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eg’s choice

책이 선택한 책

April, 2020

모든 것을 멈추고, 계피롤빵을 만들자

Editor.허재인

『풋내기들』
레이먼드 카버 지음
문학동네

“그녀는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초콜릿 케이크를 주문했다.” 레이먼드 카버의 『풋내기들』의 단편소설 중 한 작품인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의 초입 부분이다. 그 위에는 우주선과 발사대가 그려져 있고, 빨간 행성과 별 모양의 하얀 크림으로 가득한, 상상하기만 해도 눈이 찡긋해지는, 겉면을 버터크림으로 다 덮어버린 직사각형 모양의 널찍한 케이크다. 이만큼만 봐도 한국 엄마는 아닐 확률이 높다. 요즘엔 주문 제작이 늘었다지만, 적어도 필자의 경험을 토대로 한국의 어머니들을 봤을 때, 그들은 어젯밤 재워 둔 갈비의 간이 잘 되었는지가 더 중요하신 분들이다.
이 소설을 읽다 잠시 눈을 감고 직사각형의 우주 케이크를 떠올려봤다. 여자 주인공이 주문한 케이크의 모서리 부분을 백설기처럼 잘라 오목한 종이 접시에 담고는, 버터크림이 몰려 있는 모서리 부분부터 움푹 파서 한입 가득 넣는 것을. 아- 행복하다. 미끄럽게 넘어지는 버터크림의 유분이 천천히 침과 섞이면서, 버터의 향이 코로 올라온다.
입 안아, 노력할 거 하나 없다. 그저 세네 번 부드럽게 굴려주면 알아서 네 밑의 목구멍은 힘차게 밑으로 내리는 운동을 할 것이고, 곧이어 침이 고이며, 식도를 타고 내려갈 때 붙잡은 버터의 향기가 점점 너의 뇌를 고장 내, 손쓸 새도 없이 아까보다 더 큰 조각을 만들라고 이미 지시를 내렸을 거야.
그래서 언제 케이크를 먹는다고? 나는 소설 속 초등학생 아들만큼 그 케이크를 기다렸다. 분명 빵집 주인이 월요일까지 오라고 했으니, 월요일 9시에 가면 되겠지? 아니 그러고 보니, 정확히 몇 시까지 오라고 했는지 왜 안 알려 주는 거야. 작가가 너무하네. 이런 디테일을 까먹다니. 아- 뭐야. 어? 왜 아들이 갑자기 차에 치이는 거지? 아놔. 카버 진짜. 뭐야. 왜 병원으로 가. 의식불명? 뭐야. 죽었어? (책 바닥으로 던짐)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워낙 흥분하며 버터케이크의 출현을 기다린 나로서는, 정 하나 붙지 않은 아들의 죽음보다도, 우주 모양 케이크가 나오고, 조촐히 노란 전등 밑에서 촛불을 꽂고는 생일 노래를 부르고, 엄마는 플라스틱 케이크 칼을 잡고 누가 모서리 부분을 먹을 것인지, 누구 먼저 줄 것인지, 케이크의 단면은 어떤지, 또 맛은 어땠는지, 남은 케이크는 이웃 중에 누구에게 나눠줄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가 앞으로 없을 것이라는 데에 화가 났다. 본 적도 없는 카버가 담배 연기를 후 내뱉으며, 내 입에 있는 케이크를 다 긁어내고, 접시에 있는 것까지다 뺏어 간 기분이었다.
대리만족이라도 해야 했다. 나는 핸드폰으로 배달 앱을 켰다. 버터케이크를 검색했다. 정확하게 직사각형 모양의 생일케이크는 없었지만, 버터크림을 올린 컵케이크 정도는 있었다. 아쉽지만 뭐라도 입에 넣어야 했다. 나는 크림치즈 아이싱을 올린 초콜릿 맛 케이크를 골랐다. 제발 하루 정도 지난 미국 마트 케이크 특유의 꾸덕꾸덕하면서도 인위적인 설탕의 단내가 케이크 상자를 뚫고 나오는 느낌이길 바랐다. 제발 파티시에가 조금은 게으른 스타일의 후덕한 외국계 아저씨이길 빌면서, 나는 케이크를 입에 넣었다. 으윽. 부드러워. 아이싱에 뭔 짓을 한 거지. 설탕 알갱이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아. 명문 조리학과를 나온 느낌. 이렇게 섬세한 아이싱은 처음이야. 초코빵은 설탕보다는 초콜릿 본연의 달콤쌉쌀한 맛을 끌어올렸군. 소금을 좀 넣어서, 감칠맛의 균형을 잡았어. 좋은 케이크야. 하지만 나는 그 완벽한 케이크를 변기에 뱉었다. 이 맛이 아니야. 다시 책을 펼쳤다.
아들은 죽었다. 사고를 당한 날로부터 이틀이 지난 수요일에. 부부는 집으로 돌아갔고, 때마침 전화를 받았다. 빵집 주인의 호통이었다. 아마 집을 비운 며칠 내내 케이크 좀 가져가라고 몇 번이고 전화했을 것이다. 부부는 당장이라도 빵집에 있는 모든 케이크를 엎을 작정으로 주인을 만나러 갔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당당하게 자신들의 기분을 표출할 만한 사정이 있다고 생각했다. 세상에 그 어떤 사정도 아들의 죽음만큼 강한 것은 많지 않다. 부부는 분명 어딘가를 향해 아들의 죽음을 탓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딱히 그럴만한 곳이 없다. 사고나 재해란 것이 그렇다. 백날 하늘을 향해 억울함을 외쳐봐라, 누가 응답이나 해주나.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에 안정을 느낀다. 하지만 부부는 증오할 만한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상태다. 믿을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는, 우연이 만든 처참한 상황 속에서 그들 스스로가 이겨내야 한다. 말이 쉽지. 이겨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사실 나도 저런 상황에서 어떻게 이겨내야 할지 모르겠다. 직접 내뱉은 단어이긴 하지만, 저것밖에 쓸 수 없는 내 필력에 벽에 머리라도 박고 싶을 뿐이다. 차라리 벽에 머리라도 박으면, 벽을 보고 왜 이렇게 딱딱하냐고 노려 볼 수라도 있지. 그들은 분노할 대상도 없지 않나. 어쩌면 좋을까. 언젠간 저런 상황이, 저런 감정이 나에게 온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