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사람들의 자취와 옛 물건, 옛 건물들이 현재와 공존한다는 것은 큰 의미를 가진다. 오랜 시간을 지나온 하나의 골동품으로서의 가치를 넘어 우리가 과거의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다.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지속되는 이 기다란 끈은 한 개인의, 혹은 우리 모두의 오늘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가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한다. 파리 역시 시간이 지나도 변함 없는 풍경을 간직하고 있는 도시다. 하지만 언제나 그 모습 그대로 우리를 반기는 파리라고 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변함없는 외형과 공기가 언제라도 고향을 찾은 듯 부드럽게 온 마음을 감싸 안아줄 뿐이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는 미국인 남성 ‘길’이 파리의 이곳저곳을 다니다가 그에게 있어 최고의 시절이라 여겨지는 1920년대 속으로 들어가, 당시 예술가들을 만나는 이야기를 그린다. 길은 과거 속에 존재하는 매혹적인 한 여인, 헤밍웨이와 피카소의 연인이자 뮤즈인 ‘애드리아나’에 매료되며 사랑에 빠진다. 다니는 모든 곳마다 길이 동경하던 예술가들이 살아 숨 쉬고 있다. 그들과 대화하고 함께 시간을 보내며 즐거워하는 길은 현대의 각박하고 계산적인 삶을 토로하며 1920년대가 너무나 행복했던 시절이라고 말한다. 현대와 1920년대, 그리고 19세기 벨에포크까지 3개의 시대를 넘나들며 낭만 가득한 예술적 감수성을 풍기는 이 영화는 파리라는 특별한 도시를 배경으로 했기에 가능한 이야기다.
엘리자베스 톰슨의 『파리에서 길을 잃다』 역시 1920년대 파리와 지금의 파리를 교차하며 이야기를 전개한다. 덕분에 〈미드나잇 인 파리〉 속 장면들이 책을 읽는 내내 따라다닌다. 주인공 해나는 알코올중독자인 엄마로부터 멀리 떨어지기 위해 런던에서 ‘제인 오스틴 투어’ 가이드로 일하며 생활한다. 하지만 불쑥 그녀 앞에 나타난 엄마는 놀라운 이야기를 전한다. 증조할머니가 해나와 엄마에게 파리의 아파트를 유산으로 남겼다는 것이다. 엄마의 성화에 못 이겨 끌려오다시피 파리에 도착한 해나. 오랫동안 방치되었던 아파트에서 그녀는 평소 자신이 좋아하던 문학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단서를 발견한다. 바로 1920년대에 쓰인 증조할머니 아이비의 일기장이다. 이 일기를 통해 이야기는 90년이라는 시간차를 두고 과거와 현재를 수시로 오간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시간여행 속에서도 파리는 여전히 현재 모습의 대부분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해나는 할머니의 아파트에 남겨진 유품들을 하나씩 발견해간다. 젊은 시절의 아이비가 입었던 옷들, 시간의 때가 묻은 가구들, 아이비를 모델로 그린 누드화에 이르기까지. 해나는 자신과 무관하다 여기던 증조할머니의 삶과 파리의 아름다운 날들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지금껏 골치거리로만 여긴 엄마와의 관계를 비롯해, 좀처럼 설레지 않던 그녀의 삶은 이전과 전혀 다른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증조할머니 아이비는 유명한 디자이너가 되고 싶어 영국 브리스틀을 떠나 파리로 왔다. 배우였던 친구 헬렌과 함께 파리의 허름한 작은 집에서 살기 시작한 그녀는 수많은 패션 회사에 이력서를 내고 면접을 보지만 모두 낙방한다. 하는 수 없이 제과점 점원으로 취직해 근근이 생활을 이어가던 아이비는 헬렌을 따라 참석한 파티에서 피에르라는 화가와 만난다. 돈이 필요했던 아이비는 그의 제안으로 누드모델 일을 하게 된다. 이후 우연한 계기로 멋진 외모를 가진 신예작가 앙드레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그와 함께 본격적인 파리 여행에 나선다. 아이비는 헤밍웨이와 피카소, 피츠제럴드와 그의 부인 젤다와 친분이 생기기도 한다. 1940년 전쟁이 일어나고, 앙드레와 약혼한 아이비는 임신한 상태로 영국으로 돌아온다. 아이비 할머니가 남긴 유품들과 일기를 통해 해나는 파리에 감추어진 과거의 조각들을 맞춰 나가기 시작하고, 마침내 자신의 삶을 근사하게 완성해나갈 계획을 세우게 된다.
책은 격동의 세월을 살았던 아이비의 삶과, 그와는 거리가 먼 듯한 해나의 삶을 번갈아 보여준다. 아이비 할머니의 이야기는 해나의 삶을 어떻게 완성시켰을까? 〈미드나잇 인 파리〉의 주인공 길이 그랬듯, 언제 어디서나 뜨겁게 사랑했던 할머니를 통해 해나는 자신의 삶이 있는 바로 그 시간, 그 장소를 사랑해야 한다는 아름다운 교훈을 얻는다. 우리는 현실에 파묻힌 나머지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삶을 가까스로 연명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들춰지지 않은 수많은 이야기 속에서 탄생한 존재이자 너무도 많은 유산을 간직한 역사적 존재들이기도 하다. 그런 멋진 서사가 실재하는 도시가 어찌 파리가 아닐 수 있을까? 그토록 많은 예술인이 파리를 찾았으며, 또 셀 수 없이 많은 책과 영화가 파리에서 만들어진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수많은 역사와 삶이 탄생한 곳이기에, 우리는 파리를 여행하는 동안 이런 생각들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된다. 이곳은 누가 지나쳤을까? 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 곁에는 누가 머물고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