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eg’s choice
책이 선택한 책
April, 2020
Have to 말고 Like to
Editor.홍신익
초등학교 5학년, 한동안 컴퓨터로 외국인과 펜팔이 되는 채팅 시스템이 유행했다. 자유로운 대화를 나누기는 어려웠지만, 번역 프로그램의 도움을 받아 소통하는 재미가 있었다. 지금도 제일 기억에 남는 친구는 동갑내기 덴마크 소녀. 낮과 밤이 다른 나라에 살던 우리는 시간 약속도 내일에 대한 기약도 없이 우연에 맡겨진 대화를 나누곤 했다.
희미해진 기억 속에 그 친구의 일상은 내게 꽤나 또렷하게 남아있다. 겨울이 긴 덴마크답게 나와 채팅을 하고 있을 때도 눈이 내린다고 했다. 조금 전에 자전거로 비디오 가게에 다녀왔고, 파이를 만들어 차고 속 아지트에서 가족과 영화를 볼 거라고 했다. 차고 속 아지트라니. 영화에서나 나오는 이야기 같았지만 그들에겐 방학도, 주말도 아닌 그저 평범한 일상이었다. 내가 사는 대한민국에도 눈이 오고, 집 근처 단골 비디오 가게도 있었지만, 다니는 학원 하나 없이 가족과 여유로운 일상을 사는 그 아이가 참 부럽게 느껴졌다. 나중에서야 알았다. 느긋하게 함께 어울리기, 그곳은 ‘휘게hygge’의 나라였다.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는 『오마이뉴스』를 창간한 오연호 대표가 ‘행복’ 분야에서 공증 받은 덴마크를 탐구한 내용을 담고 있다. 저자는 본격적인 이야기를 풀어놓기 전, 프롤로그를 통해 덴마크의 행복사회를 이해하는 여섯 가지 키워드(자유·안정·평등·신뢰·이웃·환경)를 제시한다. 그리고 차례차례 묻는다. 출근길 발걸음이 가볍습니까? 1분 안에 떠오르는 걱정거리가 있습니까? 학교에서 인생을 설계했습니까? 안타깝게도 나는 이 세 가지 물음에 긍정적인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한 가정의 남편이자 아버지, 언론인, 백여 명의 월급을 책임지고 있는 CEO인 저자는 덴마크를 일터, 사회, 학교, 역사로 나누어 행복의 비결을 찾아 나섰다. 코펜하겐 한복판에 있는 대형 레스토랑에서 56세 종업원과의 인터뷰를 시작으로 회사, 병원, 세계적인 장난감 회사 레고Lego 본사 등을 찾았다. 공사립 학교가 사회로 나아갈 학생들에게 어떤 기둥이 되어주는지도 지켜봤다. 그 결과 어디에나, 그리고 누구에게나 행복이 있음을 확인했다.
덴마크인에겐 당장의 성적 상승이나 부의 축적보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가’를 찾는 게 우선이었다. 원하는 일에 대한 충분한 고민과 노력을 정책적으로 허용하니 국가와 국민 사이에 신뢰가 절로 형성됐다. 그 누구도 이렇게 해봐라, 저렇게 해봐라 채근하거나 훈수를 두지 않았다. 스스로 선택하는 가치를 중시 여기고 국가로부터 안정된 삶을 보장받는 덴마크인에게 행복하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개인의 자유만큼이나 자연스러운 공동체 의식 역시 사회를 행복의 길로 나아가게 하는 중요한 문화였다. 이러한 이유들로 책이 발간된 지 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덴마크는 핀란드와 엎치락뒤치락하며 ‘행복지수 1위’ 국가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자유, 안정, 평등, 신뢰, 이웃, 환경.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는 ‘좋은 게 좋은 거지’ 정도로만 느껴지던 이 단어들이 실제로 덴마크인에게 어떻게 스며들어 있는가를 친절하게 보여준다. 덴마크의 정책과 복지, 국민들의 가치관 모두 행복이라는 추상적 개념을 증명할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저자는 덴마크를 ‘불완전한 인간들이 만들어낼 수 있는 최선의 나라 가운데 하나’라고 표현했다.
“행복은 ‘have to(~해야 한다)’에서 나오지 않아요. ‘like to(~를 좋아하다)’에서 나오죠. 의무적으로 뭔가를 해야 하는 것에서가 아니라 스스로 즐거워서 하는 것에서 나옵니다.” 일에 집착하지 마라, 쉬어가도 된다, 당당히 욜로(YOLO) 하라. 늘어진 말과 달리 세상은 내가 나를 찾을 여유를 허용하지 않는다. 느긋해지면 도태되리라는 두려움이 앞선다. 불평등 속에서 안정을 찾지 못한 우리는 이웃을 신뢰하지 못한 채 실체 없는 자유만을 갈망한다. 알 수 없는 가치에 나의 오늘을 걸고, 가치라 여기는 미래를 위해 오늘의 행복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존재의 이유를 찾을 수 있을까.
덴마크의 행복은 하늘과 땅, 물과 불을 가리지 않고 드리운 평등의 마음으로부터 시작했다. 나를 위해 살아야 한다고 하지만 나 혼자서만은 살 수 없는 게 삶이다. 개인은 사회에게, 사회는 개인에게 빚지는 상호적인 존재임을 간과해선 안 된다. ‘빨리빨리’의 역사로 빚어낸 한국을 단번에 ‘휘게’ 할 순 없다. 변화 이전에 불안정한 과도기 역시 피할 수 없다. 정책이 정책을 결정하는 자들의 몫이라면, 우리 역시 각자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저마다의 몫이 있을 거다. 세상으로부터 오는 자잘한 상처들을 해소할 방법만을 찾는 대신 내 시선 안에 ‘우리’를 담는다면, 그 자체로 치유가 될 수도 있다. 나, 그리고 우리를 생각하는 진지한 고민과 애정, 능동적인 태도, 교실에서 배운 것이 사회에서도 통한다는 믿음과 함께.
저자는 행복학을 연구하는 교수를 만나러 가다 자신을 태운 택시 기사와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눈다. 어쩌면 이 책은 그의 말과 미소가 진짜였음을 확인하는 과정이었을지도 모른다. “스스로 좋아하는 일을 해야죠. 그게 돈보다 더 중요합니다. 욕심을 내면 돈을 더 벌 수도 있지만, 돈이 모든 걸 만족시킬 수는 없습니다. 당신이 당신을 행복하게 할 수 있죠. 이건 기본적으로 철학의 문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