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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mber, 2019

금지임에도 소망하는 이유

Editor. 김선주

한국소설을 좋아합니다.
씀, 읽음, 생각함, 이야기함 모두 곁에서 태어나 함께 자란 고민과 마음, 행동과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일종의 ‘느린’ 매체를 구독하는 느낌이랄까요? 가끔 예전 책을 뒤적이고 자주 요즘 책을 들고 오겠습니다!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양귀자 지음
쓰다

“삶이란 신이 인간에게 내린 절망의 텍스트다. 그러나 나는 이 텍스트 자체를 거부한다. 나는 텍스트 다음에 있었고 모든 인간은 텍스트 이전에 있었다. 나는 건설한다. 이것이 당신들의 비굴한 굴복과 내 태도가 다른 점이며 절망의 텍스트는 그러므로 당신들의 것이다.”
썩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문학은 역사적으로 공고한 어떤 문제를 계속해서 발견해내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과거에도 발견되었던 그 문제적 양상은 다시 얼마간 새롭게 소환함에도 대부분 본질까지 단번에 바꾸어 놓는 데까지 나아가기 힘들다. 번번이 아귀에서 빠져나가듯 교묘히 놓아줄 수밖에 없는 무력감은 일반적이다. 다시 다른 문제를 건드리거나 돋보이게 하는 외연으로 기능하기도 한다. 이쯤 되어 손쉽게 들먹일 수 있는 게 본래의 문제 제기에서 한 발 뺀 메타적 테제다. 어찌할 수 없는 게 인간 본성인가, 사회인가. 그렇다면 또다시 고민이 늘어난다. 인간이 구제 불능인가, 문학이 실용 불능인가. 그러나 그럼에도 시대를 거듭하며 어루만지는 각기 다른 표정들로 소설은 선명한 하나의 얼굴을 그리고자 노력한다. 이를테면 문학이 도달하고자 하는 얼굴은 연역적 대상이지만, 각기 다른 ‘표정’을 어루만지며 취하는 방식은 귀납적이다. 문제는 바뀌지 않았으니(여전하니), 변하는 것은 방식이다. 바꿔 말해 소설 내에서 작가가 준비하는 무대와 인물이 수행해야 할 역할이나 기능 같은 것들이다.
우리 속담에는 북어와 같은 급수를 굳이 여자라는 성(性)에 한정 짓고 있습니다만, 사흘에 한 번은 두들겨 패야 다소곳하다는 점에서는 남자도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저는 이번 기회에 확인하였답니다.
젊은 지식인 여성이 인기 남자배우를 납치하여 감금하고 조종하는 시도를 보이는 양귀자의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은 나오자마자 페미니즘 논란과 화제의 중심에 오르며 초판 출간된 1992년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된 소설이다. 스릴러를 방불케 하는 줄거리와 주인공 강민주의 거침없고 대담한 행보는 그야말로 파격적이다. 그러나 화제에는 물론 베스트셀러에 오를 정도로 지지를 받고 시의성을 인정받은 것은 소설 내 주인공인 강민주의 논리정연한 사고와 언변이 당시 남성주의적 성차별이 만연한 우리 사회의 폐부를 깊숙이 찔렀기 때문이다. 그가 납치하는 것은 부패한 정치인도 기업가도 아니고 멀끔한 외모에 아내와 아이에 충실한 30대 중반 배우 백승하다. 오히려 남자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리게 하고 단지 자신의 운명이 남자를 잘못 골랐기 때문이라는 환상을 심어주는 백승하를 굴복·변화시켜 여성과 남성 모두, 그리고 사회에 사금파리 같은 균열을 내리라는 것이 지식인 강민주의 생각이다. 그리고 이는 당시로부터 27년이 흐른 지금 내 눈에도 충분히 유효해 보인다.
현실에는 없지만, 소설에서는, 소설이므로, 강민주 정도는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작가의 말
그러나 소설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이 취하는 방식은 ‘공격적’이라는 세간의 평처럼 ‘비현실적’이다. 얼개가 엉성하거나 실소를 자아낸다는 게 아니다. 이는 분명 현실에 없고 없을 가능성이 높은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현실에 없는 것으로 문제를 돌파할 궁리를 함에도 심지어 일리 있는 방식이다. 소설에 기대 비유하자면 ‘금지’된 것을 소망해야 하는 절박한 표정을 떠올리게 한다. 아니, 실은 그렇게 꼭 없으리라 단정할 정도의 일도 아니지만, 현실에서 일상을 사는 군중으로서 만나긴 여러모로 어려운 장면이다.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이 소설로서 주는 충격spectacle이 주는 긍정성이다. 스포일러 방지를 위해 자세히 언급할 순 없지만, 그 과정과 결말에서 단지 성(性)의 대결이나 환상적이고 말초적인 쾌락catharsis을 좇기보다 오히려 더욱 극적이고 현실적으로 “가슴 더운 인간의 길”을 그린다는 점에서 작가가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로써 꺼내드는 문학적 표정은 선명히 마음을 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