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ic : 이달의 화제
서구라는 환상
에디터 : 전지윤 김수미 임태훈
모든 기억은 개인적이고 왜곡되기 쉬우며 인간 존재의 숙명과 마찬가지로 유한하다. 그렇기에 사진과 영상의 등장은 획기적인 변화를 이끌었다. 어떤 장면이나 사건에 대해 반박할 수 없는 증거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이는 문자와는 다른 차원의 증언과 이야기를 불러일으키는 강력한 수단이 되기도 했다. 기술 발달과 맞물리며 언제 어디서든 손안에서도 이미지를 향유할 수 있게 된 오늘날, 현대인에게 이미지는 여전히 수단으로만 작용할까? 갈수록 촘촘해지는 빅데이터와 알고리즘 시스템은 오늘 내가 소비한 영상 콘텐츠와 얼마나 깊게 연관되어 있을까? 이달의 토픽에서는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자리매김한 사진과 영화의 탄생에 주목한다. 유튜브와 넷플릭스가 어떻게 영상 소비의 주요 기반으로 급부상했는지도 살펴본다. 마지막으로, 미디어 테크놀로지와 인문학을 아울러 통찰하고 화두를 던지는 연구자 임태훈이 디지털 영상 시대의 착취적 구조와 미디어 이용자들의 생존 가능성에 관해 이야기한다.
1-다차원적 시공간과 영상 매체
사진, 영화, 텔레비전과 같은 이미지 매체들이 전통적이고 전형적인 시공간의 개념을 어떻게, 얼마나 변화시켰는지의 문제는 상당히 중요하다. 심혜련은 『20세기의 매체철학』에서 다원화된 사회적 시공간의 실제성은 교통수단과 대중매체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인정되었다고 말한다. 사진, 영화, 텔레비전이라는 영상 매체가 연대기적 시간 개념을 서로 혼용함으로써 오랜 세월 인간이 갖고 있던 시간이라는 개념이 해체되는 계기가되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기술과 개념이 도입되기 전, 시간은 사람들이 몸을 담그는 강이었다. (…) 그런 광경 속에서 사진은 마치 누군가 흐르는 시간의 강물을 정지시키는 방법을 찾아낸 것처럼 등장했다.” _리베카 솔닛, 『그림자의 강』 중
뵌과 자이들러는 『매체의 역사 읽기』에서 모든 이미지 제작 방식이 기술적 보조 수단의 유무와 관계없이 제작자인 인간 주체에 종속되었던 예전과 달리, 사진은 기계를 통해 정지해 있는 이미지를 모사하거나 고정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발터 벤야민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과 「사진의 작은 역사」에서 설명하기를, 사진이 동일한 이미지의 복제 가능성과 같은 심오한 논의의 신호탄을 쏘았다고 한다.
사진기의 기능이 어떻게 다차원적 시공간 개념을 일으키게 되느냐의 문제는 곧 우리가 인지한 대상을 재현해내는 방식과 관련되어 있다. 뵌과 자이들러에 의하면 사진은 인지한 것을 직접적으로 표현 혹은 재현할 수 있도록 한 최초의 이미지 생산 방식이며, 그로 인해 인간의 인지능력을 확장시킨다. 사진은 찰나를 즉각적으로, 바로 그 순간에 포착한다. 회화나 조각과 같은 순수예술처럼 경험이 일어나 이미지가 재현되기까지 시간이 지연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리고 사진이 포착한 순간은 고정된 이미지 속에서 반영구적으로 존재하면서 사진기가 작동할 때의 찰나보다 훨씬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대상을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리베카 솔닛은 철도 발명이 사람들과 세상을 더 가깝게 이어주었던 것처럼, 사진 또한 눈 깜짝할 새 지나쳐 버리는 순간을 간직할 수 있게 해줌으로써 세상을 더 가깝게 느끼도록 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러한 신기술에의 흥분을 미처 다 기록하기도 전에 “가장 모순적인 발명품”이자 “늘 앞으로 나아가지만 또한 늘 뒤를 돌아보는 기술”이라는 우울한 꼬리표가 사진에 붙는 이유를 에스터 레슬리의 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진은 현재의 순간을 찍는데 사진에 찍힌 현재는 사진에 찍힌 순간부터 과거가 되기 시작한다는 것, 이것이 사진의 이상한 변증법이다. 아무리 새로운 순간도 사진에 찍히면 역사적 기록이 된다는 것, 이것이 사진의 운명이다.” _에스터 레슬리, 『발터 벤야민, 사진에 대하여』 중
2-영상, 시공간의 제약을 뛰어넘다
한 소녀가 커다란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메시지에 귀를 기울인다. 잠시 후 라디오는 연기와 함께 사라지고, 화려한 의상을 입은 정체불명의 사람들이 TV 모니터 안에 등장해 노래한다. 1981년 8월 1일, 미국 MTV 개국을 맞아 최초로 방송된 버글스The Buggles의 〈Video Killed the Radio Star〉는 라디오 시대가 저물고 영상 매체 시대가 도래함을 선언하는 완벽한 상징이었다. 그리고 오늘날, 이 노래는 “Streaming(혹은 Youtube) Killed the Video Star(스트리밍이 비디오 스타를 죽였다)”라는 문구로 패러디되고 있다.
