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eg’s choice
책이 선택한 책
March, 2018
우연한 발견, 그리고 책
Editor. 김지영
외로움을 이겨내는 훈련을 하고 있다.
책 기피증을 앓았다.
파마가 망했다.
책 기피증이 나날이 심해져 결국 앓아버렸다. 책장에 꽂힌 책들이 전부 같잖아 보였고, 내가 그저 지식인인 척, 문학소녀인 척하기 위해 저 책들을 읽은 건 아닌가 자책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직업을, 좋아하는 책을 내팽개치고 완전히 등 돌려 살 자신이 없어 앓던 병을 치료하기로 마음을 다잡았다.
초등학교 때 ‘N세대 소설’이라 불렸던 문학이 서점가를 휩쓸었다. 당시 동네에 서너 곳 정도 있던 만화방에서는 N세대 소설을 무협 소설과 함께 장르 소설로 이름 붙여 분류하고 대여료는 만화책보다 백 원 비싸게 받기도 했다. 학교가 끝나면 만화방에 뛰어가 읽고 싶은 소설이 있는지, 먼저 빌려 간 사람이 반납했는지, 신간이 들어왔는지 확인 후 원했던 책이 있으면 빌려와 그날 밤을 새워 다 읽었다. 한 권으로 끝나지 않는 소설의 경우 아침 일찍 학교 가는 길에 만화방에 들러 다음 호를 빌렸던 기억도 흐릿하게 남아 있다. 책을 좋아하기 시작했던 게 아마 그즈음이었던 것 같다.
그간 숨기고 있던 ‘덕내(덕후의 기운 혹은 냄새)’를 한껏 풍겨보자는 심산으로 라이트 노벨에 도전장을 던졌다. 워낙 낯선 장르여서 몇 가지 기준을 세워 최대한 내게 맞는 책을 골라야 했다. 덜 부담스럽고, 덜 연애소설이고, 덜 선정적이고, 덜 삭막한 책. 이 기준에 부합한 책을 찾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인터넷 서점 라이트 노벨 신간 도서 목록에서 열 페이지가량을 넘기고 나서야 그나마 관심이 가는 책을 발견했다.
스미노 요루의 『또다시 같은 꿈을 꾸었어』는 한 권으로 끝나는 소설이라 덜 부담스럽고, 연애 소설도 아니고, 표지 이미지와 내용도 전혀 선정적이지 않고, 조금은 삭막해 보일 수 있으나 나름대로 분위기가 있어 기준에 부합하는 책이었다. 이 책의 저자는 최근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로 한국에서 주목받은 작가다. 자주 듣는 팟캐스트 <낭만서점>을 통해 알게 된 작가라 낯설지 않았다는 점도 소설을 선택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주인공 나노카가 꼬리가 잘린 고양이와 함께 미나미 언니, 아바즈레(‘あばずれ’는 닳고 닳은 여자라는 뜻) 씨, 동네 할머니를 만나러 다니고 그들과 함께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고민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큰 갈등의 굴곡이 없는 잔잔하고 소소한 이야기가 이어지지만, 잔잔함 속에 보일 듯 말 듯 드러난 이해할 수 없는 몇몇 사건이 소설 후반부의 반전을 예고해 흥미진진하다. 큰 기대를 품지 않고 읽었지만 잘 만들어진 일본 애니메이션 한 편을 본 듯해 나름대로 만족스러웠다.
소설의 중심이 되는 ‘행복’이라는 키워드는 언제나 난해하다. ‘당신은 지금 행복한가요?’란 질문에 언제나 우물쭈물 꿀 먹은 벙어리마냥 뜸 들이다 결국 대답을 못 한다. 오히려 지금보다 어릴 때 행복에 대해 마음 편히 이야기할 수 있었다. 작년이 올해보다 더 그렇고, 아마 내년보다 올해가 더 쉽지 않을까. 나이가 들수록 어려워진다. 10살이 되기 전에는 맛있는 푸딩이 눈앞에 있으면 행복했고, 10대에는 친구들과 함께라 행복했다. 어렵게 말을 꺼내자면 20대인 지금은 앞으로의 일을 고민하고 지금의 일을 누릴 수 있어 행복하지 않나 싶다.
아무리 어지럽게 엉킨 실타래라도 천천히 풀어내다 보면 그 끝에 매듭이 있고, 그 매듭만 잘 풀면 온전한 실타래가 된다. 어쩌면 소설 속 나노카, 미나미 언니, 아바즈레 씨, 할머니 모두 그 매듭을 풀기 위해 나노카를 찾아온 게 아닐까. 나노카가 그 매듭을 조심스럽고 올바르게 풀어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말이다.
내가 책 기피증을 앓은 건 책이 싫어서가 아니라 앞으로의 삶을 어떻게 꾸릴 것인지 고민하던 차에 지금의 삶이 만족스럽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해서였다. 되는대로 살아왔던 지난 시간 동안 내 선택에 후회는 없지만, 지금이라도 엉킨 실을 풀어야 한다. 적어도 이 소설을 읽었으니 조금은 덜 어려우리라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