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eg’s choice
책이 선택한 책
January, 2022
n번째 최초의 만화
글.김민섭
작가, 북크루 대표. 책을 쓰고, 만들고, 사람을 연결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아트 슈피겔만의 『쥐』는 내가 본 최초의 만화라고 해도 될 만한 책이다. 중학생이던 때 아버지의 서재에서 발견한 이 책을 읽고 있으려니까 아버지는 나에게 정말 좋은 책이니 가져가서 읽으라고 했다. 퓰리처상을 받은 만화라는 말까지 덧붙이면서, 아예 학교에 가져가서 보라고 주는 것이었다. 그 시절 내게 ‘아버지가 공인한 만화책’이라는 건 큰 의미가 있었다. 나름의 사명감까지 더해진 나는, 그렇게 이 만화책과 진심으로 만났다.
『쥐』는 독특한 기법으로 그려낸 아우슈비츠에 대한 기록이다. 아트 슈피겔만은 자신의 아버지 블라덱 슈피겔만을 인터뷰하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유대인으로서 그의 삶을 섬세하게 담아냈다. 작가는 개인뿐 아니라 그와 자신을 감싼 시대까지 시선에 두고 있다. 그래서인지 나는 이 책을 세 번에 걸쳐 읽어냈다. 십대 시절에는 블라덱이 생존을 위해 했던 모든 행동이 흥미로웠으나 전후에 달라진 그의 삶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고, 이십대 후반에는 수용소의 블라덱과 대학원생인 내가 겹쳐 보여서 슬펐고, 삼십대 후반인 지금에 이르러서야 블라덱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말하자면, 기승전결의 서사를 즐기기만 하다가, 개인의 투쟁 서사에 집중하고, 비로소 개인과 시대의 서사를 이해하게 된 듯하다.
내가 블라덱을 두 번째로 떠올렸던 때를 명확히 기억한다. 블라덱은 조금 더 나은 대우를 받기 위해 구두 수선을 할 수 있다고 거짓말을 하고 구두 수선공으로 일한다. 그는 선배에게 구두 수선하는 법을 배워가지만, 자신이 할 수 없는 수선이 들어오면 그것을 들고 진짜 제화공에게 가서 하루치의 빵을 주고 그것을 수선한다. 이것이 그가 생존하는 방법이다. 대학원생 시절, 나도 교수의 컴퓨터를 고쳐야 했던 적이 있었다. 혼자서 제대로 고칠 수 없어서 컴퓨터 전문점에 내 돈을 주고 맡겼다가 내가 고쳤노라고 그것을 들고 갔다. 이 일을 계기로 블라덱이 마음으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전쟁이 끝난 뒤 어느 날 블라덱은 아들 부부와 함께 쇼핑센터에서 나오다가 한 흑인에게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한다. 단지 도움을 요청하며 자신들의 차 가까이 다가온 그 사람에게 블라덱은 부적절하게 행동하고, 아들이 기꺼이 그를 차에 태우는 것에 불만을 표한다. 자신이 미국에 있을 때 흑인들이 많은 절도를 저질렀기 때문이라면서. 아트 슈피겔만의 아내는 수용소 생활을 거친 그가 그런 인종차별주의자가 되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나도 처음에는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중에서야 이것이 가장 중요한 장면이었음을 알았다. 아트 슈피겔만은 한 전쟁이 파괴하는 것이 결국 개인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한 시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와 관련된 모든 개인들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보여준다.
『쥐』를 두고 ‘나의 최초의 만화’라고 한 것은, 실제로 어린 시절에 읽기도 했지만 몇 번이나 다시 읽힐 순간들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나도 전쟁을 겪은 이전 세대를 이해할 수 없는 순간이참 많다. 미군을 따라다니며 초콜릿을 얻어먹었다든가, 카스텔라의 포장지를 껌처럼 씹고 다녔다든가, 웨하스나 바나나가 정말 귀한 음식이었다든가 하는 말을 아버지는 자주 했고, 근검과 절약의 태도가 그의 삶 여기저기에 묻어 있었다. 한국전쟁이든 세계대전이든, 모든 형태의 폭력은 한 개인을 파괴하고 다음 세대와의 단절이나 혐오 같은 것으로 이어지며, 도래할 시대까지도 무참히 파괴해 버린다. 이제는 나도 전쟁이 어떤 것인지 약간은 안다.
만화이든 어떤 장르이든 이처럼 한 작품이 두고두고 의미를 주는 건 기쁜 일이다. 그만큼 내가 작가와 주인공들이 이미가 있는 어느 지점까지 성장해 가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나의 네 번째 최초의 만화가 될 수 있을까. 그렇게 되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