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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cember, 2021

위로의 충분조건

글.서예람

내 맘대로 활용할 수 있는 자원은 시간과 몸뚱이 하나뿐이라 믿고 살아온 빡빡한 사람. 갈수록 몸에 의해 시간이 많거나 적어질 수 있음을 느끼고 있다. 나와 다른 몸들과 그들의 삶, 주변이 궁금하다.

『자유로운 휠체어』
질 로시에 글
니콜라 무그 그림
김현아 옮김
한울림스페셜

누군가를 위로해주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 했던 것은 성인이 되고도 몇 년 뒤, 혼자서 친구의 초상집에 가야 했던 날이다. 당시 만나던 애인에게 큰 슬픔을 겪고 있는 소중한 사람에게 어떻게 힘이 되어줘야 하는지 물었다. 그는 그저 곁에 있어주라고 말했다. 냉혈한은 아니지만 독하게만 살았던 내가 처음 배운 위로의 필요조건이었다. 그로부터 몇 년 뒤, 또 다른 애인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상대의 마음을 조금은 먼저 헤아려 달라고. 아, 옆에 붙어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건가. 충분한 위로에는 다른 것이 필요한 듯했다.
『자유로운 휠체어』는 이름 모를 비장애인 친구와, 모종의 사정으로 한쪽 다리를 절단해 휠체어로 이동하는 토니오의 우정을 그린 그래픽노블이다. 모든 사랑이 그렇듯, 우정도 아름답지만은 않다. 두 친구는 평소 동네 농구장에 함께 앉아 맥주를 마신다. 토니오는 휠체어에 앉아 농구를 하는 사람들에게 못된 말을 하고, 친구는 그 곁을 지킨다. 이후 토니오가 남은 한 다리마저 절단해야 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와 함께 바다 구경을 가기도 한다. 처음 이 책을 읽을 때는 비장애인인 친구가 장애인인 토니오 곁에 있는 모습이 그저 좋게 보였다. 어느 순간 토니오가 발끈해서 다리가 모두 있는 너는 나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느니, 동정하지 말라느니 하는 것이 오히려 불쾌하기도 했다.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건데, 그나마 저를 생각해준 친구에게 저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은 고독할 수 밖에 없을 거라는 냉정한 생각도 들었다.
토니오가 장애인이기 때문에 그의 감정적 폭발도 친구로서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여야 할까. 비장애인이었어도 친구에게 토니오처럼 막말하면 관계가 끝나지 않을까. 오히려 ‘나쁜’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강화하는 이야기가 아닌가. 복잡한 와중에 책을 다시 읽었다. 그제서야 토니오의 미묘한 표정과 태도 변화가 눈에 들어왔다. 주변 모두를 욕하거나 없는 얘기를 지어내며 혼자 웃던, 다소간 불쾌한 성격의 그가 ‘그래 알았어’ 식으로 대강 수긍하는 장면. 함께 여행하던 중, 토니오가 있던 자리에서 잠깐 이탈했다고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친구를 본 다음부터였다. 친구에게 토니오가 어때 보이는지가 아닌, 토니오에게 친구가 어때 보이는지가 선명해졌다. 친구는 ‘수술을 앞둔 토니오를 위해서 떠난 여행이지만, 이 여행에서 그는 내가 가자는 곳으로, 내가 하자는 대로만 해야 한다. 그래야 안전하게, 무사히 집에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라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었다.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 이 비장애인 친구, 토니오가 ‘어이 멍청이’라고 부르는 인물이 처음에는 그저 둔감한 사람으로 보였다. 물론 둔감한 것도 특권이라 할 수 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둔감한 성격 자체를 탓할 수는 없다. 하지만 힘든 상황에 놓인 토니오에게 그가 하는 말들은 다소 갑갑하다. ‘어쨌든 잘 될 거다’는 전혀 영양가가 없는 말이나 ‘병원 약속을 어기면 어떡하냐’는 꾸지람에 이 말을 듣는 토니오에 대한 배려가 있었는지는 생각해볼 일이다. 그는 곁에만 있지, 토니오와 함께 뭔가를 하지는 않는다. 같이 마실 맥주나 아이스크림을 사러 가면서도 슈퍼에 함께 들어가지는 않는다. 친구가 없어지거나 사고를 칠까 걱정이라면 함께 가면 될 텐데, 그는 토니오에게 그 자리에 가만히 있으라고만 말한다. 시끄럽게 농구에 훈수를 두거나 비를맞을 때도, 그는 함께 해주지 않는다. 그저 토니오의 모든 행동을 목격하고 그 옆에만 있는다.
어쩌면 친구란 같이 먹을 아이스크림을 함께 사 오고, 성미에 안 맞아도 가끔은 서로의 장단에 맞추며 시간을 보내는 사이일 것이다. 그저 곁에 있는 것이 아닌, 함께하는 것. 함께하는 행동 뒤에 있는 미세한 마음의 결에 위로의 충분조건이 있는 것 같다. 지금만 함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믿음. 어떤 지금이더라도, 우리는 계속 함께 있을 거라는 믿음. 냉소적인 토니오도, 끝없는 자유를 꿈꾸는 어떤 독자적 인간도 그런 관계가 주는 위로에서 살아갈 힘을 얻는다. 누군가와 좋은 시간을 보낼 줄은 알지만 슬픔 곁을 지키는 데에는 자신이 없는 모두에게 이 책을 권한다. 더 많이, 잘 사랑하는 법에 대해 새로이 생각해볼 수 있다. 그다음에는 오지랖도, 무관심도 아닌 마음을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할 앞으로의 시간으로 증명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