히나 여동생 두냐가 겪은 치욕과 그간의 힘든 사정이 적혀있다. 눈물을 흘리며 편지를 읽은 그는 편지 말미에 적힌 가장 큰 치욕, 즉 동생이 별로인 것 같은 남자로부터 청혼을 받았다는 충격에 돌연 거리로 나간다. 네바강이 있는 북쪽 방향, 바실리예프스키 섬으로 걸어가며 그는 점점 생각 속으로 빠져든다. 실제 무언가를 보거나 겪기도 전에 어머니의 편지글만으로 동생과 결혼할 남자를 판단하며, 자신과 가족의 비참함을 끝없이 파고들고 질문한다.
바실리예프스키 섬은 역사상 러시아의 첫 대학인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 캠퍼스가 위치한 섬으로, 아래로 네바강, 위로는 말라야네바강이 있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다른 지역들에 교량으로 연결된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이곳으로 걸어가면서 대학시절 친구인 라주미힌의 집을 잠깐 떠올리지만, 정처 없이 생각하며 걷느라 섬을 가로질러 북쪽의 페트로프스키 지역에까지 다다른다. 어느 풀숲에서 지쳐 잠들어버린 그는 땀을 뻘뻘 흘리며 무시무시한 인간의 폭력을 목격하는 꿈을 꾼다. 잠에서 깬 뒤, 그는 자신이 전당포의 노파를 죽이려는 생각을 했음을 의식한다.
이때 그가 네바강의 멋진 석양을 바라보며 건너는 다리는 페트로프스키 지역에서 내륙으로 이어지는 트로이츠키 대교로 보인다. 소설은 자신의 부도덕하고 무시무시한 충동을 알아챈 그가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처럼 아무 생각도 판단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고 서술한다. 백야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석양은 한밤중이 되어서야 볼 수 있다. ‘밝고 뜨거운 밤’이라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배경으로 주인공의 내면은 본격적으로 분열된다.
July22_Russia_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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