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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tember, 2015
음악 좀 듣는다는 당신 II
Editor. 유대란
금요일이 되면 어김없이 친구들과 단골 LP바에 우르르 몰려가서 맥주를 시킨다. 그리고 누군가 메모지를 갖고 와서 신청곡을 작성할라치면 우리는 돌연 음악을 둘러싼 장르논쟁에 돌입한다. 존 본조비의 음악을 어떻게 락으로 분류할 수 있나, LA 메탈은 메탈이 아니다, 아트락이 어쩌고 저쩌고. 누가 들으면 참 쓸데없기 짝이 없는 이야기들이다. 그런데 이 짓거리를 몇 년째, 주말마다 하고 있다. 음악 좀 듣는다고 자부하는 우리에겐 내한을 앞둔 본조비가 진정한 락커 축에 끼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폴 맥카트니와 존 레논 중에 누가 더 재능 있는 아티스트냐란 질문이, 비욘세가 에타 존스의 음악을 제대로 리메이크했느냐의 논쟁이 마치 불경기의 연봉협상만큼이나 중요하고 시급한 것이다. 음악 좀 듣는다는 당신이라면 공감할 거라고 생각한다. 이런 당신이라면 탐독할 만한 책들.
“이념적 성향을 뒤로하고 대중의 ‘업’을 지향하는 대중음악 특유의 접근법은 대공항 이후 제2차 세계대전 동안에 절로 춤을 추게끔 만드는 스윙재즈의 폭발적인 인기로도 알 수 있다. 총성과 폭격이 난무하는 전시에, 정신줄을 바짝 죄어야 하는 상황에서 미국인과 유럽인들은 베니 굿맨과 글렌 밀러의 스윙 음악에 발을 굴렀다.” —본문 중
음악 방송에 출연한 임진모 평론가는 고리타분한 잿빛 양복에 타이핀까지 하고 나와서 우리를 자주 경악케 하지만 누가 뭐래도 그는 틀림없는 최고의 음악평론가다. 가끔 썰렁한 농담을 던지고 휑한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혀 반짝이는 머리가 더 반짝거리는 안쓰러운 모습을 보일지라도 음악에 대한 그의 해박한 지식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 그런 진가는 특히 저서들에서 드러난다.
임진모의 『팝, 경제를 노래하다』는 팝의 명곡들을 통해 193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의 경제사를 훑어보는 흥미로운 시도다. 전제는 ‘음악이 시대를 반영한다.’ 시대성이라고 하면 흔히 정치적 맥락에서 해석하거나 관념적 언어로 뭉뚱그려지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이 책은 그런 틀을 탈피한다. 문화적 배경과 경제적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해당 시대의 가수와 대표곡, 그리고 가사를 제시하고 분석함으로써 매우 구체적인 근거와 흥미로운 해석의 틀을 마련한다. 이를테면 대공항 시대에 인기를 얻었던 주디 갈란드의 곡 ‘봄날이 다시 왔도다’는 당시의 ‘금주법 폐기’와 ‘뉴딜정책’과 관련 짓고 비치 보이스로 대변되던 1960년대의 서핑 뮤직을 ‘아메리칸 드림’과 연결시킨다.
이 책의 또 다른 미덕은 독자가 설명과 함께 음악을 같이 들어볼 수 있도록 세심하게 배려한 데 있다. 이 책은 챕터별 소개하는 곡마다 큐알코드를 심어놓아서 독자가 스마트폰을 이용해서 해당 음악을 바로 들어볼 수 있게 했다. 가사와 설명도 중요하지만, 결국 음악은 들어봐야 아는 것 아니겠는가. 덧붙이자면, 이 책은 굳이 음악마니아가 아니어도, 20세기 경제사를 좀 더 쉽게 알아보고 싶은 모든 이들에게 추천할 만하다.
