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eg’s choice
책이 선택한 책
March, 2020
누가 책을 만드는가
Editor. 장세희
주말이면 한가로이 만화방으로 향한다. 사람들이 제각기 짝지어 다니는 거리를 슬리퍼에 트레이닝복 차림을 안경까지 장착하고 걷노라면 가끔 한숨이 나온다. 예전에는 자유롭기 짝이 없었는데, 왜 요즘은 다른지 모르겠다. 기분 탓이겠지? 사람들이 맨날 물어봅니다. 책으로 먹고살 수 있냐고요. 책이 밥 먹여 주진 않지만 계속 살아가려면 책이 필요해요.
나의 오랜 꿈은 작은 책방을 꾸리는 것이다. 나만의 큐레이션과 취향으로 하나의 문화를 만들어가며 책과 사람,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공간. 사라지지 않고 오랫동안 책방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우선 책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은 독자, 저자, 그리고 글이 책으로 완성되기까지의 과정을 돕는 사람들에 의해 존재한다. 글을 쓰거나 책을 읽는 경험은 익숙했기 때문에 책을 ‘만드는’ 사람에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한 권의 책이 탄생하는 모든 과정을 감독하는 ‘편집자’라는 직업을 발견하였고, 그 직업이 녹록지 않다는 것 또한 알게 되었다.
출판사 편집자는 저임금 장시간 노동이라는 열악한 근무 환경에 시달리고 출판 산업은 여전히 사양 산업이라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당연했다. 계속해서 독서인구와 독서율은 줄고 SNS, 유튜브, 넷플릭스, 다양한 디지털 콘텐츠 플랫폼이 판을 치는 시대에 ‘책’이 웬말인가. 그런데 출판산업의 불황 속에서도 출판사 수는 늘고 있고 <서울국제도서전> <와우북페스티벌> <퍼블리셔스 테이블>과 같은 북페어가 꾸준히 이루어진다. 또한 출판사 혹은 서점이 운영하는 북클럽, 독서모임 플랫폼 트레바리, 책공 등이 생겨나며 독서모임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높아졌다. 월정액 전자책 구독 서비스인 밀리의 서재와 리디북스, 그리고 오디오북 플랫폼 스토리텔 등 시대가 변하는 만큼 다양한 방식으로 책에 접근하는 서비스도 나타났다. 이렇게 사람들은 독서의 중요성을 꽤 알고 있는데도 서점에 가서 구경만 하거나 그 자리에서 다 읽거나 도서관에서 빌리는 등 책을 ‘사서’ 보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책을 사서 읽지 않을까? 책을 산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책은 대체 누가 어떻게 만드는 걸까? 머릿속에서 물음표들이 자꾸 떠올랐다.
『출판하는 마음』은 제목 그대로 한 권의 책이 만들어지기까지 정성을 쏟는 수많은 사람의 마음을 담고 있다. 사람들은 책을 읽을 때 보통 표지에 나와 있는 저자와 출판사만 확인하고 맨 뒤에 있는 판권 면에 숨겨진 사람들은 그냥 지나치기 일쑤다. 『글쓰기의 최전선』 『쓰기의 말들』의 작가 은유는 저자, 번역가뿐만 아니라 편집자, 디자이너, 제작자, 마케터, 온라인 서점 MD, 서점인, 1인 출판사 대표를 직접 만나 출판 노동에 대한 그들의 솔직한 이야기를 기록했다. 적게는 3년, 많게는 20년의 경력을 가진 다양한 출판인들의 삶을 담은 실용 정보서와 르포르타주 사이의 책이며, 기획, 집필, 번역, 편집, 디자인, 제휴 맺을 정도로 뛰어난 리더쉽을 보여주며 나름의 방식으로 이세계를 살아가는 이야기다. 보통 리무르처럼 강한 캐릭터가 등장하면 마왕으로부터 세계를 구하는 용사가 되는 플롯인데, 어째 이 작품은 좀 다르다. 