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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테이블 위에서 춤춘다

에디터. 지은경 자료제공. 몽스북

한 미국인 교수와의 인터뷰에서 번역하기 어려운 한국 문화가 무엇이냐 물은 적이 있다. 한국에서 30년 이상 생활한 그는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된장찌개의 맛’이라고 대답했다. 듣고 보니 정말 그랬다. 된장찌개의 짭조름함과 재료의 깊숙한 곳으로 부터 우러나오는 구수함을 어떻게 말로 다 설명할 수 있을까. 하지만 된장찌개의 진정한 맛은 테이블 위에 놓이는 그 순간, 그 어떤 언어의 도움 없이도 자연스레 번역되어 각자에게 다가온다. 이것이 음식이 가진 힘일 테다. 언어적으로 완벽히 통하지 않는 관계도 맛있는 음식을 사이에 두고서는 얼마든지 교감하고, 충분히 깊어질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맛있는 것을 먹을 때 생각나는 얼굴, 그 사람이 바로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다.”
어떤 복잡한 인생사가 얽혀 있든, 괴로운 문제가 도처에 산재하든, 창가를 스치는 오후의 하늘에 문득 그리움이 밀려오든, 사람은 언제고 음식을 차리고 테이블 앞에 앉아 일용할 양식을 먹는다.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 누구에게나 이 시간이 필요하고, 한편으론 이 시간을 위해 인생을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애플 타르트를 구워 갈까 해』의 저자 박지원의 인생은 테이블 위에서 흐른다. 정확히는, 테이블 위에서 춤춘다. 기쁘면 기쁜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춤추듯 자연스럽고 유연하게 흐른다. 테이블 위에서 만나는 모든 마음과 대화가 그의 인생을 이루고 있다.
그 누구보다 화려한 삶을 살았던 디자이너 박지원. 뭇사람들은 패션 매거진 『보그』를 매달 장식하던 이야기들로, 좋은 분위기와 맛있는 음식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이던 추억의 레스토랑 ‘파크’로 그를 기억할 수도 있다. 때문에 암스테르담에서 아이들을 태우고 자전거를 끄는 모습, 노르망디 시골에서 자연을 벗삼고, 에르메스 버킨백 대신 바구니를 들고 숲으로 열매를 채집하며 살아가는 지금 그의 삶이 더욱 근사한 반전으로 다가올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박지원의 인생이 항상 달콤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녹록지 않은 타향살이에의 적응과 두 번의 이혼은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앗아갔고, 그의 마음 한편은 늘 아팠다. 사랑과 행복이 충만한 멋진 순간들도 있었지만 한없이 눈물 나는 아픈 시간 역시 수없이 많았다.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들은 테이블 위에서 진솔하게 흐른다.
“그저 두고 보기에 예쁜 그릇, 음식을 담아야 빛나는 그릇, 모양은 그래도 두루두루 쓰임새가 있는 그릇, 아끼고 아끼다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마음이 아픈 그릇, 이가 나가 쓰지도 않으면서 아쉬워 버리지도 못하는 그릇, 모양도 안 예쁘고 쓸모마저 없기에 버리고 싶은 그릇. (…) 수수한 외모가 고운 심성으로 돋보이는 사람, 만물에 박식해 정보가 많고 여러모로 도움이 되는 친구, 너무 완벽해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 명랑하고 명쾌해서 만나면 즐거운 친구, 괜스레 정이 가고 안쓰러운 친구, 정녕코 끊고 싶은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친구.”
박지원의 인생 무대는 어느새 런웨이에서 테이블로 옮겨왔다. 테이블을 둘러싼 그 모든 것이 자신의 이야기이고, 친구이고, 그가 삶을 대하는 태도다. 그는 인생을 타르트 굽기에 비유한다. 흔히들 자신의 의지에 따라 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다. 태어난 본바탕 위에 직접 터득하고 얻은 많은 것들을 각자의 의지로 덧입히며 살아가니까. 하지만 내 의지 대로 흐르는 듯하면서도 마음대로 되지 않아 실망하는게 우리네 인생이다. 이는 오븐 속 타르트의 운명과도 매한가지다. 일단 오븐에 들어가면 돌이킬 수 없다. 한 치 앞도 모르는게 인생이듯, 타르트 또한 어떤 모양과 맛으로 구워질지 알 수 없다. 아무도 모를 일, 언제나 미지수이기에 우리는 인생을 두려움과 설렘이 뒤섞인 감각으로 즐길 수 있는 게 아닐까? 가끔 서툰 결정과 불운으로 타르트를 망치면 또 어떠한가. 실수를 밑거름 삼아 다시 자신만의 타르트를 구우면 그만이다. 그러다보면 또 어떤 때는 상상도 못한 행운이 찾아오기도 할 것이다. 어차피 뜻대로 되는 완벽한 일이란 없다. 이는 숱한 경험 끝에 터득한, 박지원이 인생을 살아가는 그만의 레시피이기도 하다. 그 래서 그는 오늘도 마음을 가다듬고 타르트를 굽는다.
“밀가루 반죽으로 만든 파이 도우는 우리의 태생이다. 옷을 입지 않은 우리의 모습에 이런저런 고명이 얹혀진다. 어떤 이는 늘 하는 대로 쓰던 재료를 올려 끝을 내고, 어떤 이는 다양한 재료에 디자인을 더하고 사용해 보지 않은 과감한 재료까지 얹어 시도해보기도 한다. 그 이후 오븐을 예열한다. 이 과정부터 타이밍이라는, 운명을 결정하는 또 다른 중요한 요소가 나타난다. 적당히 예열한 오븐에 타르트를 넣어 굽는데 이때부터는‘운명’에 맡겨야 한다. 일단 오븐에 들어가면 돌이킬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예측 가능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온도와 설탕, 펙틴 같은 성분이 만나 이루어지는 화학 작용, 과일의 종류에 따른 탄성과 수분의 농도, 그 외에도 한두 가지 마술이 추가된다.”
때때로 우리는 삶이 시시한 순간들의 연속이라 여긴다. 그러나 섬세한 문장들로 엮은 이 책은 삶이 실은 반짝이는 시간들로 채워진 소중한 것임을 다시금 일깨운다. 절망스럽거나, 서운하거나, 외롭거나, 슬플 때조차도 나름의 의미가 있음을, 그리고 언제나 선물 같은 깊은 성찰로 귀결됨을 보여준다. 한때는 마음을 할퀴고 후비던 감정들 마저도 결국 또 다른 사랑을 깨닫기 위한 이정표였음을 알게 된다.
인생에서 만나는 사람들, 순간들, 감정들은 흘러가고 다시 흘러온다. 그리고 모든 기억들은 우리가 마주하는 테이블 위의 음식들과 함께 흐른다. 그러니 최선을 다해 오늘의 타르트를 구워보자. 이것 말고 더 이상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오늘의 타르트가 놓이게 될 테이블 위에서 그 흐름에 따라 춤추면 된다. 오븐 속에서 멋진 마법이 일어나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May22_Inside-Chaeg_02_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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