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절 도화지를 주면 대다수 아이의 그림에는 비슷한 배경과 상황이 펼쳐진다. 밝은 파란 하늘 위에 노랗거나 붉은 태양과 하얀 구름. 태양이나 구름에 웃는 얼굴을 그려 넣은 모습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갈색빛의 나무 기둥과 가지, 그 위에 초록 잎사귀는 곱슬머리처럼 얹혀 있다. 그렇게 생기지 않으면 안 되는 법칙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언제부터 아이들은 하나같이 비슷한 방식으로 그리게 되었을까.
이 책은 잘못됐어! “누가 나무에 색칠하는 것을 잊어버렸는가 봐! 이 책은 분명 잘못됐어. 환불을 받아야 해…”
알록달록한 색감의 『진짜 색깔을 찾습니다(True colors)』는 경쾌하게 시작되는 듯하지만, 곧 분위기가 냉랭해진다. 나뭇잎 색이 희기 때문이다. 색깔을 만든 로봇은 하얀 나뭇잎이 어디 있냐며 사람들로부터 날 선 비난을 받자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고 억울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그다음에는 초록색 구름이 또 문제가 된다. 자신들이 알고 있던 색과 전혀 다른 풍경에 사람들은 삽화가 엉망이라며 비판한다. 나뭇잎과 구름의 색을 굳이 책은 잘못됐어! 이 바꾸어 혼란을 불러일으키는 이유가 뭘까? 『진짜 색깔을 찾습니다』의 삽화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다고 믿는 것’과 다른 색채의 풍경을 보여주는데, 이는 곧 다름을 용납하지 않는 이들의 거센 저항과 마주한다. 하지만 원래 알고 있다고 믿었던 색깔이 진짜 본연의 색깔인지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반대로 저항하는 이들의 항의가 터무니없다고 할 만한 근거가 있긴 할까? 진짜 색깔이란 무엇이며 그런 게 있기는 한 것인지, 그 답을 향해가는 여정을 이 책과 함께 하게 된다.
이 흥미로운 책은 맞지 않는 색들로 삽화를 그리고 의도적으로 엉망진창인 것처럼 꾸밈으로써 기존 관념에 대한 전복을 꾀한다. 미술사에서 클로드 모네, 조르주 쇠라, 에드바르 뭉크에 이르는 인상주의·표현주의 예술가들은 시각과 날씨, 심리 상태의 변화에 따라 우리가 인지하는 색이 달라지는 것이 아닐까 의문을 가졌고 이를 검증하기 위해 수없이 많은 예술적 실험을 했다. 현상학자인 모리스 메를로-퐁티는 예술을 감상할 때의 시지각이란 감각과 사유가 혼합된 것으로, 인간이 보는 외부세계는 감각기관을 통해 감각하는 동시에 사유하는 인간의 몸과 분리될 수 없다고 말했다. 『진짜 색깔을 찾습니다』는 책 속에서 불만스러운 눈길로 항의했던 사람들의 주장이 억지스럽다고 단편적인 결론을 내리기보다는, 정해진 색깔이라는 것이 과연 있는건지 고찰할 수 있도록 부드럽게 유도한다.
꼭 그래야만 하나 “나무에서 비가 내리고 구름에서 과일이 비처럼 내리는 초현실적 풍경이 펼쳐지는 이 곳에서 자유와 뒤죽박죽 여정에 대해 유쾌하고 시각적으로 시적인 이야기가 펼쳐진다. 『진짜 색깔을 찾습니다』란 이 기이한 책은 세상을 다양한 톤과 색채로 그리도록 우리를 초대한다.”
포르투갈 리스본 태생의 곤살로 비아나Gonçalo Viana는 건축학을 전공하고 런던으로 이주하여 건축가로 활동하다가 본래의 꿈이었던 일러스트레이터로 전업하였다. 이후 약 20여 년 가까이 에디토리얼, 광고, 아동 도서 일러스트레이션 작업을 하고 있으며 다수의 수상 경력을 가지고 있다. 곤살로 비아나는 자신의 고향이 밝은 빛과 에그타르트가 유명한 유럽의 한 정겨운 마을이라고 말한다. 그래서인지 복고풍의 선명한 컬러감이 돋보이는 그의 그림에서는 기하학 도형들과 탄탄한 양감, 판화 기법처럼 찍어낸 질감이 조화를 이룬다. 그는 어렵고 추상적인 생각이나 개념을 단순화하고 공감이 가는 이미지로 변환하는 데에 큰 즐거움과 보람을 느낀다고 한다.
