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ic : 이달의 화제

호모 센티멘탈리스들의 사회

에디터 : 김수미, 노은혜, 김신식

밀란 쿤데라는 『불멸』에서 현대인을 통찰하며 “감정을 가치로 정립한 사람”을 ‘호모 센티멘탈리스’라고 명명했다. 감정을 숭상하는 사회에서 우리의 다양한 감정 안에는 위계가 세워지고, 그로 인해 개인의 능력과 가치가 평가된다. 그 안에서 우리는 더 이상 내 마음속 일들이 어떤 의미인지를 자문하지 않는다. 이 감정이 가치 있는지 외부에서 답을 구하고, 타인의 시선에 맞춰 감정을 억누르고, 내면이 어서 유용한 감정들로만 채워지기만을 바랄 뿐이다. 결국 ‘나’와 ‘내 마음’사이가 차츰 멀어졌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과 타인의 감정을 읽기 어려워진 게 아닐까? 그 거리를 다시금 좁히려는 질문과 분투를 이달의 토픽에서 만나보자.
1-불안과 슬픔의 역습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는 인간의 생산부터 폐기까지 철저하게 지배·관리되는 사회 속에서 외로움도, 슬픔도 느끼지 않는 미래 인류가 등장한다. 이곳에서는 ‘소마’라는 알약만 삼키면 나쁜 기분이나 고통스러운 감정은 깨끗하게 지워내고 순식간에 쾌락으로 충만해질 수 있다. 그러나 누구나 행복한 이 유토피아는 들여다볼수록 꺼림칙하다. 김초엽의 단편 소설 「감정의 물성」에서 감정은 돌멩이처럼 만질 수 있는 제품으로 출시된다. 그런데 소설 속에서 ‘우울’이나 ‘공포’ 등의 인기는 ‘침착함’이나 ‘행복’ 못지않다.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는 『데미안』 『수레바퀴 아래서』 등 을 통해 성장의 순간에 겪는 혼란과 고통을 예리하게 포착해내며 명실상부 최고의 ‘성장 소설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그의 초기작들은 청춘의 서사와 자연 풍경에 대한 묘사가 함께 다루어지는데, 그가 나고 자란 독일 남부 슈바벤Schuwaben 지방의 칼브Calw가 울창한 숲과, 작은 계곡 등 유려한 자연경관을 보유했던 영향으로 짐작된다. 헤세의 초기 작품 중 하나인 단편소설 「대리석 공장」에는 그러한 특징들이 압축적으로 담겨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불안, 우울, 분노 등을 감당하지 못해 괴로움을 토로한다. 불편한 감정들을 씻어낼 수 있다는 각종 힐링 상품, 마음 다스리기 비법 등의 인기는 식을 줄 모르고, 고통을 마취하기 위해 음식, 술, 여행처럼 일시적 행복을 공격적으로 탐닉하는 것이 보편적인 삶의 방식이 되었다. 그런데 이 ‘나쁜 감정’들은 불필요하고 해롭기만 한 걸까? 유구한 시간의 흐름을 겪으면서도 인류의 곁에 끝끝내 살아남았고, 때로 우리가 먼저 나서서 갈망하기도 하는 이 감정들은 대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진화의학의 개척자인 랜돌프 M. 네스Randolph M. Nesse는 “자연 선택을 거쳤는데도 우리에게는 고통스러운 감정이 왜 이렇게 많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며 진화적 관점에서 감정에 접근한다. 저서 『이기적 감정』에서 그는 감정이 “특정한 ‘상황’에 대처하는 능력을 키워주는 특별한 상태”라면서, 유기체에 위협이나 손해가 예상되는 상황에서는 부정적 감정에도 유용한 면이 있다고 말한다. 기분 저하는 순조롭지 못한 상황에서 의욕을 낮춤으로써 위험을 피하거나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게 만들며, 실현 가능성 없는 전략 및 목표를 바꿀 수 있게 한다. 불안을 느낄 때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숨이 가빠지며, 그 자리에 얼어붙거나 도주하는 등의 변화는 생명을 위협당하는 상황에서 유용하다. 오늘날 우리는 평정심을 갈망하지만, 진화적 관점에서는 불안을 느끼지 않는 것보다는 차라리 과도한 불안이 유리하다. 네스는 불안을 화재감지기에 비유하는데, 화재감지기가 작동하지 않아서 재앙을 맞닥뜨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과민하게 반응하는 편이 유기체의 존속에 더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인간의 행복이나 안위가 아니라 번식의 성공만을 따지는 자연선택의 불편한 법칙이 깔려있지만 말이다.
