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정체성, 지킬 것인가 말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역사는 실생활에서, 또 미래의 방향을 제시하는 좋은 길잡이다. 시간과 공간 안에서 무수한 만남과 흩어짐을 반복한 과학과 문화, 미술과 음악, 수학 등 모든 분야의 기술과 사상들의 총집합이 바로 역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는 그저 과거 다른 사람들의 먼 이야기가 아닌 우리의 지금 모습을 탄생시킨 모태이며 우리 모두가 복잡하게 얽힌 관계 속의 각각의 구성원임을 느끼게 해 주는 감동의 서사시다. 문화는 어떤 장소와 시간을 넘어 어떻게 변화하며 우리 앞에 도달했을까? 그리고 혼혈하는 이 지구라는 행성에 다가올 문화의 미래는 과연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우리 문화의 현주소는 무엇일까? 과거에는 시대마다 그 시기를 대표하는 문화가 있었고 나라마다 서로 다른 색이 있었다. 그렇다면 현대는 어떠한가? 강한 개체만이 생존해 끝없는 변화를 거친다는 진화론에 입각한 적자생존의 법칙은 문화라 할지라도 거스를 수는 없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다양한 문화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는 지켜가야 할 전통과 새로 생성되는 문화, 우리의 것과 다른 이의 것 사이에서 적잖은 의견 대립을 겪는다.
프랑스 파리의 케브랑리(Quai Branly) 국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구슬 장식에 싸인 라디오(1940년, 남아프리카공화국)는 혼혈하는 세계 문화의 한 모습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미국의 발명품인 라디오는 20세기 초 전 세계로 보급됐다. 당시 전 세계에 흩어져 유행하던 다양한 장르의 음악이 라디오라는 작은 미디어를 통해 서로 만나게 됐고, 세계인의 귓가로 전해졌다. 특히 아메리카 대륙으로부터 흘러온 라틴음악과 재즈는 세계 곳곳에서 현지 문화와 접목이 되며 새로운 성격의 음악들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이후 라디오는 영국인들과 함께 남아공에 도착, 줄루(Zulu) 족의 화려한 색상과 문양으로 어우러진 구슬 장식품과 만났다. 미국인에 의해 발명된 라디오, 수많은 나라의 다양한 음악을 내뿜으며 음악의 장르를 혼합시키고 먼 곳까지 소식들을 전하던 라디오, 영국인에 의해 아프리카에 전해진 라디오, 아프리카인들에 의해 신성시 여김을 받고 장식된 라디오. 여기서 무엇이 자신의 것이고 또 무엇이 타인의 것인지를 논하는 일은 그리 큰 의미를 발휘하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