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뜰 무렵, 동쪽 하늘이 빛의 산란에 의해 붉게 물드는 현상을 아침놀이라 부른다. 새로운 하루가 도착했다는 이 신호를 니체는 자신의 구원에 비유했다. 아침이 온다는 신호를 안다면 어떤 어둠 속에 있거나, 어떤 노고를 치르는 중일지라도 견디고 위로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침의 정의를 해가 뜨기 시작했을 무렵이라는 물리적 시간 안에만 납작하게 가두고 싶지는 않다. 그렇게 되면 아침이 모두에게 공평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하루를 여는 시작의 순간은 있다. 때로 매일 반복되는 아침은 지겹고, 나아지지 않는 하루하루는 실망스럽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매일 아무런 대가 없이 새하얀 백지가 꼬박꼬박 우리앞에 도착한다는 것이 얼마나 커다란 가능성인가. 이달의 토픽에서는 그 시간의 윤곽을 보다 섬세하게 매만지게끔 하는 제안들을 담았다. 하루의 시작을 대하는 마음이 쌓이고 쌓이며 이룰 삶이라는 세계가 한결 근사해지기를 바라며.
1-일어나고, 쓰고, 살아가라
작년 연말, 지인들과 모인 자리에서 새해 바라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나도 모르게 “이제는 좀 다르게 살아보고 싶어”라는 속마음이 흘러나왔다. 왜 그런 열망이 내 안에 있었을까? 여태껏 가진 것을 흥청망청 허비하거나, 해야 할 일들을 외면하며 무책임하게 살아온 건 아니었는데. 다만 내가 도망쳐온 것들, 지레 포기한 것들에 대한 미련이 못내 남아있었던 것 같다. 세상에 내 두 다리로 서있다고 느끼는가? 외부 요인만 탓할만큼 스스로에게 후회없이 떳떳한가? 이만하면 됐다 싶은가? 문득 문득 들려오는 내면의 물음에 대한 내 대답은 늘 ‘아니오’였다. 내 삶이 지금 이대로도 괜찮다고 치부하기 전에 한 번은 더 정면으로 마주하고 싶었다. 마음 속 깊은 곳의 나는 스스로에게 좀 더 정직해보라고 외치고 있었던 게 아닐까. 만족스럽지 않으면서 만족하는 척하지는 말라고. 이런 얘기를 듣던 일행 중 한 명이 나에게 대뜸 ‘아침 글쓰기’를 권했다.
아침 글쓰기가 무엇을 달라지게 할 수 있을까? 에디터라는 직업으로 인해 좋든 싫든 남들보다 평균 이상으로 글을 쓰고 있으리라 생각했기에 의구심부터 들었다. 게다가 아침이라니…나로 말할 것 같으면 아침형 인간들의 거들먹거림을 못마땅해하며 그들의 성공담을 냉소해온 삐딱한 올빼미 아니던가. 하지만 “아침형 인간에게는 저녁이 있다. 그러나 저녁형 인간에게는 아침이 없다”라는 말이 있듯, 야행성 인간으로서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나에게 아침은 아직 써본 적 없는 카드였다. 다종 다양한 활동 중에 글쓰기는 가장 진입 장벽이 낮아 보이기도 했다. 늘 시큰둥하게 덮어두었던 그 카드를 왠지 좀 만지작거리고 싶어졌다.
소설가이자 시인, 영화감독 등으로 활동하는 예술가 줄리아 캐머런Julia Cameron은 아침 글쓰기 영업의 대표 주자다. 그는 저서『아티스트 웨이』 『아티스트 웨이, 마음의 소리를 듣는 시간』 등을 통해 창조성 회복의 방편으로 ‘모닝 페이지’를 강력히 권한다. 모닝 페이지란, 매일 아침 일어나 의식의 흐름을 세 페이지정도 적어내는 것이다. 어떤 검열이나 목적 없이, 누군가에게 보여주지 않을 것을 염두에 두고 행하는 이 글쓰기를 캐머런은 ‘두뇌의 배수로’라고도 표현하는데, 바로 이것이 모닝 페이지의 중요한 역할이다.
우리는 수시로 자신의 창의력이나 아이디어를 혹독하게 비판한다. 덕분에 무언가를 시작도 못하고 지레 덮어버리는 때가 많다. 그러나 캐머런은 매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곧바로 글쓰는 습관을 통해 내면에 도사리는 완벽주의자를 피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고 말한다. 아무런 비판 의식 없이 쓰는 동안, 억눌렸던 창조적인 뇌가 마음껏 뛰어놀 수 있다는 것이다. 직업적, 혹은 공개적 목적으로 작성하는 글과 달리, 이 글쓰기는 내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충실히 귀 기울이는 노력이자 일종의 명상이기도 하다. 명상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간 점은, 내면의 목소리를 그저 흘려버리지 않고 기록해둠으로써 걱정을 덮어두거나 날려버리는 대신 삶에 변화를 불러올 질문과 답을 스스로 찾도록
이끈다는 것이다.