미디어의 판도는 또 한 번, 완전히 바뀌었다. 바야흐로 OTT(Over The Top)의 시대다. OTT란 셋톱 박스 없이 인터넷으로 연결된 디바이스를 통해 미디어 콘텐츠를 제공하는 서비스를 의미한다. 유튜브와 넷플릭스는 어떻게 순식간에 미디어 시장을 주도하게 된 걸까? 『스트리밍 이후의 플랫폼』의 저자 노창희는 미디어 환경의 주도권을 이용자에게 쥐여준 것을 가장 유력한 요인으로 꼽는다. 이용자는 원하는 콘텐츠를 시간과 장소에 관계없이 볼 수 있고, 알고리즘이 취향에 부합하는 콘텐츠를 찾아서 제안해주기까지 한다. 덕분에 범람하는 콘텐츠 홍수 속에서 허덕이지도, 굳이 검색하는 수고를 들이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더불어 코로나19로 인한 자가격리의 시대까지 도래하면서 미디어 수용자들은 더욱더 맹렬하게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 속으로 뛰어들게 되었다. 이제 유튜브와 넷플릭스가 없는 일상은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앳된 남성이 헐렁한 재킷을 입고 어색한 표정으로 동물원에 서 있다. 그리고 “여기 보이는 코끼리들이 진짜 멋진 건 정말, 정말, 정말 코가 길다는 거예요”라고 말한다. 2005년, 유튜브 최초로
업로드된 ‘Me at the zoo’라는 제목의 이 19초짜리 영상은 오늘날 1억 3천만 회를 웃도는 조회수를 기록했다. 딱히 특별한 내용도, 감각적인 영상미나 빼어난 구성도 없다. 그러나 초등학생들이 가장 선망하는 직업이 ‘유튜브 크리에이터’이고, 성인들조차 삶이 막막할 때면 ‘유튜브나 한번 시작해볼까?’라고 생각하는 시대에 ‘유튜브 최초의 게시물’이라는 타이틀은 이 영상에 기념비적 가치를 부여한다.
“당신의 모습을 방송하세요(Broadcast yourself)”라는 슬로건을 내세운 세계 최대 동영상 플랫폼의 문이 열렸고, 이용자들은 이제 영상 콘텐츠를 단순히 소비만 하지 않는다. 나이, 성별, 국적을 불문하고 누구라도 스마트폰 하나만 있으면 자신이 촬영한 영상을 전세계에 공유할 수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유튜브는 일정 수준의 구독자수 또는 조회수에 도달한 크리에이터에게 채널 트래픽을 통해 발생한 수익 일부를 가져갈 수 있게 했다. 유튜브는 지속적으로 새로운 콘텐츠를 업데이트하고, 이용자는 자신이 만든 콘텐츠를 통해 생계를 꾸릴 수 있는 선순환 시스템을 구축한 것이다.
유튜브의 CBO 로버트 킨슬Robert Kyncl은 미디어 생태계를 주도하고 있는 크리에이터가 일종의 새로운 계급으로 부상했다고 말한다. 자신만의 독창적인 콘텐츠와 가공되지 않은 솔직한 일상을 공개한 일부 크리에이터들은 여느 유명 인사 못지않은 영향력을 갖는다. TV 시청자 규모의 팬층을 거느리는 채널들이 생겨났고, 수많은 크리에이터가 자신의 콘텐츠 정보나 제작 과정 등을 책으로 엮어 베스트셀러 작가로 거듭나거나 TV, 영화 제작 및 연출에까지 나서고 있다.