감정에 대한 보다 정확한 이해를 돕기 위해 세계적인 신경 과학자 리사 펠드먼 배럿Lisa Feldman Barrett은 한 가지 오해를 바로잡는다. 우리는 오랫동안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에서 처럼 특정한 몇 종류의 감정이 마음에 보편적으로 내재되어 있으며, 외부 자극에 의해 그것들이 각각 촉발된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그는 『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서 오로지 감정에만 관여하는 뉴런은 없으며, 인류 보편적인 특수한 감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밝힌다. 배럿이 설명하는 감정의 메커니즘은 이렇다. 우리의 뇌는 개인에게 형성된 개념을 사용해 외부 세계를 시뮬레이션하는데, 특정 자극으로 인해 신체 감각에 변화가 생기면 이 데이터를 바탕으로 뇌가 의미를 부여한다. 심박수, 호흡, 혈압, 체온, 호르몬, 물질대사 등에 불균형이 발생하고, 이것이 ‘불쾌’한 느낌으로 전달되면, 뇌가 그 이유를 찾아서‘짜증이 났구나’ ‘화가 나는구나’ 등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때 감정을 판단하는 기준은 개인이 성장해온 문화 안에서 형성된‘범주화’에 근거한다. 배럿은 감정이 자연에 따로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집단의 지향과 가치관을 통해 사회적으로 실재하게 된다고 말한다. 비슷한 문화권에서 유사한 개념과 가치관을 공유하는 사람들 끼리는 감정을 분류하는 스펙트럼이 어느 정도 비슷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저마다 각기 다르고 고유하듯이 내가 느끼는 슬픔, 분노, 행복의 모양이 다른 누군가와 완전히 같을 수는 없다.
2-참지도, 폭발하지도 않으려면
현대인들은 감정을 숨기거나 억누르는 것이 익숙하다. 그렇다고 해서 감정이 사라질까? 오히려 마음에는 억압된 감정의 덩어리가 고스란히 남는다. 자기 자신에게 이해받지 못하고 수용되지 못한 많은 감정은 내면에 쌓여 아주 작은 외부 자극에도 예민하게 반응하게 만든다. 그 기간이 오래가면 우울감이나 무력감, 공허함으로 스스로를 병들게 할지 모른다. 감정을 억누를수록 타인과 깊은 감정을 나누는 것이 두려워 친밀한 유대감을 맺지 못하게 되기도 한다. 자신을 위해서도, 나아가 더욱 진솔한 관계 맺기를 위해서도 우리에게는 억압하거나 부정하지 않으면서 감정을 표현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내내 억누르다가 의외의 상황에서 치솟는 감정을 어쩌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이중인격이거나 감정 조절 장애가 아닌지 고민하며 상담을 받으러 오곤 한다. 이런 경우 대부분의 내 담자에게서 ‘나만 참으면 모든 게 괜찮다’는 마음으로 감정을 묻으려 하는 경향이 공통적으로 눈에 띈다. 이러한 생각은 자신의 감정보다 상대방의 감정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뜻이다. 다른 사람에게 비치는 자기 모습에 많은 가치를 부여하느라 자신의 감정과 욕구를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두려운 탓이기도 하다. 매사 타인을 신경 쓰는 모습이 주위에는 배려심 많은 사람으로 비칠 수 있지만,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도 수용 받을 수 있는 친밀한 관계에서는 긴장이 풀림과 동시에 숨기고 억압했던 감정들이 더욱 강한 힘으로 솟구쳐 오르게 된다. 자신의 마음 상태를 돌보면서 하나씩 표현할 수 있어야만, 마음을 억누르느라 애쓰다가 엉뚱한 곳에서 감정을 터뜨리지 않을 수 있다.
