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는 『데미안』에서 질문을 던진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이에 대한 답 또한 책 속 구절로 대신할 수 있겠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자는 한 세계를 깨트려야 한다”. 한 인간이 독립된 자아로 성장하여 사회와 세계로 발을 내딛기까지 겪는 고뇌와 갈등은 가히 투쟁이라 할 만하다. 그 과정에서 미완성의 자아는 뜻대로 되지 않는 자신을 초라하고 하찮게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지나 보내고 나면 알게 된다. 마음의 그림자를 벗어나야 할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일부로 품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의 작은 우주에도 조금씩 균열이 생긴다는 것을. 변화와 시련 속에서 조금씩 진짜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한 소녀를 소개한다.
너무 소중해서
“친구들과 비밀이 없기로 했지만 나는 절대로 밝히지 않을 것이다.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 나는 또다시 혼자가 될 테니까.”
학창 시절에 친한 친구들과 비밀 공책을 공유해 본 경험이 있는가? 스마트폰으로 어느 때나 쉽게 메시지를 주고 받을 수 있는 세상이지만 사적이고 은밀한 비밀 공책의 묘미는 여전하다. 공책에 적은 내용은 친구들만의 비밀이 되고, 공책을 매개로 이들의 사이는 더욱 특별해진다. 비밀을 나눌 수 있는 친구의 존재는 사춘기에 특히 중요하다. 게다가 처음보는 순간부터 친하게 지내고 싶었던 아이와 각별한 사이가 된다는 것은 대단히 기분 좋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은재, 유리와 장빛나라는 그런 사이다. 빛나라는 처음 전학을 온 날부터 은재와 유리를 보고 친해지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바라던대로 그들과 딱 붙어 다니는 친구가 되었으니, 얼마나 신이 났을까. 친구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소중할수록 빛나라는 ‘다시는 혼자가 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한다.
그런데 선생님이 각자의 태몽을 알아오라는 숙제를 내면서 부터 빛나라는 예민해지기 시작한다. 자신은 입양이 되었기에 태몽이 무엇인지 알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의 가족은 모두 빛나라를 깊이 사랑해준다. 그러나 지난 학교에서 자신의 입양 사실이 알려지자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했던 상처가 있었기에, 빛나라는 은재와 유리에게 속마음을 절대 털어놓지 않는다. 은재와 유리는 갑자기 낯선 반응을 보이는 빛나라의 모습에 어리둥절할 뿐이다.
빛나는 아이의 어두운 그림자
“요한은 말썽쟁이에 골치 아픈 아이다. 울 때 토하는 건 보통이고 화가 나면 아무나 깨물었다. 하지만 창가에 앉아 있으면 달라 보인다. 착한 아이가 된 것처럼. 햇빛이 요한을 죽인 것 같다고 나는 생각했다.”
비밀 공책을 공유하는 세 친구 사이를 흔드는 또 하나의 사건이 생긴다. 허윤이라는 아이가 전학을 왔는데, 은재가 그에게 흠뻑 빠진 것이다. 비밀 공책에도 온통 윤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그런데 허윤은 은재가 아니라 빛나라에게 관심을 보이고 주위를 맴돈다. 은재처럼 좋은 감정 때문은 아니지만 빛나라 역시 윤이 자꾸 신경 쓰인다. 윤이를 볼때마다 감추고만 싶은 보육원 시절과, 그곳에서 함께 지내던 ‘요한’에 대한 기억이 자꾸만 떠올라서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답답함을 해소하기 위해 빛나라는 글을 쓰기 시작하는데, 어린 시절의 기억이 자꾸만 섞여들기도 하지만 이 과정을 통해 상처를 드러내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치유하는 법을 익히게 된다.
“나는 아마 여기 화분 옆이나 철쭉 무더기 사이 어디쯤 버려졌을 것이다. 이 작은 틈. 여기서 혼자 울었을 거다. 누군가 발견하기 전까지. (…) 엄마가 그랬다. 누구한테나 시작이 있다고. 그게 보통은 엄마 옆인데 나는 여기였다. 누구나의 처음이 나한테는 없는 것이다. 없는 건 아니다. 내가 모를 뿐. 그걸 아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도대체 누굴까. 그게 누구든 절대로 찾지 않을 거다. 나를 만날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이거면 됐다. 두 번 다시 여기도 오지 않을 거다.”
자신의 출생과 어린 시절을 그림자처럼 여기는 아이의 일화는 황선미 작가 특유의 사실적이고 섬세한 심리 묘사와 만나 마치 현실 속 어느 아이의 이야기처럼 펼쳐진다. 빛나라가 선생님께 지적을 받고 친구들 앞에서 발표를 할 때엔 마치 내가 그 앞에 서 있는 것처럼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고, 식은땀으로 온몸이 푹 젖은 채 꿈에서 깨지 못하고 괴로워할 때면 빛나라의 엄마가 되어 끙끙거리는 아이의 등을 쓰다듬어주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마음을 어루만지는 이야기로 공감을 이끌어내는 능력이 탁월하기로 알려진 황선미 작가는 『빛나는 그림자가』에서 이전보다 훨씬 더 마음 깊숙한 곳에 있는 고민까지 끄집어 내 다독여주는 것 같다.
이윤희 작가의 일러스트레이션은 이제 막 10대라는 시기에 진입한 아이들의 이야기에 잘 어울린다. 생동감 있는 색감과 인물들을 또렷하게 돋보이게 하는 검은 선은 그들의 기분이나 얼굴 표정의 변화를 효과적으로 읽을 수 있게 한다. 모든 디테일을 다 풀어놓지는 않지만 한 장면 한 장면에 무수히 많은 감정과 상황들을 응축해냈다. 두 사람이 자아낸 누군가의 그림자 이야기는 어둡고 치열하지만 끝내 우리의 마음에 따뜻하고 환한 빛을 피워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