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리오 작가이자 시인인 도로시 파커Dorothy Parker는 유명한 마티니 애호가였다. 호텔에 묵으며 글을 썼고 동료들과 늘 사회와 예술을 논했던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세 가지에 대해 수많은 글을 썼는데, 바로 애인과 개, 그리고 진이었다. 진으로 만든 마티니를 좋아했다는 그는 이런 시구도 남겼다.
난 마티니를 사랑해,
하지만 두 잔이면 적당해.
석 잔이면 나는 테이블 밑에 있고,
네 잔이면 호스트 아래에 있지.
『위대한 개츠비』의 작가 F. 스콧 피츠제럴드와 그의 아내 젤다 피츠제럴드는 풋풋한 풀 향기가 나는 진을 특히 사랑했다고 전해진다. 아무리 마셔도 술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이들은 진을 베이스로 한 칵테일 진 리키를 즐겨 마셨는데 진과 라임 주스, 그리고 탄산수로만 만들어 깔끔하고 상큼한 맛이 특징이다. 『위대한 개츠비』에는 작가의 최애 술인 진 리키가 실제로 등장하기도 한다.
톰은 얼음이 가득 들어 딸그락딸그락 부딪치는 소리가 나는 진리키 네 잔을 가지고 돌아왔다. 개츠비가 잔을 받아들었다. 그는 긴장감이 역력한 모습으로 “확실히 시원해 보이네요”라고 말했다. 우리는 탐욕스럽게 음료를 들이마셨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1Q84』에도 진 베이스의 진 토닉, 톰 콜린스, 그리고 마티니가 등장한다. 이렇듯 많은 작가들이 진을 사랑해왔다. 금주법 시대와 칵테일의 유행과 발전을 거치는 오랜 시간 동안 큰 사랑을 받은 진은 현대에도 칵테일을 위한 완벽한 스피릿(증류주)이라고 평가받는다. 진의 매력은 신선한 향기, 날카롭게 혀 끝으로 스며드는 맛, 그리고 세련된 청량감에만 있지 않다. 정치와 권력, 사회의 전반에 진이 끼친 영향력과 에피소드들을 세세하게 다루는 『진의 모든 것』은 300여가지의 진 목록에 더불어 진의 역사, 주재료, 증류 방법, 시음 방법 등을 이야기한다. 역사 속에서 진의 인기가 많아지자 향신료를 구하기 위해 벌어진 무역전쟁부터 18세기 런던에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빚었던 ‘진 광풍’까지, 인류의 역사를 되짚는 여정이기도 한 진의 역사는 인류가 진의 원료 ‘주니퍼’를 어떻게 사랑하게 되었는지에서 시작된다.
주니퍼는 북반구 어디에나 서식하는 향나무에 속하는 상록침엽 교목이다. 틈새 환경을 찾아 무럭무럭 자라나는 재주가 뛰어나, 수십만 년 동안 생태계에서 여러 종으로 분화되어 자라왔다. 마지막 빙하기인 약 1만 년 전부터는 서식지가 널리 확장되며 아프리카 열대지역, 동유럽의 삼림, 티베트, 그리고 미국 서부 사막의 피뇬 주니퍼 삼림지대 북반구 전체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식물이 되었다. 덕분에 전 세계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주니퍼와 그 열매를 활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라스코 동굴과 구석기 시대에는 주니퍼 나무로 숯을 만들어 사용했던 흔적이 발견됐으며, 고대 이집트 시대부터 다양한 문화권에서 치료 효과를 인정받아 의료용으로도 활용되었다. 기원전 1550년 파피루스에는 주니퍼에 두통을 완화하는 효능이 있고 열매와 방향유를 섞어 사용하면 통증을 치료한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주니퍼가 간과 신장을 청소하고 끈적이는 점성의 체액을 묽게 하여 이뇨작용을 돕는다는 서기 2세기 고대 로마의 기록도 있다. 11세기에 이르러 증류 지식이 유럽에 전해지자 이탈리아의 수도사들은 포도주를 증류해 생명수를 뜻하는 ‘아쿠아 비타’를 만들었는데, 당시 이탈리아 전역에서 주니퍼가 활발하게 자생하고 있었던 것과 치료 효과를 가진 것으로 미루어 보아 주니퍼가 아쿠아 비타의 초기 재료 중 하나였을 것으로 짐작하기도 한다. 현대의학에서도 주니퍼의 실제 약효는 증명되었다. 2005년 자그레브 대학의 과학자들은 주니퍼의 한 종류인 주니퍼러스 커뮤니스의 방향유에 살균과 항곰팡이 효능이 있음을 밝혀냈다. 2013년 이집트와 사우디아라비아의 과학자들은 주니퍼러스 테니키아의 방향유에 간을 보호하는 효능이 있음도 발견했다.
