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eg’s choice
책이 선택한 책
May, 2019
퀴어가 전복하는 것
Editor. 박중현
사적으로 고른 책에서 하나의 키워드로 불친절하게 이야기합니다.
당분간 한국문학을 더듬습니다.
꽤 예전부터 ‘봐야지’ 생각만 하다가 미룬 책이 두 권 있다. 하나는 김봉곤 작가의 『여름, 스피드』이고, 하나는 박상영 작가의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이하 『자이툰 파스타』)이다. 그런데 묘하게도 ‘봐야지’ 생각한 이유와 부득이 고양이를 한 발로 슬금슬금 밀어내듯 미뤄 온 이유가 같다. 퀴어 소설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지금 와서야 저 기표에 딴지 걸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는 것은 아니나, 과히 틀린 말은 또 아니고 어쨌든 아직 읽지 않은 입장에서 받아들이기에는 저만큼 명료한 설명도 없었다. 어쨌든 이유는 같지만 실은 묘하게 조금 다른 그 양상에 관해 부연해본다. 일단 기성 한국문학에 ‘퀴어’가 대중적이라고 봐도 좋을 만한 호응을 얻는 현상이 흥미로웠고, 호기심이 동했다. 그렇다면 왜 미뤄왔느냐. 두 소설 모두 작년 여름쯤 나온 거로 기억하니 벌써 계절이 세 번 바뀌고 난 후에야 결심(?)을 굳힌 셈인데, 한마디로 읽기 무서웠다. 지인에게는 “왠지 부담스러워서 손이 잘 안 가더라” 정도로 말해왔는데, 실은 무서웠다. 두 가지 정도가 무서웠다. 첫 번째, 이쪽에 그다지 밝지 못한 내게 담백하게 ‘퀴어’ 를 내거는 책장 안에 무엇이 담겨 있을지 무서웠다. 게다가 그 ‘담백함’은 되레 내게 망상의 수위 제한을 해체하는 효과를 가져다주어서(자, 이게 퀴어 소설이야!), 책을 대하고 있노라면 이내 정신이 혼곤해지곤 했다. 게다가 ‘후보작’ 중 하나였던 『여름, 스피드』의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남성의 매끈한 맨등을 바라보노라면 내 마음의 심지는 바람 앞의 촛불처럼 일렁이며 파르르 떨려왔다.
두 번째, ‘내’가 무서웠다. 뭐가 들어있는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저 이야기들을 접하고 내가 어떻게 생각할지 무서웠다. 거의 모든 경우의 수가 무서웠다. 실망하든 혐오하든 재미있든 매료되든 제각기 그건 그것대로(?) 걱정되는 면모가 다양했다. 그래서 여기서 또 『여름, 스피드』는 하잘것없는 나만의 심사에서 탈락했다. 왜냐하면 대체로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로 감상 되는 듯했으므로, 뭔가 내 눈에는 안 아름다워 보이거나 ‘뭐지, 그 정도는 아닌데’ 하면 어쩌나 걱정됐으므로. 그런 의미에서 최종 낙점한 것이 『자이툰 파스타』이다. 구매에는 상대적으로 표지가 점잖은 탓도 있겠으나, 표제작이기도 한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의 영향이 컸다. 다름 아닌 게이 인물이 퀴어 영화를 만들며 ‘진짜 퀴어 영화’를 부르짖는 모양새가 흥미로웠다. 게다가 그 규탄의 대상은 그를 ‘짝퉁 홍상수’라고 부른 소설 속 영화계를 비롯해 대중, 나아가 ‘이성애자’ 전체로까지 나아갈락 말락 하는 생동감이 나를 망상에서 건져내는 데 한몫했다.
내 영화는 별로 특별할 게 없는 사람들이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사랑을 하다 맥빠지게 끝나버렸다. 주인공이 게이라는 것 말고는 아무런 특색도 가치도 없는 그런 영화. 굳이 장편 분량의 서사일 필요도 이유도 없었다. 고작 이것을 위해, 그 모든 것을 견디고 버티고, 또 버리며 여기까지 온 것이라니. 미자의 말이 옳았다. 내 영화는 만들어지지 말았어야 했다. 나는 그저 나 자신에 취해 있었을 뿐, 실은 아무것도 제대로 보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는 애초에 아무것도 아니었고, 아무것도 아니며, 그러므로 영원히 아무것도 아니다.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
어떤 대상을 주제로 하는 것에는 크게 두 가지 목적과 효과가 있다. 말할 것도 없이 그 대상을 이야기하거나, 그 대상을 이야기함으로써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나머지 전체를 보여주려는 시도다. 대상을 퀴어로 바꾸면 퀴어를 보여주거나, 퀴어를 품고 있는 방식을 보여주거나. 물론, 소설집 『자이툰 파스타』에 전부 게이와 동성애가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뚜렷이 등장하는 것은 두 작품 정도로 적다. 그러나 이들 작품은 모두 충분히 하나로 꿰일 만한 공통분모를 지닌다. 그것은 소수성이다. 작품 속에서 위태로이, 그러나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또 알아주길 바라지도 않(는 것처럼 보이)는 비극의 소수들이 줄기차게 등장한다. 현실에서도 그렇다. 이쯤 되면 게이 따위(?) 별 대수로울 것도 없다. 그래서 『자이툰 파스타』는 퀴어 소설도, 소수성을 그린 소설도 아니다. 소환되는 것은 이들에게 가해졌고 가해지는 다수의 방식이다. 폭력인지 아닌지까지 나아갈 생각은 없지만, 그래서 한 가지는 분명한 착각이다. 다수로서 소수를 관찰하고 있다거나, 혹은 관찰 중이라는 감각 그 자체. 이는 소수에게도 마찬가지다. 퀴어를 보는 눈이 이성애 스스로를 소개하듯 퀴어의 이성애 인식도 자신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퀴어 혹은 소수가 진정 전복하는 것은 가치론적 서열 관계도 각양각색의 몰인식도 아니다. 구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