나 역시 작년 연말부터 다문다문 쓰던 일기를 아침 글쓰기로 정착시켜 보았다. 늦잠에 관한 에피소드라면 남부럽지 않을 정도로 잠이 많은 편인데, 아침에 깰 때마다 ‘어휴, 더는 이렇게 살지 말자!’라는 내면의 욕지거리에 귀기울이니 눈이 절로 번쩍 떠진다. 아직까지 내 노트는 주로 한탄으로 점철되어 있으나, 얼마 전 아침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어떤 계획을 앞두고 노트에 이렇게 적었다. ‘내가 할 수 있을까? 별다를 게 없거나 더 나빠지면 어쩌지?’ 여기까지 쓰고 나자, 마치 스스로 대답이라도 하듯 다음 문장이 흘러나왔다. ‘이런 때마다 망설이기만 하다 흘려보내서 후회한 시간이 더 많았잖아. 분명 아무것도 안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거야.’
캐머런은 예술가들을 대상으로 각자의 예술성을 촉발하는 차원에서 창조력을 강조했지만, 창조적인 아이디어는 비단 예술가에게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살면서 겪는 수많은 문제들에 관성적·관습적으로 대처하려 들고, 그 때문에 더 미궁 속으로 빠져든다. 창조적 사고는 그러한 허들을 대수롭지 않게 폴짝 뛰어넘도록 도와준다.
2-생각으로 아침을 깨운다면
대부분의 현대인은 밤새 잠으로 충전한 에너지를 출근길 만원 지하철이나 버스, 혹은 정체된 도로 위에 소진해버린다. 출근하기가 무섭게 퇴근을 바라는 일도 부지기수일 것이다. 그러나 아침마다 벌어지는 출근 전쟁을 이겨내고 마침내 업무를 시작하는 수많은 보통 사람들과 달리, 해도 뜨지 않은 컴컴한 새벽에 일어나 그 누구보다 아침을 길고 여유롭게 영위하는 이들도 있다. 이것이 보편적인 일상이라면 그다지 흥미롭지 않겠으나 스티브 잡스, 인드라 누이, 팀 쿡, 하워드 슐츠, 애나 윈투어과 같이 대단한 부와 성공, 명예를 가진 사람들이 그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솔깃해진다.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지는 아침 시간에 많은 일들을 해낼 수 있다는 사실은 분명 매력적이다. 영리한 마케터들은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와 같은 클리셰를 인생과 사업의 성공, 거기에 부록처럼 따라올 부와 명예로 치장하며 ‘아침형 인간=성공’이란 등식으로 완성시켰다. 수많은 자기계발서는 이러한 열풍에 대한 대중적 참여에 불을 당겼다. 바야흐로 아침의 기적은 더 나은 삶은 바라고 나름의 노력을 기울이며 사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성공적인 인생을 위한 필수 덕목이자 과제가 되었다.
뇌과학자 모기 겐이치로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침 시간을 어떤 생산적인 행동들로 채워가느냐”라고 말한다. ‘아침 몇 시’에 일어나느냐가 아니라, 몇 시에 일어나든 완전히 새로운 상태로 깨어 하루를 효율적으로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겐이치로는 허둥대지 않고 원활하게 하루를 시작하면 전반적으로 여유로움을 누릴 수 있으며, 이것이 매사에 효율을 높여 긍정적, 적극적인 마음을 갖게 하고, 이러한 마음 상태는 개인의 행복과 연결된다고 설명한다. 이른 아침에 일어나는 것만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점이 반갑긴 하나, 여기서 또 다른 자기계발의 방법과 과제를 부여받은 느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어쨌거나 시간에 대한 경제 감각, 즉 시간을
효율로 치환하는 감각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행동하기를 권하기 때문이다. 저명한 뇌과학자에게 반기를 들고 싶은 마음은 없다. 다만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효율적인 아침’이 무엇인지 생각해본다. 일상의 무게를 짊어지기 위해 선행되어야 할 것은 효율적인 시간 분배가 아니라, 먼저 자신의 삶을 깊이 생각해 보는 ‘이성적인 자세’가 아닐까?
바쁜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 문득 나는 잘살고 있는 것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며 삶의 의미란 무엇인지와 같이 쉽게 답을 내기 어려운 물음이 내면 깊숙한 곳에서 일었던 경험이 있는가. 여느 학자들의 얘기처럼 행복은 긍정적 감정에서 비롯하고 긍정적 감정은 인간을 성숙하게 하여 삶을 향상시킬 수 있다. 이에 우리는 피트니스와 웰빙, 힐링, 요가, 명상 등이 버무려진 건강과 자기계발 서적이나 프로그램 등에 관심을 쏟는다. 그러나 이것이 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실마리가 될 것인가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지는 않으므로 계속 다른 방법을 구하게 될 공산이 크다.
