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캠프를 떠나기 전날 밤. 옷가지와 세면도구를 챙기며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부모님과 떨어져 며칠 밤을 지내야 한다는 사실에 긴장과 흥분이 묘하게 섞여 들었다. 막상 캠프에 도착하니 프로그램에 맞춰 생활하느라 집 생각날 겨를이 없는 듯하다가, 뜨겁게 내리쬐던 볕의 열기와 습기가 식어갈수록 왠지 모를 그리움이 밀려오면서 어김없이 엄마 생각이 났다. 그럴때면 타닥타닥 타오르는 모닥불 주변에 앉아 발밑의 고운 모래를 만지작대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시원한 밤바람에 고개를 들면 까만 하늘에 마치 설탕을 흩뿌린 듯 셀 수 없이 많은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여름이 가까워지는 이맘때면 꼭 머릿속을 스치는 내 어린 날의 그리운 추억이다.
마법 같은 시간
할머니! 여름 캠프에 와서 할머니께 편지를 써요. 전 태어나서 처음으로 혼자 기차를 탔어요. 어른처럼요!
편지의 첫 몇 줄만 읽어도 주인공 알리스에게 여름 캠프가 대단히 신나는 사건임을 짐작할 수 있다. 손녀의 들뜬 마음이 그대로 전해지는 편지를 읽는 할머니의 얼굴에는 분명 환한 미소가 떠올랐을 것이다. 기차와 비행기를 타고 떠나는 나 홀로 여행, 더군다나 첫 여행이라면 그 느낌과 기억은 더욱 특별하게 다가온다. 지나치는 풍경 하나하나 놓치지 않으려는 듯 눈을 반짝이고, 헤드폰을 타고 흐르는 음악에 맞춰 가볍게 두 다리를 흔드는 알리스의 모습에서 난생처음 혼자 멀리 떠나본 아이의 설렘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캠프에 계시는 마르틴 선생님이 아이들을 마중 나왔어요. 선생님은 무척 크고, 아주 친절했어요!
기차에서 내려 마중 나온 선생님을 만났을 때 우리는 모두 알리스의 여름 캠프가 평범하지 않을 것이라고 직감하게 된다. 나중에 도착한 다른 아이들도 어딘가 비범해 보이며, 야영 장소인 ‘별의 호숫가’역시 신비로운 분위기를 내뿜는다. 하늘에는 용인지 여우인지 모를 동물이 날아다니고, 그 동물이 호수 위를 떠다니는 배가 되기도 하는, 이토록 이상하고 아름다운 곳에서 보내는 여름이라니! 어느 것 하나 설레지 않는 게 없다.
하늘의 달과 별이 내려앉은 호수를 바라보며 알리스는 평소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해주고, 또 자기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가장 잘 들어주는 사람인 할머니가 떠올랐던 모양이다. 기쁜 소식을 자랑하고 싶은 대상이 어째서 엄마가 아니고 할머니일까, 하는 궁금증은 마침내 알리스의 편지를 받은 할머니가 등장하자마자 싹 해소된다.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다채롭게 펼쳐지는 이야기에 더위는 잠시 잊게 될 테니, 기대해도 좋다.
짙고 푸른 판타지
마틸드 퐁세Mathilde Poncet는 프랑스 동부와 스위스 접경 지역인 쥐라Jura의 호숫가 근처에 살면서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고 있다. 『와! 여름 캠프다』는 퐁세가 직접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 첫 작품이다. 이번 삽화 작업에서 그는 크레용과 파스텔, 물감을 레이어링하는 목판화 기법을 사용했다. 다른 질감의 색들이 중첩되어 구성된 이미지들은 더욱 강렬하고 신비로운 느낌을 강조하는데, 특히 호수와 하늘의 정경을 마치 판타지물의 한 장면처럼 환상적인 색감으로 구현했다. 전래동화, 동물과 산, 물과 하늘을 영감의 원천으로 꼽는 작가는 자신이 살고 있는 쥐라 지역의 모습을 책 속에 녹여냈다. 맑은 호수, 웅장한 성, 우거진 숲, 나무 위의 집 등 알리스가 캠프에서 사귄 친구들과 함께 보내는 장소들은 실제 쥐라 지역의 풍경과 겹쳐진다.
밤에는 레크리에이션과 캠프파이어를 해요.전 모닥불 곁에 둘러앉아 밤 늦게까지 이야기할 때가 참 좋아요!
책에는 C.S.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나 J.K. 롤링의 ‘해리포터’ 연작, 『신비한 동물 사전』 같은 판타지 소설의 등장인물 못지않은 흥미로운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신예 작가의 그림책을 이들 명작에 비견하는 것이 비약이라 여기는 이도 있겠다. 하지만 초현실적인 시공간에서 벌어지는 것만 같은 흥미진진하고 몽환적인 여름 캠프의 분위기는 마치 야수파와 표현주의 작가들의 작품처럼 거칠고 역동적인 색채로 묘사된다. 자꾸만 책장을 들춰보도록 만드는 이 책의 매력이다.
자랑하고 싶은 여름
여름마다 아이는 아빠와 수영장에서 주말을 보내곤 했다. 큰 수건과 가방, 물안경에 오리발까지 가방 한가득 챙겨 나가면 저녁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아 나는 한가로운 주말을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팬데믹이 덮친 후, 최근 두 번의 여름이 지나는 동안 아이는 수영장에 가지 못했다. 물놀이를 그리워하는 아이를 위해 서핑을 몇 번 다녀왔지만, 물에서도 마스크를 써야 한다는 게 안타깝고 미안하기만 했다. 그래서인지 『와! 여름 캠프다』는 여름다운 여름을 다시금 꿈꾸게 하는 선물 같았다. ‘호수에서 수영을 하고 나와 앉은 섬들은 어떤 목소리로 무슨 말을 걸어올까’ ‘팔딱팔딱 뛰는 개구리 버스의 승차감은 어떨까’ 등 기분 좋은 상상들이 가득하고, ‘뱅글뱅글 돌아가는 안경을 쓴 가이드’ ‘코트에 머플러를 두른 친구들’ ‘용의 꼬리처럼 구불구불한 기찻길’ 등 독특하고 엉뚱한 설정이 끊이지 않은 덕에 킥킥대는 아이의 웃음은 쉬이 잦아들지 않았다. 숲속을 거닐고, 그곳의 신선한 공기를 마스크 없이 온전히 느껴보며, 차가운 호수에 풍덩 뛰어들고 무거운 통나무를 함께 들어 옮기는 그 모든 일들이 더 이상 책에서만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올여름엔 우리 아이들 모두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친구를 사귀며 꿈 같은 시간을 보낼 수 있기를. 캠프에서 쓴 첫 편지의 대상이 엄마라면 더할 나위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