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New Year Special

전형은 없다,
독립출판물(혹은 만든 이들) 탐구기

에디터: 유대란
사진: 신형덕, 김종우

2009년 유어마인드가 서교동에 문을 열었을 때만 해도 독립출판물의 정의는 단순했던 것 같다. 당시엔 ‘유어마인드에서 볼 수 있는 것=독립출판물’이라는 등식이 유효했고, 그것들은 으레 예술, 디자인 계통을 전공하거나 관련 업계에 종사하는 젊은 사람들이 소규모의 자비를 들여서 만드는 소량의, 아마추어리즘적인 작은 책, 아니면 아기자기한 천 가방이나 엽서 같은 한정된 굿즈로 수렴됐다. 그러나 지난해 11월에 열렸던 언리미티드 에디션에서 거듭 확인했듯, 이제 독립출판물의 세계는 아마존의 정글만큼이나 무궁무진해져서 몇 개의 단어로 이 시장을 정의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형태나 장르로 유형을 구분하는 것도 무의미해졌다. 그래서 이제는 독립출판물이라고 불리는 것의 집합을 하나의 유동적이고 거대한 움직임으로 이해하고 산재한 개별적인 모습을 살펴보는 수밖에는 없다. 이 탐구기도 그렇게 시작되었다. ‘탐구’ 도중 몇 가지 흥미로운 흐름을 감지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시장이든, 업계든, 제작 방식이든, 기치든, 기존의 플랫폼에 진입하기보다 새로운 플랫폼을 아예 만들어버린 이들이 많다는 것, 그리고 출판물을 만듦에서 개입하는 정도와 분야가 세분되고, 그만큼 다양한 관계와 협업의 여지가 생겼다는 것이다. (참고로, 이 점들도 단정적 이야기로 읽히지 않길 바란다.) 이 움직임은, 자본 및 생산 규모가 작아야 하고, 상업성에 다소 무심해야 한다고 여겼던 작가주의적 태도에서 자유로워진 듯하다. 그리고 그런 태도를 위시한 작업물들을 수용했던 것이 젊은 문화적 특권층이었다고 한다면, 현재는 어느 때보다 다양해진 출판물만큼 다양한 수요자층이 존재하게 되었다. 바야흐로 ‘독립출판물’에서 독립한, ‘자유출판물’의 시대가 온 것이 아닐까.

리소그라프의 매력, 코우너스의 철도 라이브러리
독립출판물이 제작되는 방식이 매우 다양하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자체적으로 보유한 인쇄기를 돌려서 책을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최근에서야 알았다. 을지로에 위치한 코우너스에서는 기획, 편집, 디자인, 인쇄까지, 책이 만들어지는 전 과정이 한곳에서 이루어진다. 2012년 김대웅, 조효준, 김대순이 만든 코우너스는 그래픽 디자인과 리소그라프risograph 인쇄 서비스를 중심으로 자체 기획과 실험을 거쳐 전시, 출판, 워크숍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 리소그라프는 일본의 리소과학공업주식회사에서 개발한 실크스크린 방식의 디지털 공판인쇄기다. 마스터 용지(스텐실)에 미세한 구멍을 뚫어 이미지를 표현한 뒤, 그 사이로 잉크가 통과하면서 인쇄가 되는 스텐실 원리를 디지털 기술과 결합해 자동화한 방식이다. 특유의 거친 질감이 오래된 출판물이 간직한 느낌을 재현한다. 코우너스는 리소그라프 인쇄기를 구입하면서 디자인, 출판, 인쇄를 자연스럽게 겸하게 되었다. 리소그라프의 매력은 무엇일까. “쉽고 빠른 인쇄가 가능하며, 잉크젯이나 레이저, 4도 오프셋 인쇄기와 다르게 한 번에 한 가지 또는 두 가지 색상을 인쇄할 수 있습니다. 리소그라프 인쇄에 사용되는 잉크 또한 다른 인쇄기들과는 조금 다른데, 콩기름을 원료로 하여 친환경적이고, 잉크마다 고유의 색상을 담은 별색잉크입니다. 형광 오렌지, 핑크 등의 형광 잉크와 광택이 있는 금색 잉크 등 특수한 잉크를 소량 인쇄할 수 있다는 점도 리소그라프 인쇄의 매력이에요.” 코우너스의 구성원 모두 디자인과 인쇄 업무를 분담하고 있다. 인쇄 기술은 인쇄기를 사용하면서 자연스럽게 습득했고, 후가공은 충무로의 전문가들과 협력한다.