3-잘 자고 있나요?
2021년 한 해 우리나라에서 수면장애로 병원을 찾은 사람의 수가 70만 명을 넘었는데, 이는 최근 5년 사이에 43%가 늘어난 수치라고 한다. 인구의 약 20%가 수면장애를 경험한다고 하니, 숙면은 이제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문명의 이기는 늘어나는데 왜 많은 사람이 강박적으로 잠에 매달려야 하는 걸까? 어느 시인은 ‘살아 있다는 건, 참 아슬아슬하게 아름다운 일’이라고 노래한다. 어쩌면 우리는 아슬아슬한 경계선 하나를 사이에 두고 숙면과 불면을 넘나드는지도 모른다. 중년에 접어들며 나 역시 수면장애로 편치 않은 나날을 보냈다. 잠들지 못해 몸부림치던 밤 동안 내가 깨달은 것은 잠이야말로 스스로를 성찰할 수 있는 주요한 화두라는 것이다. 숙면을 이루면 누구나 하루하루가 상쾌하고 심신이 건강해진다. 활력이 넘치면 생산성도 올라간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삶의 많은 것들이 잠에서 비롯된다. 요즈음 수면에 관한 인터넷 정보가 넘쳐나지만, 나는 화학자로서 의사들이 잘 이야기하지 않는 숙면 비법에 주목해보려한다.
잠을 설치는 원인은 저마다 다양하다. 좁게 보자면 대낮같이 밝은 도시의 저녁이나 각종 영상매체가 밤낮 없이 뿜어대는 파란 불빛 때문에 밤을 잊은 것이고, 넓게 보면 현대사회에서 파생되는 여러 스트레스로 인한 심리적 불안
과 위협을 심신이 감당하기 어려운 탓이다. 수면은 낮 동안 지친 몸과 뇌를 회복시키는 중요한 일을 한다. 우리 몸은 깨어 있는 시간에 비례해서 자고 싶은 생리 욕구가 커지는데 이런 욕구를 흔히 ‘수면압’이라 한다. 우리 뇌에는 수면압을 알려주는 지표가 있다. 그 주역이 바로 아데노신이라는 신경조절물질이다. 뇌가 활동을 많이 하면 할수록 ATP라는 생체연료가 소모되고, 그 노폐물로 아데노신이 쌓인다. 그렇게 되면 수면압이 올라가면서 피곤하고 졸린 상태가 된다. 반대로 잠을 자는 동안 노폐물 청소가 이루어지면 수면압이 내려간다. 차츰 각성 상태가 되고 에너지를 공급하기 위해 코르티솔 분비가 시작된다. 이들 신경전달체가 시소처럼 짝을 이루고 오르내리면서, 낮에는 각성하고 밤에는 잠을 자는 24시간 주기의 생체리듬이 형성된다. 수면 또한 얕은 단계에서 시작하여 깊은 단계로 이행한 후 깨어나는 과정으로 이루어져 대략 90분 정도의 주기를 이루며, 밤 동안 이 주기가 몇차례 반복된다. 숙면을 위해서는 뇌의 피로도, 즉 수면압력은 높이고 각성도는 낮춰야 한다. 쉬면서 몸과 마음의 열기가 가라앉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간단한 공식을 해결할 쉬운 정답은 없을까? ‘모든 약은 독이고, 모든 독은 약이다’라는 말이 있다. 불면의 주요 원인으로 꼽히는 스트레스도 우리에게 해롭기만 한 것은 아니다. 업무 능률을 올리기 위해서는 스트레스가 반드시 필요하다. 뱀독보다 독성이 강하다는 에피네프린도 소량이면 목숨을 구한다. 이런 역설들은 대부분 생체화학반응의 성격에 기인한다. 신경망을 이어주는 대부분의 화학반응은 역동적이고 환경변화에 민감할 뿐 아니라, 같은 신경전달체라도 체내외 환경에 따라 그 기능이 수시로 변하고 인과관계가 뒤집힌다. 예를 들어, 흔히 커피는 잠을 방해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른 아침에 마시는 커피는 역효과가 난다. 카페인은 아데노신과 화학구조가 비슷하여 수면압을 낮추는 각성효과를 가져오지만,잠에서 깨자마자 마시면 코르티솔 분비를 방해하여 그 효과를 떨어트리기 때문이다. 결국 숙면도, 약의 효과도 사람마다 수용패턴이 다르고, 생활 습관에 좌우되는 행동이나 생리적인 문제는 유전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그러므로 한 가지 방법을 맹신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알아야 비로소 잠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