좋아하는 취미나 관심사를 깊이 탐구하고, 맛있는 음식을 맛깔나게 먹는 것만으로 인지도와 수익까지 얻는 삶을 곳곳에서 목격하면서 ‘나도 유튜브’ 열풍은 더욱 거세지고 있다. 그러나 콘텐츠 점유율 상위권에 머무르는 크리에이터 대부분은 몇 개월, 길게는 수년간 대중의 온갖 평가를 견디며 하루도 쉬지 않고 혼자서 대본, 제작, 편집, 때로는 유통까지 감당한다. 누구나 영상을 창작할 수 있지만, 수익을 내는 크리에이터가 되기까지의 진입 장벽은 결코 낮지 않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편에서는 조회수를 높이기 위해 자극적이거나 과장된 허위내용으로 이목을 끌려는 현상도 심심치 않게 벌어진다. 지난여름, 우리나라 유튜브에서 일명 ‘뒷광고’ ‘조작방송’에 얽힌 크리에이터들이 논란이 되었다. 그런데 이들이 올린 사과 영상이 높은 조회수를 기록하자 한동안 ‘죄송합니다’라는 제목의 영상이 챌린지처럼 이어졌다. 사과마저 콘텐츠가 되어버린 풍토는 씁쓸함을 안겨주었다. 자극적인 소재, 혐오 표현, 가짜 뉴스, 조작 방송 등 일명 어그로aggro와의 전쟁은 새로운 미디어 생태계에 커다란 과제로 남아있다.
3-디지털 광인일기
우리의 일상이 영상에 에워싸인 지 오래다. 이 사실을 새삼스러워하는 게 외려 이상하다. 영상은 또 하나의 자연이 되었기 때문이다. 푸른 하늘, 태양, 달, 별을 볼 수 있고 대기에서 숨 쉰다는 사실과 별반 다를 게 없다. 무덤덤해졌다고는 하지만 실은 지난 백 년간 충격은 지속되어 왔다.
조부모 세대와 어린 손자 세대는 영상을 상대화하는 감각에서 큰 차이가 있다. 유튜브와 넷플릭스가 없던 시대를 모르는 어린 세대에게 1990년대산 텔레비전과 VCR은 박물관의 전시물로 보일 뿐이다. 그런데 이 아이들도 살아가는 내내 피해가지 못할 사실이 있다. 세상의 칭송을 받는 최첨단 기술 제품이 구닥다리 퇴물로 전락하는 과정은 끝없이 반복될 것이며, 그 변화에 어떻게든 적응하며 살아간다는 것. 이 일은 취향이나 체질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경제적 생존과 직결된, 특정한 방식의 지각을 단련하는 훈육 과정이고 반복 학습 과정이다. 그 고단함과 조바심의 연속은 세대가 함께 공감할 문젯거리다.
가령 10억 명이 시청한 유튜브 동영상은 개인적인 즐거움을 넘어, 억 단위의 사람이 인지적 연쇄 작용에 휘말리는 일이다. 비트bit가 헤쳐모이는 전자기의 물리적 스케일은 문자 그대로 태풍이나 허리케인에 비교할 수 있다. 막대한 전력이 소모될 뿐만 아니라, 그 흐름을 감당할 통신 선로, 수백만 대의 서버와 인간 노동자가 동원된다. 그리하여 수억의 인민이 BTS와 핑크퐁을 알게 되고, 트럼프의 트위터 타임라인에 갓 올라온 280자와 오늘의 코로나 확진자 숫자 따위를 전달받는다. 개별 정보 그 자체는 허황한 정보 부스러기에 불과할 수 있다. 하지만 수억 명이 접속하고 재매개가 거듭되면 막대한 자본으로 부풀어 오른다. 유행을 타는 영상은 이 현상의 얄팍한 표면에 불과하다. 사람들은 각기 다른 영상에서 같은 것을 찾고 있다. 바로 이 질문, ‘어떻게 해야 돈을 벌 것인가.’
초등학생 장래 희망 1순위가 유튜브 크리에이터라고 한다. 이 아이들의 생애를 주의 깊게 짚어볼 필요가 있다. 2020년 기준으로 초등학교 6학년은 2008년생이다. 이들은 인터넷이 없던 시대는 물론이거니와 스마트폰이 대중화되지 않았던 때를 경험하지 못했다. 태어나 보니 디지털이 자연환경과 다를 게 없었다. 2008년은 유튜브가 공식적으로 한국어 서비스를 시작한 원년이기도 하다. 그 해는 미국발 금융위기가 있었다. ‘생존’이라는 화두가 사회 전 영역에서 강박적으로 강조되었고, 가난에 대한 불안과 공포는 해가 갈수록 증폭됐다.