『진짜 색깔을 찾습니다』는 곤살로 비아나가 3년여에 걸쳐 공을 들이며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 첫 번째 책이다. 이 책은 출간된후 볼로냐 라가치상 오페라 프리마 부문 수상, 화이트 레이븐스 선정, 커뮤니케이션 아츠상을 수상했고 바바카모 일러스트레이션 북 페스티벌의 선정 작품이 되었다.
곤살로 비아나의 삽화에서는 특유의 천진난만함이 보이지만 그가 다루는 주제는 사뭇 심오한데, 이러한 아이러니가 읽는 이로 하여금 한 번 더 생각해보도록 유도하고 흥미를 더한다. 작가는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생각하기를 바라는 것 같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을 계속해서 던진다. 꼭 그래야만 하는지, 왜 그렇게 따라야만 하는지, 각자 다른 느낌을 갖고 생각하는 게 가능한지 등의 생각거리를 진지하게 살피다 보면 어린 독자는 어느새 작은 철학자가 되어 있을 것이다.
꼭 그렇지 않아도 돼
그림을 잘 살펴보라는 말과 함께 『진짜 색깔을 찾습니다』를 내밀자, 아이는 글이 없는 그림책인지 물었다. 글이 전혀 없지는 않지만 그림이 재미있다고 하니 한 번 봐주겠다는 듯 무심한 얼
굴로 책을 집어 든다. 곧 낄낄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연신 책장을 뒤로 넘겨 그림을 살피는 것을 보니 재미있나 보다. 마지막장을 유심히 읽던 아이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그림을 천천히 뜯어보고는 방긋 웃는 얼굴로 내 곁으로 왔다. 아이는 곧 마지막 장의 경고문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기며 내 시선을 끈다. “이 책 말이야. 재미있어. 색깔이 정말 예쁜데 자꾸 엉망이고 잘못됐다고 하는 것도 웃겨. 우리는 모두 다르니까 색깔도 다르게 볼 수 있잖아. 그러니까 진짜 색깔은 정해져 있지 않은 거야.”『진짜 색깔을 찾습니다』를 혼자 혹은 어른과 함께 보는 어린 독자들은 예술가, 철학자, 시지각 연구자처럼 어려운 질문을 던지거나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는다. 어린 독자들이 책을 대하는 방식은 훨씬 직관적이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어린이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 정직한 감상과 기발한 섬세함에 놀라게 된다. 그러니 아이들 곁에 좋은 책들을 가까이 둔다면 뜻밖의 열매를 많이 얻게 될 것은 분명할 테다. 선배 부모들, 교사, 학자, 전문가들이 독서의 가치를 피력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많은 부모는 양육자, 보호자, 길잡이, 선생님, 코치에 이르는 여러 역할을 수행하면서 독서를 학습활동으로 삼는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부모가 책을 고를 때 학습에 도움을 줄 수 있거나 교훈적 메시지가 담겨있기를 바란다. 어른들은 이 숨은 의도를 아이들이 눈치채지 못할 거라고 넘겨짚지만 사실 아이들은 어른들이 골라주는 책을 읽어 보면 바로 알아챈다. 아이들이 꼭 그렇지 않아도 돼 그냥 넘어가 주면 다행이지만,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건 배우는 게 있어야 한다고 은근히 강요하는 부모에게 조금이라도 반감을 갖게 되면 낭패다. 이런 경우 아이들은 독서가 억지로 해야 하는 활동이거나 학습의 연장이라는 부담감을 느끼게 되면서 책 읽기의 즐거움을 잃고 만다.
『진짜 색깔을 찾습니다』는 직접적이지 않은 주제 전달 방식탓에 교훈이나 학습을 목표로 책을 찾는 부모들이 앞다투어 집어들 만한 책은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아이들이 즐거움을 잃지 않으면서 감각의 스펙트럼을 넓히고 생각을 확장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분명 좋은 독서 경험을 안겨줄 책이다. 어떤 질문에도 정답을 미리 정해두지 않고 모든 가능성을 활짝 열어 어린 독자들을 엉뚱한 나라로 초대하는 이 책, 함께 읽어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