‘기승전연애’의 세상에서, 계간홀로
SNS를 열심히 하는 축이라면 시끌시끌하고 웃기고 때로 진지하고 엄청나게 날카로운 『계간홀로』의 계정을 접했을 것이고, 신문을 좀 챙겨보는 편이라면 몇몇 주요 일간지에서 거론된 『계간홀로』의 발행인 ‘짐송’의 이름이나 그녀의 기고글을 한 번쯤 봤을 것 같다. 그렇다고 짐송을 ‘화제의 인물’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그녀 자신이 원치 않을 것 같고, 그렇다면 ‘논란의 인물’쯤으로 하면 될까. 짐송은 ‘전방위, 무정형, 비연애인구를 위한 전용잡지’라는 부제의 『계간홀로』를 만들고 있다. 『계간홀로』의 성격은 잡지 내 ‘사용설명서’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계간홀로는, 이 세상에 ‘연애’에 부여하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거부하고 연애하지 않는 삶의 다양함과 자연스러움을 조명하고자 하는 1인 잡지입니다.” “계간홀로는, 잡지의 성격상 필연적으로 비혼, 다양한 성적 취향, 사랑의 형태 등 들리지 않으나 엄연히 존재하는 세상의 어떤 면과 연결됩니다.” “계간홀로는, 새로운 목소리의 출현이 기꺼이 ‘깨뜨려져’ 이전과 다른 자신을 만날 가능성으로 열려 있는 홀로를 지향합니다.” 그런데 짐송의 이런 매니페스토적 선언을 보며 드는 의문이 있었다. ‘우리는 이런 세상에 살고 있지 않았던 거였어?’ 그랬다. 우리는 그런 세상에 살고 있지 않았다. 『계간홀로』와 짐송의 출현은 이런 ‘이상한 곳’, ‘당연시되어야 할 것들이 당연하지 않은 곳’에서 이루어졌다. 그래서 짐송의 등장은 그 자체로 ‘이런 이상한 곳’에 대한 자각의 기폭제가 되고, 『계간홀로』는 이미 ‘이상함’을 자각한 좀 더 예리한 이들이 모이고, 소통하는 광장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짐송과 『계간홀로』를 너저분한 곳에서 태어나 아직은 가늘지만 날이 예리하고, 매우 반짝이는 하나의 ‘현상’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언급한 몇 가지 사용설명법에서 눈치챘겠지만, 『계간홀로』는 비단 연애에 한정된 이야기만 하는 곳이 아니다. 연애라는 플랫폼에서 출발하지만, 연애의 일원화된 취향, 이미지, 욕망, 틀을 헤집어 놓고, 그 안에 엄연히 존재해왔지만 마치 없던 것으로 치부됐던 차별, 계급, 역할, 불합리, 갈등, 폭력, 선택의 문제 등을 여러 가지 톤과 소재를 통해서 짚어본다. 단, 방식은 유쾌하고 재밌고 웃기게. 짐송의 무기는 엄숙함이 아니다. 책의 조건은 ‘무조건 재미있을 것’, ‘만드는 사람이 즐거울 것’이다. 짐송의 글은 정말 재미있다. 『계간홀로』의 기고자들도 다양한 장르의 감각적인 유머 코드를 탑재했다. 총 7권이 나온 『계간홀로』는 무가지로 출발해서 유가지로 전환했다. 무가지를 우습게 아는 사람들 때문에 ‘보려는 독자에게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것’을 새로운 목표로 삼았다. 텀블벅 후원의 성공률은 50%였던 것이, 5호에 이르러 계속 성공했다. 잡지 성격상 연애 적령기이자 크라우드펀딩 서비스에 익숙한 20, 30대의 후원자가 많은 편이다. 최근에 나온 7호는 500부를 인쇄했으나 모자라서 2쇄를 찍게 되었다.

