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eg’s cho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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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uary, 2020
이것이 인간인가
Editor. 전지윤
글은 말보다 느리지만 친절하고 명확합니다. 듣기 싫은 말은 귀를 닫으면 그만이지만, 글은 오히려 반추할 시간을 줍니다.
법정 스님은 좋은 책을 읽고 있으면 내 영혼에 불이 켜진다고 했지요. 그러려고 읽어요.
이런 일이 있었음을 생각하라. 당신에게 이 말들을 전하니 가슴에 새겨 두라. (…)당신의 아이들에게 거듭 들려주라.
프리모 레비Primo Levi는 화학자이자 현대 이탈리아 문학의 대표작가 중 한 사람이다. 그의 첫 작품인 이 책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생환한 후 당시 수용소에서의 삶을 기록한 것이다. 이 책에서 프리모 레비는 가스실의 처참함이나 상세한 구타와 폭력을 극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심지어 그는 가스실의 잔악무도함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했기 때문에 증언하지 않았고, 만행과 학살을 자행한 그 누구에게도 증오나 분노를 표현하지 않는다. 그의 절제된 언어는 차라리 울부짖는 게 마음 편하겠다는 생각도 든다. 비슷한 상황에 놓여본 적도 없으니 고통의 정도를 가늠할 수조차 없지만, 담담하게 기록한 순간순간의 참담함이 고스란히 드러나서 더욱더 그렇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가는 기차 안은 무(無) 혹은 죽음을 목적지로 한 사람으로 가득했고, 배고픔에 울부짖는 아기를 안은 여자들의 애원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문에 쓰인 ‘노동이 자유케 하리라Arbeit Macht Frei’라는 문구는 죽을 때까지 노동하고 죽음으로써 비로소 자유로우리라는 조롱 섞인 환영이었다. 그리고 프리모는 단테가 『신곡』에서 그리는 지옥을 떠올리게 한다. 기차에서 며칠간 해갈하지 못한 채 끌려와 수용소 막사에서 수도꼭지를 마주했을 때, 그는 자신이 지옥에 있으며 ‘살아있다’ 하기에 너무 처참하다는 것을 재차 깨닫는다. 수용소는 그렇게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들을 송두리째 뺏고, 더 이상 생각하거나 기억하며 이해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게 만든다.
이것은 지옥이다. 오늘날, 우리 시대의 지옥이 틀림없이 이럴 것이다. 우리는 크고 텅 빈 방에 지친 채 서 있고 수도꼭지에서는 물이 똑똑 떨어지는데 그 물을 마실 수 없다.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더 이상 생각을 할 수도 없다. 우리는 죽은 사람들 같다. (…)시간이 한 방울씩 흐른다. 하지만 자신의 운명이 위태로울 때 이성적일 수 있는 인간은 매우 드물다. 운명이 위태로울 때 사람들은 극단적인 태도를 취한다. (…)그러나 나는 바닥에 있다.
씻겠다는 욕구를 일주일 만에 잃어버렸다는 고백은 놀랍도록 솔직하다. 흙탕물로 더러운 세면대에서 몸을 씻는다는 것은 청결과 위생을 위한 목적이 아니라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수단이다. 그러나 수용소의 생활은 단 며칠 사이에 씻으려 움직이는 것도 노동이며 에너지 낭비라고 체념하게 만들었다. 그런 프리모에게 ‘씻어야 한다’고 설득한 이는 이미 다른 전쟁에서 생환한 전적이 있고 훌륭한 군인이었던 슈타인라우프이다. 그가 인간다움, 즉 존엄함을 잃지 않으면서 살아남겠다는 의지를 갖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할 수 있었던 것은 또 다른 형태의 지옥인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온 경험에서 비롯한 것일까.
‘이것이 인간인가’란 프리모와 같은 상황에 처해있었던 이들(학살이 자행되었던 수많은 시설뿐 아니라 위안부, 소년병, 전쟁과 테러의 피해자들은 물론 현재에도 인권 말살의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 수없이 되뇌었을 물음이다. 수용소에서 인간이 아닌 채 목숨을 부지하며 멀건 죽과 마른 빵 한 조각에 목숨을 걸고, 구둣발을 피하며 잠시 노역을 쉬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이들을 프리모는 비인간들이라 한다. 그리고 그 비인간의 하나인 자신의 모습과 너무 닮은 모습을 “우리 시대에 악을 형상화한 이미지”라고 한다. 문득 C. S. 루이스가 쓴 『나니아 연대기』에서 ‘초록색 옷을 입은 여인’ 에게 끌려와 동굴을 파는 데 이용당한 비슴 왕국의 지하인들이 떠올랐다. 강제로 끌려와 자신의 정체성을 포기하고 눈과 귀를 틀어막은 채 생존하고 있는 지하인들에게서 나는 섬뜩함과 무서움을 생생히 느꼈었다.
신성한 불꽃은 이미 그들 내부에서 꺼져버렸고 안이 텅 비어서 진실로 고통스러워할 수도 없다.그들을 살아 있다고 부르기가 망설여진다. 죽음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지쳐 있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들 앞에서, 그들의 죽음을 죽음이라고 부르기조차 망설여진다.
한 막사에서 생활한 가여운 노인이 죽어 몸이 바닥에 부딪히며 떨어지는 소리가 나도 아무도 일어나지 않는다. 비누가 없어서 시신을 만진 뒤 손을 씻을 수 없으니 일단 음식을 먹고 필요한 것을 해결한 뒤 시신을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일상과 죽음, 인간의 존엄이 마구 섞여 있는 때에 프리모 레비는 자문했던 것이다. ‘이것이 인간인가.’ 그리고 그는 오늘 우리에게 다시 생각해보라 한다. 이것이 인간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