마물인 슬라임을 주인공으로 삼아 다른 마물들과 함께 살아가는 설정이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들만의 세계를 구축해 내는 과정은 볼거리가 쏠쏠하다. 반면 『원펀맨』은 ‘S급 히어로’들도 버거운 괴인을 주먹 한 방으로 해결하는 사이타마가 히어로 협회에 들어가‘C급’이라는 바닥 등급부터 시작해 괴인을 쓰러트리면서 서서히 등급을 높여가는 단순한 이야기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정치적 움직임이나 조직 구성원 간 서열과 파벌 다툼을 발견할 수 있고, 이유 없이 ‘괴인’을 멸시하는 인간의 바닥도 엿볼 수 있다. 더 이상 성장물은 지겹다. 요즘 같은 시대에 일하랴, 운동하랴, 취미생활 하랴 바빠 죽겠는데 주인공 성장하는 것까지 기다려주기 숨 막힌다. 그냥 처음부터 미친 듯이 센 주인공이 나와서 다 때려 부수는 사이다가 대세다. 예의 없는 직장상사에게, 제 잘난 맛에 사는 친구에게, 대중교통 치한에게, 눈꼴신 커플(?)에게 ‘원 펀치’ 못 날리는 현실 대신 가상에서라도 시원하게 날려줄 사람이 필요하다. 시작부터 ‘만렙’인 주인공이.작, 마케팅 순서로 구성하여 책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차례로 보여준다. 각 챕터 끝에 ‘~가 되고 싶은 이들에게 건네는 ~의 마음’이라는 코너에서 각 출판인들이 관련 직무에 대해 세심하고 사려 깊은 팁도 전해준다. 이 책은 어떤 글이 책으로 완성되어 독자의 손에 들어갈 수 있도록 애쓴 사람들의 이름과 노동을 기억하게 하고, 책을 구매하는 행위가 어떤 의미인지 일깨운다. 직접 씨앗을 뿌려 작물을 재배하고 요리하여 음식을 먹으면 그 보람과 기쁨이 남다른 것처럼 한 권의 책이 어디서 시작되어 어떤 과정을 거쳐 독자에게 닿는지 책 속에 압축된 노동을 하나하나 느낄 수 있게 한다. 책을 읽다 보면 부단한 협동의 결과물인 책을 여태까지 쉽고 편리하게 취하려고만 했던 건 아닌지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 책을 살때 가성비와 효율성을 따지기보다 내가 왜 이곳에서 이런 방법으로 책을 사려 하는지, 내 구매행위가 어떤 영향을 가져올지 생각해본다면 이게 바로 출판하는 마음을 이해하고 존중하려는 첫걸음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의 첫 장은 “책은 다른 이의 몸 안에서만 박동하는 심장이다”(리베카 솔닛, 『멀고도 가까운』)라는 인용구로 시작한다. 책은 누군가에게 읽힐 때만 의미를 지닌다는 뜻이다. 아무리 좋은 글이라도 글로만 존재한다면 독자는 그 존재를 알아보기 어렵다. 또한 좋은 책을 출간해도 독자가 읽어주지 않는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 책이 사람들의 몸속에서 박동하는 심장이 되려면 일단 책을 많이 만져보아야 한다. 책과 접촉을 늘리면서 점점 친밀한 사이가 되어 책이 건네는 목소리를 알아듣는 순간 ‘독서의 맛이 이런 거였구나’ 하는 짜릿함을 더 많은 사람이 느꼈으면 한다. 나는 여전히 종이책의 물성과 감성을 좋아한다. 수많은 사람의 고민과 시도와 수정을 거쳐 탄생한 정성의 완전체를 눈으로, 손으로 똑똑히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들 출판 산업이 미래가 깜깜하고 열악한 환경이라고 말하지만 어느 분야든 쉬운 길은 없다. 어떻게든 책과 함께 먹고살려고 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출판계에서 버텨야 할 운명인 건가 보다.
“웬만한 책은 반드시 구입해서 만져요. 돈? 많이들죠. (웃음) 근데 안 만진 사람은 모르는 거거든요. 일단 제 돈을 들여 사본 사람만이 아는 거거든요. 기다 아니다 판단하려면 반드시 사서 손에 쥐어 봐야 해요. 책에 있어서 전 감보다는 손을 우위에 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