버스를 타고 떠나는 서울 건축 여행, 파노라마
눈치챘을지 모르겠지만, 최근 우리는 자신을 지칭할 때 ‘국민’이라는 말보다 ‘시민’이라는 말을 더 자주 쓰고 있다. ‘국민’이라는 말을 듣는 것도, 대통령이 가끔 텔레비전에 나와 연설할 때 정도? 글자 그대로 풀면 국민(國民)은 ‘국가의 구성원’이고 시민(市民)은 ‘도시의 구성원’이다. 액면가로만 따지자면 우리는 국민이기도 하고 시민이기도 하지만, 거기에는 사실 중요한 차이가 있다. 시민이라는 말에는 주권이 포함되어 있다. 세계사의 3대 혁명으로 거론되는 영국의 명예혁명, 프랑스혁명, 미국의 독립전쟁의 주체는 ‘시민’이다. 그래서 이 혁명들의 다른 이름은 ‘시민 혁명’이다. 이런 역사로 인해 ‘시민’은 나라의 주권자임을 자각하고 행동하는 사람, 시민의 권리를 중시하고 실현하려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이런 건 몰랐더라도 상관없다. 느낌상 ‘시민’이라는 말을 쓰게 된 거라도 문제 없다. 그 자체가 우리 안에 어떤 정치적, 인식적 변화가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다는 걸 의미할 수도 있다. 여기에 결부시키고 싶은 것이 한 가지 더 있는데, 공간적 배경에 대한 인식의 변화다. 여권에 명시된 국적보다, 자신이 속한 도시라는 배경이 자신의 권리와 삶의 질과 더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의 보편화다. 이는 도시라는 생활의 반경과 그 안의 건축, 시정, 더 작게는 주거 환경에 대해 점차 많은 사람이 관심을 두는 현상과도 상관이 있다. 『파노라마』는 이런 변화를 체현한 듯한 책이다. 건축을 전공한 이창원이 이 간행물을 처음 기획했다. 신문은 건축을 자산의 관점으로만 다루고, 전문 잡지는 어려웠다고 느꼈기 때문에 영화나 미술처럼 건축을 쉽고 재미있게 알아볼 수 있는 책을 만들고 싶었다. 『파노라마』는 매 호당 한 개의 버스 노선을 선정해서, 도시를 가로지르며 마주치는 건물과 장소를 소개한다. 이 역시 이창원의 아이디어였다. “어느 날 420번 버스를 타고 할아버지 집에 가는 길이었어요. 그런데 동대문 근처에서 강남으로 가는 길목의 건물들이 연대별로 잘 정리되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 노선에 있는 건물들을 정리해서 책을 만들면 서울 근대 건축의 역사를 정리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건축을 전공한 저도 건축물을 감상하기는 쉽지 않았어요. 일단 그 장소까지 가는 게 번거롭고, 내부에 못 들어가는 경우가 많아서요. 그런데 버스를 타고 건축을 감상하면 편하게, 그리고 가볍지만 쉽게 감상할 수 있잖아요. 그리고 또 일상의 공간에서 건축을 감상할 기회도 되니까 버스가 유용한 수단이라고 생각해요.” 이름이 ‘파노라마’인 것도 그래서다. “버스를 타고 주변을 바라보면 도시를 가로로 읽게 되잖아요. 파노라마 사진을 찍는 방법과 우리가 건축과 도시를 보는 시선이 비슷해서 ‘파노라마’라고 붙였어요. 매 호 버스 번호를 뒤에 붙여서 ‘파노라마 273’, ‘파노라마 463’, 이런 식으로 진행돼요.” 2013년에 창간한 『파노라마』는 총 4권이 나왔다. 1호는 420번, 2호는 273번, 3호는 463번, 4호는 150번 버스 노선을 따라간다. 그렇게 해서 1호는 서울의 원도심부터 신도심인 강남까지, 2호는 서울 내 여러 대학 권역, 3호는 한강 다리를 두 번 건너는, 4호는 경기 시흥부터 서울 도봉까지 잇는 여정이 되었다. 거기서 마주치는 도시 풍경과 건축물을 사진과 글로 기록했다. 7명의 에디터가 각자의 시선대로 글을 쓴다. 감상적인 글이 있는가 하면 정보가 촘촘한 글이 있고, 소설 형식을 빌려 건축을 소개하는 글도 있다. 다양한 형식으로 도시의 건축물과 건축가, 역사, 건물이 속한 풍경, 주거 유형과 환경, 그것이 삶과 연계되거나 단절된 모습, 욕망이 발현되거나 억압된 형상 등을 두루 읽어낸다. 분야의 전문가 및 다방면의 현업 종사자의 인터뷰를 싣기도 한다.