‘너는 왜 그렇게 이기적이야?’라는 말을 상대로부터 들었다고 가정해보자. 아마 ‘이기적이라니, 너는 말을 그렇게밖에 못해?’라고 대꾸하게 될 것이다. 이는 상대의 비난을 공격으로 느끼고 다시 반격하려는 감정적 반응 때문이다. 감정이 달아오른 상태에서 표현하면 서로가 가하는 위협 속에서 방어하느라 문제의 핵심, 즉 전하고 싶은 내용을 놓치게 된다. 이런 상태에서는 아무리 많은 말을 하더라도 갈등이 해결되지 않고, 서로 상처 주는 대화만 계속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이때 둘 중 한 사람이라도 부푼 감정을 진정시킬 수 있는 ‘듣기 법’을 사용해야 한다. 누가 그 방법을 수행할 것인가? 욕구가 있는 사람이다. ‘이 사람과 잘 지내고 싶다’ ‘소통 방법을 바꿔서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는 의지가 있는, 자아 강도가 더 높은 사람이 이 역할을 함으로써 대화 분위기를 바꿀 수 있다. 감정적으로 반응하지 않고자 한다면 같은 질문에 이렇게 답할 수 있다.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나한테 서운한 게 있는 것처럼 느껴지네. 어떤게 서운했는지 들어보고 싶어.’ ‘지금 많이 화가 나 있는 것처럼 느껴지네. 어떤 것 때문에 화가 났는지 얘기해줘.’ 상대방이 말하는 이면의 감정 또는 행동을 파악하며 대화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방법이다.
때로 상대는 하고자 하는 진짜 이야기를 숨겨놓는다. 그것을 듣기 위해서는 ‘관찰’이 필요하다. 다리를 떨거나 손을 긁거나, 경직된 표정에서 비언어적 메시지를 포착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못하고 ‘다 망했어’ ‘최악이야’ 등의 언어로 감정을 표현하는 상대에게는 “다 망했다고 느끼고 있구나” “답답하고 화가 난 게 느껴져”라고 관찰한 그대로를 다시 들려주는 방법도 있다. 상대방의 말이나 행동을 거울처럼 비춰주는 것만으로도 끓어오른 감정을 한 김 식힐 수 있다. 이는 타인에게뿐만 아니라 자신의 감정조절을 위해서도 도움이 되는데, 관찰하는 동안 상대방이 감정에 속아서 하는 말에 휘말려 나 또한 감정적으로 반응하지 않도록 시간을 갖게 해주기 때문이다.
3-공감도 흑화하는가
폴 블룸Paul Bloom은 신작 『최선의 고통』에서 고난이 어떤 경우엔 삶에 의미 있는 양분을 제공한다고 주장한다. 방금 언급한 이름이 낯설지 않다고 느낀 독자라면… 맞다! 그는 전작 『공감의 배신』을 통해 공감의 그늘을 돌아보는 고난을 자처한 심리학자다. 참고로 폴 블룸은 ‘공감의 스포트라이트’론으로 유명해졌다. 예컨대 공감은 우물에 빠진 한 사람에게 강한 온정의 빛을 쏘지만, 그와 동시에 더 많은 이가 연루된 사안을 소홀히 처리한다는 것이다. 블룸 교수를 위시해 본고에서 소개할 저자들은 공감을 논하는 다양한 경로 중 험한 길을 택했다. 이들은 공감이 좋은 것, 훈훈한 것, 당연히 권장돼야 하는 것이라는 인식에 고개를 가로젓는다. 공감을 으레 긍정적이고 진취적인 실천으로 보는 사회적 분위기에 반기를 든달까. 그렇다면 나도 이 명단에 포함해주기를.
