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ic : 이달의 화제

우리는 이야기에서 태어났다

에디터 : 신동흔, 김수미, 김화경, 전지윤, 이후남

무수히 많은 것들에 ‘K’가 상찬처럼 수식되는 요즘이다. 그렇다면 K를 관통하는 특징은 무엇일까? 우리를 함축적으로 규명할 수 있는 정체성이란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그 답을 구하기 위해 오랜 시간 우리의 정서를 구성해왔으며, 우리가 창작해내는 많은 것들에 깃들어 있을 오래된 서사들에 주목해본다. 긴긴 시간 동안 가져온 신념과 이상부터 크고 작은 감정의 알고리즘까지 간파하는 힘이 바로 이 이야기들 안에 있을 거라는 믿음으로. 월간 『민화』가 큐레이션한 작품들과 함께 ‘우리’의 윤곽을 또렷이 해줄 한국의 대표 서사들을 만나보자.
1-호랑이를 보내고, 토끼를 맞으며
옛이야기에는 수많은 동물이 등장한다. 특별한 이미지와 존재성을 지닌 동물은 인상적 화소motif로 작용해 마음에 깊이 각인되면서 의미를 발현한다. 그중 한국 설화에 자주 나오는 동물은 호랑이, 여우, 용, 뱀, 이무기, 토끼, 쥐, 개, 고양이, 소, 말, 너구리, 지네 등 이다. 그중에도 호랑이 이야기는 유형이 다양하고, 가짓수도 많다. 등장하는 호랑이들의 이미지가 극과 극으로 상반될 정도로 다면적이라는 점도 눈길을 끈다.
신화와 전설, 민담에 걸쳐 널리 전승되어온 이야기들 속 감히 대적할 수 없게 막강한 위력을 가진 호랑이는 흔히 자연의 힘을 표상한다. 민간에서 호랑이의 별칭이 ‘산신령’이었던 만큼, 한국 자연신 신앙의 중심에 있는 동물인 셈이다. 이런 호랑이의 모습은 한국의 산신도에서도 드러난다. 대부분 산신도에는 나무와 바위 등이 있는 산을 배경으로 신선을 닮은 노인과 호랑이가 서로 몸을 맞대고 있는 장면이 담겨 있다. 대개 남성이지만 종종 여성이기도 한 그림 속 노선(老仙)과 호랑이는 같은 존재로 볼 수 있다. 호랑이와 노인이라는 두 모습을 통해 산(자연)이 가진 무서운 공격자이자 신령한 수호자로서의 양면성을 표현한 것이다.
산신도에서 볼 수 있는 호랑이의 양면성은 여러 종류의 옛이야기 가운데 전설에서 특히 도드라진다. 호랑이를 만나서 끔찍하게 죽임을 당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호랑이의 도움으로 난제를 해결하는 이들도 있다. 호랑이는 특히 효자나 열녀 등 인간의 도리를 다하려는 인물을 돕곤 한다. 몇 해 전 답사에서 만난 한 사람에게서는 이런 말을 듣기도 했다. “예로부터 호랑이 앞을 서면 죽고 뒤를 따르면 산다고 했어요.” 이처럼 인간의 길과 하늘의 길을 잇 는 전설 속 호랑이는 자연의 힘과 ‘천리(天理)’를 표상한다. 오만이 아닌 겸손, 공격이 아닌 존중으로 신적 섭리를 따르는 것이 인간의 바른 길이라는 뜻이다.
2-삼국유사, 이야기의 힘은 흐른다
작은 아이였을 무렵, 밤이 되면 “옛날 옛날에”로 시작되는 이야기를 기다리곤 했다. 모든 순간이 새롭고 놀라워서 터져 나오는 에너지를 내뿜어야만 직성이 풀리던 어린이에게 캄캄하게 저문 밤은 너무도 적막해서 어딘가 어색하고 두려웠다. 우다다 뛰어대던 발소리도, 명랑하게 터뜨리던 웃음도 주춤하게 되는 그 시간이 어김 없이 찾아오면, 옛이야기 속 엉뚱하고 떠들썩한 이야기들을 불러와 달라고 청하곤 했다. 발화자로 지목된 엄마, 아빠 혹은 할머니는 아이가 안심하고 까무룩 잠이 들 때까지 기억 속 사금 같은 이야기를 캐어 긴긴 시간 들려주었다. 이렇듯 누군가의 입에서 누군가의 기억으로, 그리고 다시 말과 글로 번져가며 생명력을 이어온 이야기들은, 그 내용만이 아니라 이야기가 전해지는 시간 동안 행해졌던 심리적 기능 면에서도 분명 높은 가치를 지닐 것이다.
일연은 이러한 이야기의 힘을 진즉 꿰뚫어 본 인물이 아닐까 싶다. 일연은 국사(國師, 나라의 스승이 될 만한 승려에게 조정에서 내리던 칭호)로 책봉될 정도로 고려 왕실과 불교의 정신적 중추였으며, 존경받는 어른이었다. 그런 그가 청년 시절부터 모아온 자료를 바탕으로 70대 후반에 집필을 시작해 만년에 펴낸 역사서 〈삼국유사〉는 민중들의 삶 속에 전해오는 신화, 설화, 전설, 향가 등을 포괄하는, 한 마디로 옛이야기 책이다. 5권이라는 방대한 분량의 책을 그가 공들여 펴낸 이유는 무엇일까? 〈삼국유사〉보다 앞서, 왕명에 따라 발간된 〈삼국사기〉가 빠뜨렸던 우리 이야기를 그러모으기 위함이었다. 