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걸은 만큼 돈이나 포인트를 지급하는 앱이 있다. 휴대폰이나 손목시계 등 전자기기의 흔들림으로 걸음수를 측정하는 원리다. 나는 8,000보 이상 걸으면 현금으로 전환 가능한 포인트를 받는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는데, 생각보다 기준을 채우기가 어려웠다. 출퇴근이나 쇼핑, 음식 포장 등 목적이 있어야만 움직이고 그마저도 자동차나 버스, 지하철 등 운송수단에 크게 의존하기 때문이다. 여행이나 답사 등으로 많이 걸어야 하는 날이면 ‘걷기 앱’을 켜고 한 걸음이라도 돈과 연결 지으려 애쓴다. 경제적이고 효율적인 생활 방식일 수 있지만, 가끔은 이 모든게 자연스러운 본성을 거스르는 일처럼 거북하게 느껴진다. 문득 아무런 생각도, 목적도 없이 천천히 시간을 들여 걷고 싶을 때가 있다. 일과 돈, 효율… 그런 것들에서 벗어나 온전히 나에게 집중하면서.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그 곳을 걷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두며 걸어온 길이 있다. 『연금술사』의 작가로 알려진 파울로 코엘료(Paulo Coelho)에게 영감을 준 길. 대도시부터 작은 마을, 산맥과 들판을 가로질러 스페인 북서부 도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로 향하는 이 길. 바로 ‘산티아고 순례길’이다. 8세기 초,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한 명이었던 성 야고보의 무덤이 발견된 이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는 예루살렘, 로마와 함께 세계 3대 성지로 성장했다. 이 도시로 가는 길은 다양하지만, 가장 오래되고 보편적인 길은 프랑스 남부에서 출발하는 ‘프랑스 길’이다. 피레네 산맥을 넘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에 이르는 약 800km의 대장정으로, 완주까지는 보통 한 달 이상이 소요된다.
종교적 이유 이외에도 건강이나 마음의 안정 등 다양한 목적으로 전 세계 사람들이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다. 2022년 5월, 『꿈꾸는 길, 산티아고』의 저자 김창현은 꿈을 위해 이 길을 찾았다. 전국의 누각과 정자를 답사하는 역사가이자 사진가였던 그에게 산티아고 순례는 오랜 꿈이었다. 나이, 체력, 의사소통의 한계, 공황장애, 코로나 등 여러 이유로 해외 여행 자체를 미뤄뒀지만 갑작스럽게 암 진단을 받게 되자 되레 간직해 온 꿈을 이뤄야겠다는 용기가 생겼다.
변화무쌍한 날씨 무거운 배낭과 가파른 비탈길 숨은 턱에 차지만 멋진 풍경에 마음은 깃털 같다
프랑스와 스페인 국경을 이루는 피레네 산맥을 넘고 초록 밀밭을 지나 노란 유채꽃, 붉은 양귀비 옆을 걷는다. 자
연에서 느끼는 눈부신 총천연색 아름다움을 만끽하다가도 비가 오고 뿌연 안개가 끼면 그런 그대로의 멋을 즐긴다. 가는 길마다 화살표와 조개껍데기가 놓여 있어 방향을 잡기는 어렵지 않지만, 여정의 속도와 방식을 결정하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통상 30일 정도 걸리는 여정이지만 저자는 49일을 들여 원하는 만큼 여유를 즐겼다. 오랫동안 그려왔던 꿈 꾸는 길을 두 발과 마음 깊은 곳까지 곱씹어 느끼면서 걷고 걸었다.
경치가 아름다운 순례길 그보다 더 빛나는 것은 사람과의 만남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다 보면 전 세계에서 온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알베르게’라고 불리는 순례자 전용 숙소와 길가의 푸드트럭, 곳곳에 위치한 수도원과 성당… 어디에서든 순례자들과 조우한다. 어떤 이는 걷는 내내 풀꽃을 어루만지며 휘파람을 불고, 다른 이는 돌바닥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리며, 또 다른 이는 땅 위에 철퍼덕 누워 몽상에 빠진다. 같은 길을 걷는 사람들이지만 여정의 과정이 어찌나 다른지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생전 처음 보는 이가 나를 위해 악기를 연주하고, 선뜻 보조배터리를 빌려주기도 한다. 사람을 통해 얻은 추억은 가슴에 오래 남는다.
저자는 49일 만에 순례길의 종착지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에 도착했지만 아쉬움이 남아 유럽 대륙의 끝이자 대서양의 시작인 어촌마을 피스테라Fisterra까지 발길을 이었다. 54일, 800km의 긴 여행을 마치자, 순간마다 느낀 행복을 나누고 싶다는 또 다른 꿈이 생겼다. 순례길을 걸으며 핸드폰으로 직접 찍은 사진들로 전시회를 열었고, 일정별로 감상을 정리해 『꿈꾸는 길, 산티아고』를 출간했다. 순례길에서 만난 친구들을 포함한 각종 외국인 독자를 위해 영문 번역이 한글과 동등한 비중으로 실렸다. 푸른 하늘 아래에서 땅끝까지 걸었던 꿈같던 기억이 책에 고스란히 살아 숨 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