약용으로 널리 사용되던 진이 술로 만들어진 것은 1649년 네덜란드 의학박사인 프란시스튀스 실비우스 부베에 의해서라고 알려져 있다. 주니퍼 베리를 알코올에 침전시켜 증류 과정을 거침으로써 새로운 약용주를 탄생시킨 것이다. 약국에서는 여기에 ‘주니에브르’라는 이름을 붙여 의약품으로 판매했고, 1664년 리큐르 회사인 볼스에 의해 ‘주네버’라는 상품이 완성됐다. 영국에서도 당시 영국을 지배하던 술인 럼의 대체제로 네덜란드의 주니에브르가 각광받았지만 향을 내는 생산공정이 까다로웠기에 이를 현지화한 진이 탄생하게 됐다. 위스키와 달리 오랜 숙성기간이 필요하지 않고 흔한 재료로 만들기 때문에 싼값에대량 주조가 가능했던 진은 가난한 자의 시름을 달래는 술이 되었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에서는 “맛 좋은 와인을 좋아하지만 혼자 있을 때는 욕구를 억제하고 대신 진을 마신다”라는 대사가 등장한다. 조지 오웰의 『1984』에서도 대량 배급을 위한 저질 술인 빅토리 진이 등장하는데 이를 미루어 당시 사회에서 진이 어떤 술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진이 한 단계 진화한 것은 칵테일의 발전과 유행 덕분이다. 진을 이용한 다양한 음료 레시피북인 『제리 토마스의 바텐더 가이드 북(Jerry Thomas’ Bartenders Guide)』이 1887년 재판되는 시기와 맞물려 마티니 칵테일의 인기가 상승하고, 칵테일의 첫 황금기가 시작되었다. 진 칵테일을 중심으로 하는 왕성한 레시피 창작은 20세기 초까지 유행했으며 1919년에는 오늘날까지도 큰 사랑을 받는 칵테일 네그로니가 탄생했다. 그야말로 진을 즐기는 사람들에게는 천국과도 같은 나날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1920년 1월 17일, 미국은 부분적인 금주 정책을 실시한다. 술의 판매나 구매 등 거래 행위가 금지된 것이다. 하지만 술을 마시는 것은 합법이었다. 따라서 술을 비축할 수 있었던 부유한 사람들은 이 금주 정책으로부터 자유로웠고, 그렇지못한 사람들은 몰래 술을 직접 만들었다. 맥주를 비롯한 여러 술은 제조 과정에서 숙성 시간과 공이 많이 드는 반면, 빠른 시간 안에 비교적 쉽게 만들 수 있는 진은 집에서 몰래 만들기에 가장 적합했고, 금주령 안에서도 비교적 많은 사람들이 손쉽게 마실 수 있는 술이 되었다. 이 시기에 각 가정에서 비밀리에 만든 배스터브 진Bathtub jin을 좀 더 맛있게 즐기고 싶은 사람들은 칵테일을 선택했다.
이후 보드카의 인기가 급부상하면서 진은 상대적으로 쇠약기를 걸어야 했다. 그러나 1990년대 무렵, 칵테일이 다시 대중화되고 파격적인 진 브랜드가 등장하며 시장은 혁명적인 변화를 맞이했다. 1987년 선보인 봄베이 사파이어는 푸른색 사각 병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이국적인 고수 향과 감귤향의 강력한 향미로 놀라움을 안겼다. 이를 시작으로 크레이터 레이크 진, 텐커레이 말라카, 헨드릭스, 마틴 밀러스, 데스 도어 진 등 수많은 브랜드가 쏟아져 나왔고 이들은 진의 르네상스를 주도했다. 다양한 진 베이스의 칵테일 레시피들이 등장하고, 미국 크래프트 증류주 브랜드들이 대거 출현하며 1990년대 시장을 강타한다. 이후 많은 유명 브랜드들이 이 흐름에 편성해 더욱 새로운 맛과 매혹적인 향을 지닌 진을 출시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주니퍼만을 강조하지 않고 다양한 재료를 추가한다. 고수는 호불호가 강한 채소이지만 고수 열매를 말린 것을 진에 넣으면 따뜻하고 알싸하면서도 은은한 감귤 냄새가 난다. 이외에도 안젤리카, 카시아(계피), 오리스 뿌리, 감귤류의 과일 등이 들어가는데 이들이 어우러져 매력적인 맛을 내는 다양한 진이 지금도 계속해서 탄생하는 추세다. 현재는 크래프트 맥주 열풍 못지않게 크래프트 진이 대대적인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모든 술이 그러하듯, 진의 과음은 우리를 저만치 아래로 끌어내릴 수 있는 마력을 지녔다. 하지만 깔끔하고 매력적인 맛에 더불어 날로 다양해지는 향 덕분에 진 애호가들은 그저 행복하다. “두 잔이면 적당”하다던 도로시 파커의 말을 유념하며 진의 매력에 입문해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