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eg’s cho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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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ctober, 2020
당신이 이미 아는 거지만 모를 거
Editor.김복희
나는 몇 편의 시를 외운다는 의식 없이 외울 수 있는데, 그중 김소월의 지분이 꽤 된다. 정규 교육 과정에서 이토록 신나게 흡수한 것이 있었나 싶게, 김소월의 시 몇 줄은 기억 희미한 깜깜한 중고생 시절의 몇 안 되는 기쁨 중 하나로 남아있다. 물론 어떤 시편은 동요나 가요로 들어 기억하는 까닭도 있을 것이다.‘엄마야 누나야’나 ‘진달래꽃’ ‘개여울’ ‘세상모르고 살았노라’ 같은 것. 흥얼거리기 쉬운 노래들이다.
나는 김소월을 외울 줄 아는 내가 좋다. 그 시들이 내 심신과 말버릇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주었으리라고 짐작하는데, 그것이 참 좋다. 좋아하고 아끼는 것이 나를 이루는 데 영향을 미쳤으리란 생각 덕분에 나 자신도 좋아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조금 더 과장하자면, 나는 김소월이 나뿐만 아니라 은연중에 우리 모두에게 준 것이 엄청나게 많다고 생각한다. 언어의 아름다움, 말로 다 못 할 쓸쓸함을 견딜 줄 아는 마음, 이도 저도 결정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멋대로 꼬이기 마련인 심사를 다듬고 정련해 내밀 줄 아는 인내심 등 나열하려면 끝도 없지만, 아름다운 자연, 그중에서도 땅, 땅 위에 나서 살고 죽는 모든 존재를 바라보는 깊이 있는 시선이 가장 귀하다.
김소월의 시는 ‘땅을 보세요, 땅을 사랑하세요. 자연을 아끼세요.’라고 말하지 않는다. ‘여기 이렇게 아름다운 게 있어요, 당신 곁에도 있어요. 당신이 이미 아는 거지만 모를 거예요. 신기하죠.’라고 말한다. 대관절 저게 뭐라고 당신은 그렇게 눈앞의 모든 것을 아름다워하는가 싶어 함께 시선을 맞추게 된달까. 그의 시선이 가는 대로 비슷하게 흉내라도 내다보면 잡풀 무성한 언덕의 아름다움도 있고 누군가 열심히 가꾼 밭고 논의 아름다움도 있다. 사실 어디로 보나 대단할 것 없는 심상한 풍경이라 뭐 별건가 싶지만, 지나고 보면 누가 손댄 줄도 모르고 언제까지나 기억나는 것은 누가 손댄 줄도 모르고 저절로 존재하듯 있는 자연이다. 김소월이 시로 남긴 흙냄새, 풀냄새를 맡고 있자면, 외우고 있자면, 모르고 지나쳤던 길가의 꽃과 흙과 돌, 물이 새로 보인다. 내게 주어진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웠나 싶다.“그립다/말을 할까/하니 그리워”(‘가는 길’ 부분)라는 구절처럼 비로소 말을 하니, 말할까 말까 망설여 보니, 돌이켜 보이고, 다시 알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그가 시로 붙들어 둔 풍광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세상의 것이 아닌 것 같은 고적함마저 느껴지면서 이건 내가 절대로 모르는 자연이다 싶다. 혹자는 그것이 표백된 자연이라거나 낭만화된 자연이라고 말하기도 할 것이다. 이를테면,“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쟈,/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빛,/뒷문 밖에는 갈닙의 노래/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쟈.”(‘엄마야 누나야’)는 석양만 존재하는 곳에서 같이 살자고 말하는 것처럼 들리고, 불가능을 꿈꾸는 간절함 앞에 나는 슬퍼진다. 생명력 넘치는 자연이라든가 한없이 품어주는 자애로운 땅이라든가 하는 것을 기대한다면 조금 실망할 수도 있다. 김소월은 그냥 자신이 본 대로 보여준다. “산에는 꽃 피네/꽃이 피네/갈봄 녀름 업시/꽃이 피네”(‘산유화’ 부분)라고. 우리에게는 보이는 대로 바라볼 땅도 필요하다. 눈치채기 전에 속속들이 스며들어 피와 살이 되고 마는 자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