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이란 ‘한’을 ‘흥’으로 풀어내는 것이야.” 신(神)빨 떨어진 세 명의 무당들이 프리스타일 굿판을 벌인다는 내용의 영화 〈대무가〉에 나오는 대사다. ‘한’과 ‘흥’은 한국무용이나 창, 판소리 등 우리나라 전통 문화예술 분야를 논할 때 자주 쓰이는 표현이기도 하다. 이는 거듭되는 전란과 빈한 속에서도 삶의 여유와 풍류를 즐길 줄 알았던 우리 조상들의 ‘해학’에서 비롯되었다. 아무리 어렵고 부조리한 현실일지언정, 웃음을 잃지 말자는 너른 태도가 곧 우리의 오랜 본능인 셈이다. 인간의 숙명이라 할 수 있는 희노애락은 시대와 나라를 막론하고 다양한 형태의 예술로 승화되어왔다. 그런데 인간이 느끼는 감정을 한과 흥을 갖춘 이중구조적 성격의 이미지로 표출한다는 것은, 분명 또 다른 차원의 지혜와 역량을 요하는 작업인듯 보인다.
해학의 사전적 의미는 “익살스럽고도 품위가 있는 말이나 행동”으로, ‘화합하다’라는 뜻의 해(諧)와 ‘희롱하다’라는 뜻의 학(謔)이 합쳐진 단어다. 희극적 웃음이 우스운 상황이나 우스꽝스러운 행동으로 인한 것, 다시 말해 타인의 열등함을 보는 것에서 비롯되는 웃음이라면 해학적 웃음은 자조적인 것, 즉 웃음의 동기가 자신의 본성으로부터 우러난 것이다. 이 같은 해학의 정서는 외국인은 쉬이 해석할 수 없는, 수천 년 동안 우리 한국인들의 가슴속에 자리한 특별하고도 보편적인 정서이다.『미술로 보는 한국의 미의식 2: 해학』은 한국미술을 강인함과 유연함이 넘치는 한국인의 ‘해학’이라는 미학적 관점에서 조명하는 책이다. 무엇보다 이 책의 남다른 가치는 우리 미술 작품들 뿐만 아니라 주변 국가인 중국과 일본, 그리고 서양의 작품들과 비교함으로써 세계미술사의 흐름 속 한국미술의 독자성을 명징하게 보여준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이런 부분들이다. 장승은 재앙을 막고 평화를 지키는 목적으로 마을 입구에 세워 두던 조각상으로, 악을 징벌하면서도 포용하려는 한국 특유의 해학미가 돋보인다. 통일신라와 고려 시대에 민간신앙으로 자리잡은 장승은 오랜 세월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의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조선 말기 한반도를 찾았던 선교사들은 그들의 유일신 신앙에 따라 한국의 장승 문화를 망령된 우상숭배로 여겼고, 우리 민속신앙을 계몽의 대상으로 간주했다.
하지만 알고 보면, 피카소나 마티스를 비롯해 19~20세기 예술가들이 이끌던 서양의 현대미술은 민속신앙이나 주술신앙이 주를 이루던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원시미술로부터 오히려 큰 영향을 받았다. 서아프리카의 ‘단 가면Dan Mask’이 피카소에게 영향을 주었는가하면 인간의 본능에 관심이 많았던 독일의 표현주의 화가 에밀 놀데는 동남아시아의 원시미술에서 영감을 얻었다. 또한 그의 작품 중 〈선교사〉는 조선 시대에 만들어진 인천 소재의 만수동 장승을 모델로 그린 것으로, 장승 모습을 한 선교사 앞에 무릎 꿇고 있는 아프리카 여인을 담고 있다.
책은 조선 시대 풍속화를 서양의 리얼리즘 관점에서 재조명하기도 한다. 농업 기술이 발달하고 상공업이 성장했던 조선후기에는 양반 중심의 기존 신분질서가 와해되었다. 문인화가 윤두서는 이러한 사회 분위기를 작품에 잘 녹여냈다. 아름다운 풍경을 배경으로 양반들이 휴식을 취하는 장면이 아니라 농민들이 한가로이 낮 시간을 보내는 모습들은 그야말로 조선판 리얼리즘 그 자체다. 저자는 이를 프랑스 혁명 이후 신흥세력으로 성장한 부르주아 남성들과 나신의 창녀를 그려 당대 상류사회의 위선을 리얼하게 묘사한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에 비견한다.
윤두서가 남긴 여러 점의 풍속화 중 하나인 〈돌 깨는 석공〉은 고상한 선비들이 노니는 자리 옆에 돌을 깨고 있는 농민의 모습을 그린다. 농민들은 역동적인 자세로 노동의 즐거움을 표출한다. 18세기 초에 그린 〈나물 캐기〉에서는 두 여인이 가파른 산에서 나물 캐기에 몰두해 있다. 이들 역시 적극적으로 주위를 살피는 듯 보인다. 김홍도의 〈벼 타작〉 속 인물들도 일에 심취해있지만 밝은 표정을 띠고 있다. 이들을 관리해야하는 마름만 지루한 얼굴로 담배를 피우고 틈틈이 술을 마신다. 이 작품들과 함께 감상할 만한 서양화가의 작품으로는 서양의 리얼리즘을 처음으로 주장한 귀스타브 쿠르베의 〈돌 깨는 사람들〉, 서구 리얼리즘의 거장 중 한 명인 장 프랑수아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 〈여름, 밀을 타작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의 그림 속 석공들이나 이삭 줍는 여인들에게선 즐거움이나 희망을 찾아보기 어렵다. 특히 밀레의 그림은 일하는 사람들의 표정을 도저히 읽을 수 없게 어두운 색으로 채색되어 무겁고 암울한 분위기를 풍긴다. 쿠르베나 밀레보다 한 세기 반 이상 앞선 윤두서와 김홍도의 풍속화는 현실을 대하는 우리 고유의 태도와 자세를 포착하여 한국미술의 리얼리즘을 잘 보여준다.
조선 풍속화에 담긴 해학의 시조는 신윤복으로 이어진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주로 그렸던 그의 작품 중 대표작은〈월야밀회〉다. 한밤중 골목에서 밀회를 즐기는 이들은 전복 차림의 포도청 관료와 한 여인이다. 담 옆에서 이들의 망을 봐주고 있는 여인은 기생일 것이다. 신윤복은 유유자적 여유를 즐기는 귀족들의 모습이 아닌 엄격한 사회적 규율 뒤에서 벌어지는 인간 본능의 솔직한 이야기들을 과감하게 그렸다. 이러한 리얼리즘의 성격은 18세기 유럽에 등장한 로코코 미술과 통하는 면이 있다. 이 시기에는 왕실의 권위가 약해진 틈을 타 권력을 잡은 귀족 계급의 사치스럽고도 퇴폐적인 사랑을 다룬 작품들이 많은데, 그중 프라고나르의 〈훔친 키스〉는 커튼 뒤 가려진 발코니에서 한 청년이 여인의 손목을 잡아당기며 키스를 하고 있다. 오른쪽에 반쯤 열린 방 안에는 여인들이 모여 있는데 이러한 구도는 두 남녀의 사랑이 비밀스러운 행동임을 암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