내가 공감의 어두운 면에 관심을 보인 까닭엔 종교적 경험이 영향을 끼쳤다. 목회자인 아버지, 사모인 어머니는 삼십 년 넘게 타인의 사연을 경청하고 상처를 매만져왔다. 그런 부모님께 후유증이 찾아온 건 당연하리라. 그들은 도움이 필요한 성도가 찾아오지 않는 시간을 휴식으로 느끼지 못하고 외려 불안해했다.『무력한 조력자』에서 남의 생활을 돕는 게 업인 사람들이 처한 비애를 살핀 볼프강 슈미트바우어의 견해에 따르면, ‘조력자 증후군’의 징조가 시작된 거다. 그럴수록 누군가를 돕는 일을 천직처럼 여기는 사람은 자기 기분보단 남의 기분에 예민한 24시간을 보내게 된다. 상대의 일거수일투족을 부지런히 살피는 데 하루하루 소모하기를 당연시한다. ‘감정 쓰레기통’ 취급을 받는지, 위로가 되는 상황을 도모하는지 경계가 흐릿한 채로.
아버지와 어머니는 현재 원예업자로 제2의 인생을 시작하면서, 슬픔에 찬 누군가에게 공감하는 사이 본인에게 찾아든 아픔을 뒤늦게 수긍 중이다. 민감한 손길로 가꿀 수밖에 없는 식물의 변화상을 관찰하는 동안 자기 자신에게 오랫동안 배어 있었으나 눌러온 예민함도 남 눈치 보지 않고 표출한다. 가끔 시골에 내려가면 어머니가 이렇게 예민한 감각의 소유자였나 놀란다. 어머니가 자신의 온몸에서 솟아나는 예민한 반응을 죄책감 없이 드러내기까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는 지금 어머니가 ‘공감 피로Empathy Fatigue’의 시기를 겪고 있다 생각한다. 다종다양한 사람들의 감정 표출에 간여한 연유로 나타난 육체적 쇠락 및 정신적 탈진이 당신을 괴롭혀왔음을 조금씩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공감 피로는 승무원이나 간호사, 사회복지사, 성폭력피해상담사처럼 감정노동 직업군만의 고충은 아니다. 깊은 새벽 느닷없이 스마트폰에선 진동이 울리고, 잠 깬 이는 액정화면에 뜬 이름을 보며 받을지 말지 망설인다. “자니?”라는 카톡을 남긴 전적이 있는 헤어진 연인 때문은 아니다. 우울감에 시달리는 친구의 토로를 오늘‘도’ 들어줘야 하는지 고민이 들어서다. 특히 친구가 우울증을 통해 드러낸 상처가 내가 유독 시달려온 그것과 통하는 점이 있어 ‘상처 메이트’ 관계로 쭉 지내왔다면, 근심은 깊을 수밖에 없다.
근심의 단계에 다다르기 전, 처음엔 상처 어린 친구에게 손을 내밀어 그 누구도 방해할 수 없을 둘만의 돈독한 우정을 쌓길 기대했으리라. 허나 자신이 유지해온 삶의 리듬이 흔들리고 중요한 결과를 내야 할 순간마다 전력을 다하지 못하는 자신을 보면서 속상함이 늘어만 간다. 급기야 그 까닭이 상처 메이트 사이로 지내는 친구에게 있다고 상상한다. 친구의 사정을 묵묵하게 들어주며 순순히 격려해주는 내 태도를 언젠가부터 친구가 이용한단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결국 친구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이 짙어진다. 설령 고민에 고민을 더한 끝에 친구와 작별했어도, 누적된 상처는 시간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는 상흔이 된다. 이처럼 누군가의 안타까운 처지에 공감하는데 심혈을 기울이다 피폐해진 정신 상태를 두고, 『나는 초민감자입니다』의 저자 주디스 올로프는 ‘감정적 숙취’라 칭한다.
September22_Topic_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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