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ide Chaeg:Art 책 속 이야기:예술

지금 터뜨려도 될까?

에디터. 정현숙 자료제공. 보틀프레스

옛날 옛적 아주 먼 옛날에 프랑스의 황제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전투에서 승리하면 샴페인을 마실 자격이 있고, 패배했을 때는 마실 가치가 있다.” 나폴레옹이 했던 이 유명한 말은 꽤 멋지게 느껴진다. 그렇지만 제아무리 샴페인을 사랑하는 그였을지라도 전쟁에서 지고 돌아와 매번 샴페인을 터뜨리지는 못했을 거다. 레드 와인이나 화이트 와인이면 몰라도 샴페인은, 아무래도 샴페인이니까, 꼭 좋은 일이 있을 때만 따야 할 것 같다. 그런데 그 ‘좋은 일’이 잘 일어나지 않으므로 좀처럼 못 따게 되는 엄숙한 술이 바로 샴페인이고.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견해인데, 지금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생각이다. 나폴레옹님 말씀에 뒤늦게 동의를 표하는 바, 기쁨이라곤 오직 퇴근뿐인 보통날에 에디터 본인, 편의점표 샴페인 한 병을 사 마셨다. 단돈 49,920원에 작은 별천지를 만났다. 이게 다 술을 부르는 영화에 대한 책 때문이다.
일명 ‘와인쟁이 부부’로 불리는 두 사람이 있다. 현재 제주도에서 와인샵 겸 와인 콘텐츠 스튜디오 ‘슬기로운 와인생활’을 운영하며 와인 입문자와 애호가를 위한 맞춤형 와인 컨설턴트로 일하고 있는 엄정선, 배두환 부부다. 영화인의 꿈을 키우다 와인에 빠져 소믈리에가 된 엄정선과 와인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는 배두환. 와인 양조를 공부하는 선후배 사이로 처음 만난 둘은 결혼 후 1년 간 전 세계 16개국 500여 곳의 와이너리를 탐방했고,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와인 관련 책을 공동 저술했다. 이전의 책들이 와인 기초상식으로 가득한 지식백과에 가까웠다면,『와인이 있는 100가지 장면』은 책을 핑계 삼아 기어코 와인 한병을 사게 만드는 유혹적인 안내서다.
와인과 영화는 부부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두 가지다. 서로에게 물들어 점점 닮아가는 부부처럼, 와인과 영화도 알고 보면 비슷한 구석이 참 많다. 인고의 시간과 지혜를 요하는 창작 과정부터, 깊은 맛이 담긴 한 잔 혹은 한 편이 잠시 현생의 고통을 잊게 해주며, 때로는 그 자체에 탐미적으로 빠져들게 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만드는 사람의 철학과 개성이 섬세하게 반영될수록 그 매력이 배가된다는 점도 그렇다. 어디 그뿐인가. 맛 좋고 저렴한 와인을 만나는 기쁨은 숨겨져 있던 명작을 발견하는 기쁨만큼이나 클 것이고, 입안에 머금은 와인 한 모금의 황홀함은 종종 감동적인 영화를 보는 것과 같은 진하고 알싸한 감정을 자아낸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영화가 보고 싶고, 또 영화 보면서 마실 와인을 찾아보게 되는 이 책은, 영화 100편 속에 등장하는 와인을 본격적으로 파헤치는, 속절없이 취하기 딱 좋은 한 권이다. 단순한 소품을 넘어 장면의 분위기, 등장인물의 심리를 전달하는 매개로서 연출된 와인의 의미를 해석하는가 하면, 비슷한 와인이 등장하는 영화들을 비교하고, 와인 홈 파티 매너와 각 와인에 맞는 잔 선택법, 와인에 얽힌 역사와 사건들까지 폭넓게 풀어낸다. 순식간에 스쳐 지나간 와인이라 해도 문제없다. 두저자는 철저한 자료조사와 방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영화 속 상황에 어울리는 와인을 제안한다. 여기에 더해 일러스트레이터 박이수의 그림은 와인이 있는 장면의 분위기를 한껏 북돋아 준다. 그야말로 ‘와인무비 총정리’라 보아도 무방한데, 특히 특유의 톡 쏘는 매력으로 영화에 묘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샴페인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더 늦기 전에 여기서 잠깐! 짚고 넘어가야 할 상식이 있다. 많은 이들이 기포가 있는 와인을 샴페인이라고 부른다. 하지만‘샴페인’은 프랑스 상파뉴 지방에서 생산된 스파클링 와인에만 독점적으로 붙일 수 있는 이름이다. 샴페인은 상파뉴의 영어식발음으로, 지명이 곧 와인의 이름이 된 셈이다. 스파클링 와인을 만드는 여러 방법 중 샴페인은 ‘전통적인 방식’이라 불리는 생산 과정을 따른다. 포도원액이 발효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이산화탄소가 만들어지는데, 이를 그대로 단단히 밀봉하여 잡아 두는 기법이다. 한편, 아예 와인에 탄산을 인공적으로 주입하는 양조법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의 차이가 꼭 맛의 차이를 결정짓는 것은 절대 아니다. 과거에는 샴페인을 능가하는 스파클링 와인을 찾기 힘들었지만 이제는 스페인의 까바 (Cava), 이탈리아의 스푸만테(Spumante), 독일의 젝(Sekt)에서도 뛰어난 향과 풍미를 얼마든지 만끽할 수 있다.
다시 책으로 돌아와서. 샴페인은 국적 불문, 실로 많은 사람이 특별한 순간에 또는 그 순간을 특별하게 기억하려 할 때 떠올리는 와인이다. 그런데 이 책 덕분에 찾아보게 된 영화 중 하나인 〈버킷 리스트: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것들〉은 샴페인이 있어야 할 때와 장소에 대한 정의를 바꿔주었다. 가난하지만 한평생 헌신적으로 가정을 꾸려온 자동차 정비사 ‘카터’와 부와 명예가 삶의 최우선 목표인 괴팍한 백만장자 ‘에드워드’. 병실 룸메이트로 만난 둘은 시한부 암환자라는 공통분모로 급격히 친해지고, 의기투합하여 버킷 리스트 여행을 떠난다. 이탈리아 해변을 앞에 두고 생애 마지막이 될지 모를 샴페인을 마시는 두 사람. 곱씹을수록 슬픈 대사들이 오가는 장면이지만 그 안에 놓인 샴페인 때문인지 영화는 기분 좋은 산도를 유지한다. 그리고 이런 여운을 남긴다. 샴페인은 기쁜 순간만을 기다리다가 축포처럼 터트리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삶의 어느 순간이든 작은 기쁨들이 존재하고, 그것이 영화 같은 존재감을 발휘하도록 만드는 건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그날 불현듯 터뜨린 편의점 샴페인이 알려준 사실과도 맥이 통한다. 어쩌면 샴페인을 터뜨리기에 너무 늦지 않은 때는, 바로 지금이 아닐까?
언제나 가족을 위하며 45년간 자동차 정비공으로 살았던 카터. 지중해가 보이는 아름다운 레스토랑에서 그의 입으로 샴페인과 캐비아가 들어갈 때,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카터는 그런 행복을 누릴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우리도 자신을 위해 한번쯤 이런 호사를 선물해보는 것은 어떨까? 살아온 방식은 달라도 삶을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누구에게나 고된 일이므로. _「〈버킷 리스트〉, 고단했던 삶을 위한 한 번의 호사」 중
December22_Inside-Chaeg_01_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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