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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효, 맛의 마법사

에디터. 지은경 자료제공. 한스미디어

우리 아이들 대부분이 식탁에 올려지는 식재료의 출처가 슈퍼마켓이라 믿는다고 한다. 훌륭한 식재료로 만들어진 근사한 요리를 즐기는 것도 좋지만, 우리가 섭취하는 음식이 어디로부터 오는지 알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몇몇 특정 장소에서 나는 식재료만을 최고의 가치로 선호하는 관습이 지속된다면, 대규모 패스트푸드 산업이 계속 몸집을 키워 식문화를 획일화시킨다면, 우리의 일상을 채우던 수많은 식재료들이 언젠가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 익숙하고도 소중한 재료를 그 무엇보다 특별하게 즐길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미식의 불모지였던 덴마크에 ‘뉴 노르딕 퀴진’ 트렌드를 만들어 다양한 식문화와 철학을 제안하는 레스토랑으로 유명한 노마NOMA의 두수장, 르네 레드제피René Redzepi와 데이비드 질버David Zilber가 그 해답을 제시한다.
“모든 우정은 잠시 지나가든, 평생 이어지든, 애정으로 변하든, 불신으로 끝나든, 구할 가치가 있다”라는 문장이 책의 끄트머리에 쓰여 있다. 이 문장이 뭐라고 갑자기 울컥했을까? 그동안 내 삶에 머물다 사라진, 그리고 지금 현재 머물고 있는 친구들의 얼굴을 그려본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껏 인연을 이어오고 있는 친구, 헤어졌다 우연히 다시 만난 친구, 급속도로 친해진 친구, 친구의 지인으로 만났던 친구, 일로 만난 친구, 최근 관계가 소원해진 친구… 각양각색 친구들이 모두 소중하게 여겨지는 건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럽게 둥글둥글해진 성격 탓일까? 아니면 그동안 나를 지나친 모든 만남과 인연이 지금의 나를 있게 해주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와서일까?
우리나라가 여러 경제 위기로부터 벗어나 부흥기를 맞이하기 시작했던 시절, 그 한가운데에는 더 좋아 보이는 것들을 탐하는 욕망이 자리잡았다. 특히 미국과 유럽 등, 소위 선진국의 모든 것이 동경의 대상이었다. 화장품과 패션, 예술가와 영화, 그리고 그들 삶의 방식을 따라 하기 바빴다. 정작 우리 손에 쥐고 있던 보석들은 돌멩이처럼 던져 버리고, 타인의 것이 최고라 여겼다. 비단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 수많은 나라에서도 이와 비슷한 현상이 나타났다. 그 배경에는 산업의 글로벌화가 자리한다. 다국적기업이 등장했고, 개발도상국의 값싼 노동력으로 더 많은 상품을 보다 저렴한 가격에 공급하면서 기업들은 날로 성장했다. 대량생산, 대량소비가 중시되는 산업화는 곧 먹을거리의 산업화 과정으로 이어졌다. 프랑스산 푸아그라, 러시아산 캐비아, 이탈리아산 송로버섯… 평소에 맛보기 힘든 고급식재료로 여겨지던 것들은 이제 언제 어디서나 손쉽게 구할 수 있게 되었다. 또 다른 한 편에서는 세계 어디서나 비슷한 맛으로 저렴하고 푸짐하게 즐길 수 있는 글로벌 프렌차이즈들이 성행했다. 그 사이 우리의 입맛은 점점 평균화되었고, 우리 곁에서 나고 자란 로컬 재료들은 흔하고 지루한 것으로 전락했다.