뭐가 그리 죄송해, 문학과죄송사의 시선
한 코미디 프로에서 나온 유행어가 있다. ‘나는 이런 농이 좋더라.’ 문학과죄송사 시선을 친구에게 보여주며 이 유행어를 자신 있게 써먹었다. 그렇다고 문학과죄송사가 장난이라는 의미는 아니고, 이름이 풍기는, 겸손함을 가장한 발칙함이 좋았던 것이다. 이런 기발한 농의 주인공은 박준범 시인이다. 하지만 정작 그에게는 어떤 도발적 의도는 별로(?) 없었다. “문학과 지성 시인선을 동경하기도 했고 문지 시인선의 표지 디자인이 갖는 권위 같은 것이 있어 보였기 때문에 그대로 따라 만들어 대형 서점의 문지 시인선 코너에 몰래 꽂아놓으면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자연스럽게 생각난 이름이 ‘문학과 죄송’이었습니다.” 그는 독어독문학을 전공했고, 이성복, 김경주, 기형도의 시, 그리고 영화감독 김기영의 시나리오 선집 1을 좋아한다. 가끔 공연장에서 노래를 하고, 그림을 그리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데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일하게 되어 여윳돈이 조금 생겼을 때, 뭘 할까 하다가 그동안 써놓은 시들을 엮어서 시집을 만들었다. 죄송문학상을 제정해서 직접 수상하기도 했고, 연말마다 죄송문학대상 시상식을 거행한다. 선정 기준은 무려 선착순. 문학과죄송사 시선 중 『강릉 하슬라 블라디보스토크』를 구매한 독자들에게는 추첨을 통해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배편 편도 티켓을 선물했다. 굿즈로 안전모, 고무장갑을 제작했고, 책이 나오면 문지시인선 코너에 꽂아두고 빨리 가져가라는 이벤트를 자주 하고 있다. 낭독회를 열기도 하고 음악가 친구들과 시에 음을 붙여 공연을 하기도 한다. 이쯤 되면 그에 대한 ‘감’이 오지 않나? 그에 대한 인터넷에 떠도는 파편적인 정보를 좀 더 긁어모아 보다가 그가 ‘일상과 예술의 경계의 공간’이라고 묘사된 내수동의 한평 극장에서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연극을 관람한 두 명의 관객 중 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한평 극장이라는 공간을 수식한 아홉 음절, ‘일상과 예술의 경계의’에서 시인에 대한 ‘감’은 확신이 되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감’이지만 그는 일상과 예술, 유희와 노동, 유의미와 무의미 사이에서 진자 운동을 하며, 진지한 건 장난으로, 장난은 진지한 것으로 둔갑시키는 데 일가견이 있는 사람일 것이다. 그의 시집 『PoPoPo』도 이런 유희적 실험의 일환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한국 근현대사의 텍스트들을 구글 번역기를 이용해 인위적으로 변형시킨 이상한 문장들을 시라고 우겨 만든 시집입니다. 구글을 현재를 상징하는 미디어로 놓고 일본어-영어-한글의 순으로 강제 번역하는 방법으로 근현대사의 타임라인을 확보해 현재의 미디어가 한국 근현대사를 소화하는 과정을 묘사하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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