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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h, 2017
흔적은 사라져도 무늬는 남는 일
Editor. 이수진
근사한 문장이 나오면 저도 모르게 주섬주섬 적기 시작한다.
가장 오래도록 좋아하고 있는 문장은 몽테뉴의 말.
그것은 바로 “나의 일과, 기술 그것은 살아가는 일이다.” 라는 말.
자라면서 드문드문 들었던 말 중 하나는 ‘너 자신이 되라’는 말이었다. 그 말을 접할 때면 직감적으로는 ‘그렇지’ 수긍을 하면서도 정확히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나 자신이 아니란 소린가 싶기도 했다. 내게 누구도 그 말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해주지 않았지만 아마도 다른 누구에게도 쉽게 영향 받지 않는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존재가 되라는 말이겠거니 생각한다. 그 의미에 동의하고 그렇게 살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때로는 왜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지 헷갈릴 때가 있다. 왜 우리는 다들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존재가 되어야만 하는 걸까. 세상이 만만치 않다는 소리를 그렇게 이야기하는 걸까, 문득 궁금하기도 했다.
최은영 작가의 『쇼코의 미소』에는 자율적이고 독립적이어서 맺고 끊음이 정확한 사람들보다는 내 곁에 있는 누군가에게 오래도록 열등감을 느끼고 과거의 상처 때문에 누군가에게 다가서길 머뭇거리거나, 떠난 이를 잊지 못해 꽤 오래도록 슬퍼하는 사람들이 나온다. 누구에게도 절대적인 영향을 받는 것을 거부하는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모습과 사뭇 다른 인물들이랄까. 그들은 오히려 옆에 있는 이들에게 놀라울 정도로 영향을 받는다. 청춘의 가장 강렬한 순간이 상대와 얽혀있고 그 만남 이후에는 ‘틀림없이 이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겠구나’ 예측하게 되는 변화의 물꼬를 보이기도 한다. 곁에 있는 사람 때문에 자신의 특별함을 발견하기도 하고 뿌연 시야에 가려져 있던 내밀한 상처를 끄집어내 보듬기도 한다.
서로가 서로를 비추는 일은 관계가 얽힐 때 가장 먼저 드러나는 효과다. 그래서 사람들은 서로를 싫어하기도 하고 좋아하기도 한다. 알 수 없는 열등감을 느끼기도 하고 은근히 무시하기도 한다. 상대라는 거울에 비춘 나 자신을 보기 때문이다.
모든 관계가 나 자신의 열등한 점만 비추거나 우월한 점만 비춘다면 그것만큼 또 괴롭고 불행한 일은 없을 거다. 그러나 그런 관계는 드물다. 우리는 살아가며 한 번쯤 혹은 여러 번 우월감과 열등감으로 뿌옇게 된 시야를 환히 밝히는 관계를 만나게 된다. 만나기 전에는 뿌연 줄도 몰랐겠지만. 그런 만남은 성별과 인종, 나이를 초월하여 연인으로 혹은 친구나 선배, 가족이나 이웃 등으로 다가온다. 『쇼코의 미소』에 등장한 소유와 쇼코, 한지와 영주, 순애 언니, 미진과 소은, 미카엘라, 말자와 지민, 응웬 아줌마가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서로의 뿌연 마음을 상상하고 또 상상하며 슬며시 먼지를 닦아주는 사람들 말이다. 그래서 계산이 빠른 이들에게 이용당하지 않을까 조마조마한 사람들이기도 하다.
사람이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근사한 선물 중 하나는 타인의 이면을 상상해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 왜 그런 말을 내뱉은 걸까, 상대의 사정을, 상황을, 과거를 생각해보는 일. 어쩌면 지레짐작이라는 늪에 빠질 가능성을 우려할 수도 있겠지만, 계산을 모르는 마음 씀씀이라면 상대를 몰아세우기보다는 결국 보듬는 쪽으로 향할 수밖에 없다. 『쇼코의 미소』에 나오는 인물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이용당하지 않을까 위태로워 보이던 이들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누군가의 존재에 환한 빛이라는 강렬한 무늬를 남긴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흔적은 옅어지겠지만 그럴수록 그 무늬는 또렷해진다. 계산 없이 쏟아낸 군더더기 없는 마음이 지닌 힘일 것이다.
“사랑받고 싶은 마음, 누군가와 깊이 결합하여 분리되고 싶지 않은 마음, 잊고 싶은 마음, 잊고 싶지 않은 마음, 잊히고 싶은 마음, 잊히고 싶지 않은 마음, 온전히 이해 받으면서도 해부되고 싶지 않은 마음, 상처받고 싶지 않은 마음, 상처받아도 사랑하고 싶은 마음, 무엇보다도 한지를 보고 싶다는 마음을.”
“시간이 지나고 하나의 관계가 끝날 때마다 나는 누가 떠나는 쪽이고 누가 남겨지는 쪽인지 생각했다. 어떤 경우 나는 떠났고, 어떤 경우 남겨졌지만 정말 소중한 관계가 부서졌을 때는 누가 떠나고 누가 남겨지는 쪽인지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