코펜하겐에 위치한 노마는 지역에서 생산되는 제철 식재료 연구와 이를 활용한 메뉴 개발에 힘쓰고 있다. 곰파 꽃봉오리 피클, 소금 구스베리 등 그들의 기후와 땅, 물의 특성에서 나온 평범한 식재료에 기반한 요리를 선보인다. 어떻게 보면 우리의‘신토불이’ 구호와도 일맥상통한다. 여기에 발효, 염장, 훈연 기술 등 덴마크를 비롯한 북유럽 전역의 전통 요리법에 현대적인 식문화를 접목하는 실험으로 도전과 혁신의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흔히들 노마를 야생 식재료 채집을 통해 교육하고 요리하는 곳으로만 연상한다. 하지만 노마의 근간을 이루는 요소는 단연 발효라고 할 수 있다. 2011년에는 요식업 종사자뿐 아니라 과학자와 농부, 철학가와 예술가들 등 음식 업계의 개선책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모여 첫 심포지엄을 열었다. 주제는 ‘생각 심기 Planting Thoughts’. 강의에 나선 첫 번째 연사는 신선한 굴과 김치국물의 조합을 선보인 한국계 유명 셰프, 데이비드 장이었다. 데이비드 장 연구팀은 발효를 일으키는 곰팡이와 효모, 박테리아 등이 속한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에 주목했다. 이들은 토양과 날씨, 지리학이 와인에 영향을 미치는 것과 같이 특정 지역의 토착 미생물이 언제나 최종 완성품의 풍미에 나름대로의 영향을 미친다고 설명했다. 발상 자체는 그리 독특하지 않지만, 이는 한국의 전통 식문화인 발효가 세계의 다양한 음식과 실질적으로 기본 패턴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무척 흥미롭다.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발효 음식은 가장 토속적인 동시에 가장 세계적인 가치를 지닌 것이다.
노마에 있어서 발효는 특정한 하나의 음식 레시피나 맛이 아닌 여러 가지 식재료를 통한 실험이자 모험이다. 모든 음식을 훨씬 뛰어나게 만드는 마법 같은 발효는 맥주, 와인, 치즈, 김치, 간장 등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노마 발효 가이드』는 노마에서 사용하는 발효물에 대한 포괄적인 여정을 다룬 지침서로, ‘젖산 발효, 콤부차, 식초, 누룩, 미소, 간장, 가룸’이라는 7가지 발효 방식을 소개한다. 더불어 책은 한국의 발효 문화도 소개하는데, 특히 메주를 띄워 만드는 한국의 장 문화에서 비롯된, ‘손맛’이라는 불가사의한 개념에 주목한다.
같은 재료를 사용해도 그것이 월등히 맛있을 때 한국인은‘손맛이 좋다’는 표현을 즐겨 사용한다. 음식은 손으로 만들어진다. 생명을 가진 사람의 손과 환경과 상황에 주어진 수만 가지의 변화 요소가 한데 작용해 발효가 시작된다. 그 기나긴 여정을 거친 시간과 정성이 음식에도 고스란히 깃들고, 수많은 미생물의 작용은 월등한 맛의 차이를 내며 건강에도 기여한다. 이처럼 발효 음식은 고루하고 번거로울 수 있지만, 예로부터 이어져온 우리 고유의 식문화다.
“한국의 장인은 공장에서 만들어낸 식품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개별 조리사가 음식에 불어넣는 쉽사리 따라할 수 없는 풍미를 일컬어 ‘손맛’이라고 한다. 이 손맛은 본질적으로 요리계의 카오스 이론이다. 당일 또는 당시 미소 제조업자의 피부와 옷에 묻어난 박테리아의 양, 온도와 기압 및 습도의 임의적인 변화 등 미소를 만들고 숙성시키는 과정에서 발생한 미세한 차이가 모두 발효의 발달 과정에 큰 영향을 미치므로 절대 완전히 동일한 제품을 다시 만들어낼 수는 없다. 물론 이는 요리사와 장인이 새로운 풍미와 창조물을 발견하게 만든 원인이기도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발효를 예측할 수 없고 스릴 넘치게 만이 책은 전 세계 미식가들로부터 사랑받는 레스토랑의 레시피와 맛의 비결을 전달하는 데만 그 목적을 두고 있지 않다. 두꺼운 분량의 글과 사진은 노마의 발효 실험 일지이자 최고의 맛을 찾기까지의 쏟아부은 오랜 노력의 증거물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터를 잡고 사는 지역에서 나오는 제철 식재료 위에 인간의 멋진 창조와 실험을 덧입히고, 발효의 마법을 불어넣은 음식들을 제안한다. 옛것이라는 고정관념을 뒤로하고, 재료의 맛과 향을 깊게 만들어주는 발효의 매력에 빠져보기를 권한다. 자, 이 땅의 선조들로부터 이어져오는 삶의 지혜가 고스란히 집약된 우리 고유의 자산이자, 가장 성공적이고 맛있는 레시피를 위한 세계적 노력이 담긴 식문화의 결정체를 맛볼 시간이다.
May22_Inside-Chaeg_01_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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