지난 십 년 동안, 가정, 학교, 학원, 친구들 사이에서 디지털을 매개로 무언가를 배울 때마다 아이들에게는 어떤 메시지가 암묵적으로 주입되었을까. 이 아이들이 유소년기 내내 체득한 생존 감각은 다름 아닌, 디지털 세계에서 살아남는 방법이다. 그러니 존경과 선망의 대상으로 삼는 이가 유튜브 스타나 e-스포츠 챔피언인 것도 당연하다. 아이들이 유튜브나 게임 없이 살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면, 주류 경제체제가 대량 생산하고 있는 인간형으로 완성될 전형적인 스텝을 완수 중인 것이다. 어른들 이라고 다를 게 없다. 우리가 끝내 피하지 못했던 ‘시장 질서에 길든 소비자 되기’의 과정을 다음 세대가, 또 다음 세대가 그대로 밟고 있을 뿐이다. 체념할 현실이 아니다. 아이들이 특정한 패턴의 데이터 소비에 유난스러울 정도로 몰두하고 있다면, 아이들을 숙주 삼아 가계 계좌에서 꿀을 빠는 기업을 향해 주먹을 휘둘러야 마땅하다. 돈만 털리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품종 개량된 가축으로부터 더 많은 고기를 취하듯, 소비자도 시장과 기업에 의해 세대를 이어 개량되고 있다. 방법은 갈수록 교묘해졌다. 데이터 소비로부터 파생되는 빅데이터를 분석해서 우리를 쥐락펴락할 마케팅 전략을 세운다. 그들의 의도대로 우리의 주머니가 열리는데, 정작 우리는 분노하기는커녕 그들의 열성 팬임을 자처한다. 이를테면 이런 장면. 플랫폼 분야 국내 간판 기업이 내세우는 캐릭터 이모티콘이 귀엽다며 결제 버튼을 누르고, 또 누른다. 가축을 가두는 굴레조차 가축 스스로 두르고 관리하는 셈이다. 우리는 이 비참함을 마땅히 비참해할 수 있어야 한다.
어디가 어떻게 개량된 걸까? 동시대 영상 문화를 분석하는 일은 이 문제에 대한 자가 진단법을 찾는 과정이기도 하다. 어떤 영상과 음악에서 기쁨과 희열을 배우고 반대로 증오와 혐오를 내면에 새길까. 그렇게 만들어진 마음의 구조로부터 이윤을 취하는 이들은 누구일까? 조두순 출소 생방송으로 유튜브 채널한 곳에서만 3일 동안 1,700만 원을 벌었다고 한다. 이런 채널로 직접적인 수혜를 보는 유튜브 플랫폼과 구글 네트워크는 대체 얼마를 벌어들이고 있는 것일까?
간단한 산수도 현실 파악에 도움이 된다. 지난 일 년 동안에 유튜브 시청에 쏟아부은 시간의 총량을 계산하고, 그 시간을 다른 경제 활동으로 대체했을 때 얻을 수 있는 수익은 얼마일까? 돈으로 셈하기 어렵다면 활동 리스트를 짜보는 것도 좋겠다. 인터넷 좀 어지간히 하고 주체적으로 삶의 의미를 찾자는 등의 상투적인 교훈이 떠오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팬데믹으로 우리는 예전보다 훨씬 더 플랫폼 의존적인 인간이 되고 말았다. 공연이나 전시, 교실 수업처럼 디지털화될 필요가 적었던 영역마저 강제 디지털화의 압박에 내몰렸다. 카페에 앉아 담소를 나누고, 코인 노래방에서 혼자 열창하는 일도 방역에 위협이 되는 불온한 활동이다. 이런 세계에서 살게 될지 아무도 몰랐다. 예전에는 이렇게 살지 않았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전년 대비 2020년 5G 데이터 사용량이 2,328%가 폭증했다고 한다. 전 세계 모바일 사용자 지출은 무려 1,120억 달러에 달한다. 소상공인이 줄줄이 파산하고 온갖 업종에서 실업자가 줄을 잇고 있는 와중에 플랫폼 자본은 역대급 호황을 누리고 있다. 위기는 기회라고 하는 이들이 있다. 틀린 말은 아니다. 시장 패러다임이 변화하는 이런 시기야말로 위기이면서 기회일 것이다. 관련 정보와 주장을 줄줄이 늘어놓는 채널이 유튜브에만 수백수천이다. 언제나 그랬듯 모두가 돈 생각뿐이다.
하지만 아이들도 살펴봤으면 좋겠다. 일 년 내내 아이들은 학교를 잃었고, 예전 같았으면 당연하게 여겼을 온갖 체험을 박탈당했다. 그런데도 컴퓨터 화면 앞에 앉아 비대면 수업을 받는 상황에 아이들은 적응하고 있다. 팬데믹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되든, 아이들이 지금 겪고 있는 미디어 체험은 그저 안타깝게만 여길 문제가 아니다. 불가피한 현실이라고는 해도, 우리는 지나치게 디지털 종속적인 환경에 갇혀있다. 미디어가 매개하는 세계 체험은 또 다른 미디어에 의해 비판적으로 상대화되어야 한다. 이를 통해 언제나 또 다른 세계가 가능함을 상상하고 살아 낼 힘을 길러야 한다. 아이들은 지금 이 기회를 놓치고 있다. 아이들을 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