“ECM애호가들이 ‘가장 좋아하는 ECM 커버 아트’ 중의 하나로 꼽는, 전설의 커버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어두운 도로에 ‘좌회전(Turn Left)’이라고 쓰여진 이미지는 새로운 음악적 지향을 선명히 선언하며 음악 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커버 이미지는 독일의 그래픽 아티스트인 게르트 비너가 만들었으며, 사진작가 디터 렘이 전체적인 디자인을 맡았다.” —본문 중
만 장이 넘는 음반과 함께 살고 있는 음악 애호가 류진현이 들려주는 ECM의 명반들에 대한 이야기다. ECM은 독일의 음반사로서 재즈와 클래식을 넘나드는 세계 정상의 레이블이다. ECM에서 앨범을 낸 아티스트들 중 국내에서 비교적 잘 알려진 이름은 키스 재럿과 팻 메시니다. ECM은 그 밖에도 칙 코리아, 아트 앙상블 시카고, 찰리 헤이든을 비롯한 거장들의 천 장이 넘는 앨범을 세상에 내놓았다.
다양한 레퍼토리와 수준 높은 녹음기술로도 정평이 났지만 ECM의 최고의 매력은 뭐니 해도 독특하고 절제된 커버 아트다. 『ECM TRAVELS』는 그런 매력을 십분 발휘한다. 이 책은 한 페이지에 커버 아트 한 점을 수록함으로써 앨범 커버를 음악 못지 않은 중요하고 독립적인 작품으로 제시하며 독자의 감상을 유도한다. 저자 역시 커버 아트에 대한 설명을 빼놓지 않고 있다. 재즈나 클래식 팬은 물론이고 음악 팬이 아닌 누구라도 감탄할 만한 디자인과 아트워크가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이 책은 ECM 팬들이라면 꼭 소장하고 싶은 아이템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도 커버 아트를 접한 후라면 음악을 들어보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드는 자극제 같은 책이다.
그래서 이 책이 선사하는 경험을 전통 있는 냉면집에서 즐기는 선주후면에 빗대어 이야기하고 싶다. 냉면을 목적으로 찾아간 곳에서 술 한 잔을 걸친 다음에, 마침내 시원한 냉면을 맛보는 그런 즐거움에. ECM을 즐기는 한 방법도 이런 것이다. 선 시각, 후 청각.
“그해 겨울에는 그 누구도 젊은이들에게 ‘미안하다’ ‘애썼다’ ‘고생했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아침형 인간이 되어 더 열심히 뛰라고 했을 뿐이다. 그래야 대기업에 들어가고 대통령도 할 수 있다고 말이다. 이때 <앵콜요청금지>는 차라리 위로였다. 우리는 온통 지랄 맞은 시간들을 비켜갈 수 없다. 그대로 관통해야 한다. 그러니 모두에게 럭키를. 21세기의 청춘송가는 그렇게 탄생했다.” —본문 중
현재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음악평론가 차우진. 그가 여러 매체에 기고했던 글들을 ‘청춘’을 테마로 엮었다. 하지만 ‘청춘’ 자가 들어가는 많은 책들이 그렇듯 구태의연한 무용과 추억만을 담은 것은 아니다. ‘헝그리 정신’을 담은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이 책이 다루는 것은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음악’이 아닌, 청춘 자체와 21세기 청춘에 의한, 청춘을 위한 음악들이다.
브로콜리 너마저, 장기하, 불나방 스타 쏘세지 클럽, 하헌진, 10cm를 포함한 29명의 아티스트의 음악을 통해 저자가 짚어보는 것은 현재 청춘들 속에 내재한 마음의 단면들이다. 이들은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을 지니고 있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 어른이 되기를 유예하고자 하고, 주체적인 잉여로서 생존하는 방법을 모색해보는 과정에서 기쁨과 자조를 동시에 느낀다. 저자는 이런 청춘의 일원이자 관찰자로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성장을 응원한다.
21세기 청춘의 음악은 자체만으로도 흥미롭지만 그것이 소비, 수용되는 양상도 못지 않게 흥미롭다. 평론가로서 차우진의 강점이 발휘되는 것은 이 부문에서다. 2000년대 들어 온라인 위주로 완전히 재편된 음악 시장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적인 측면을 그만큼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는 평론가는 드물다. 그는 온라인이 탄생시킨 완전히 개방적이지도, 그렇다고 엄격하게 사적인 곳도 아닌 블로그, SNS 같은 공간들과 메신저, 홈레코딩의 보편화, 앨범의 ‘가내수공업화’ 등의 현상이 음악생태계에 어떻게 개입하고 21세기 ‘청춘의 사운드’의 정체성에 뿌리내렸는지 들려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