당대의 지식인이 유학적 관점에서 집필한 〈삼국사기〉는 왕과 중국 중심적으로 기술된 면이 있었고, 우리나라의 전통 자료와 문헌들을 배제하거나,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 왜곡·누락하기도 했다. 반면 몽골의 간섭과 수탈, 무신정권의 폐해로 오랫동안 고통받은 이들을 일으켜 세울 우리 이야기가 절실했던 일연은 우리 민족의 뿌리와 자부심이 깃든 새로운 역사서를 쓰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삼국유사〉에 담긴 다양한 설화와 종교적 신화는 책의 운명을 기구하게 만들기도 했다. 〈삼국유사〉를 단지 허황된 세속의 이야기라고 여기던 시선은 성리학이 지배 이념으로 확고히 자리 잡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 더욱 거세졌고, 결국 〈삼국유사〉는 잊히다시피 했다. 모순되게도, 임진왜란 때 약탈당한 판본이 일본에서 19세기 말부터 일본 고대사 연구와 조선 식민지 경영의 맥락에서 관심을 받아 20세기 초, 현대식으로 출판되었다. 이를 접하고 소개한 최남선에 의해 〈삼국유사〉는 다시 우리 땅에서 빛을 보게 되었다.
후대의 많은 사람들이 〈삼국유사〉에 담긴 우리 민족의 인간관, 자연관, 세계관을 알아본 덕분에 오늘날에는 비로소 그 위상을 되찾았다. 소설가 김훈은 〈삼국유사〉에 대해 “일연은 부서질 수 없고 불에 탈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썼다. 이것이 당대의 야만에 맞서는 그의 싸움이었다”고 말했으며, 아티스트 백남준은 자신이 〈삼국유사〉에 엄청난 애착을 갖는 이유로 “인간의 판타지도 역사가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책”이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지난해 타계한 이어령 선생 역시 한국 최고의 고전으로 〈삼국유사〉를 꼽은바 있다. 작년 말에는 연세대학교가 소장하고 있는 ‘파른본 삼국유사’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3-한국의 여신들이 말하는 것
19세기 스위스의 법제 사학자이자 문화 사학자였던 요한 야콥 바흐오펜Johann Jakob Bachofen은 가부장제가 성립되기 이전, 모든 일을 여성이 주도하는 ‘모권제 사회’가 존재했을 것이라는 가설을 제시했다. 당시의 여건에서는 생각하기 어려웠을 이 획기적인 가설을 정립하는 데에 결정적인 단서가 된 것은 다름 아닌 그리스 신화였다. 그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가이아’나 ‘아프로디테’ ‘아테나’‘데메테르’ 등과 같은 여신 위주의 신화로부터 여성들이 지배하던모권제 사회의 잔영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바흐오펜의 가설은 상당한 타당성을 가진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먼저 성립된 신에 대한 관념이, 모든 생명을 잉태하는 ‘땅’을 어머니로 여기고 숭상하는 지모신(地母神) 사상이었기 때문이다. 사냥이 주된 경제 활동이었던 구석기 시대에도 생명을 탄생시키는 여성, 즉 어머니가 부(富)를 만들어내는 존재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그래서 자연에 대한 의존은 어머니에 대한 숭배라는 관념을 낳았고, 부를 가져다주는 대지모신Great Mother에 대한 신앙이 종교의 중심이 되었다.
지모신 숭상은 후기 구석기 시대부터 산업화가 이루어지기 이전까지 한반도에서도 널리 존속되었는데, 시골 지역에서 더러 행해지던 민속문화인 ‘아이 팔기’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여기에서 ‘팔다’는 ‘맡기다’라는 의미로, 아기가 무사히 성장할 수 있도록 대지가 나서서 보호해달라는 신화적 사유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와 같은 지모신 사상을 잘 드러내고 있는 대표적인 이야기기로는 제주도에서 구전되는 설문대할망―우리 말에서 ‘할망’ 이나 ‘할매’는 신을 의미한다―신화가 있다. 제주도의 기원에 얽힌 이 이야기는 “한강의 흙과 모래를 한 움큼 가지고 와서 제주도를 만들었다”라거나, 특정 지역의 오름―한 번의 분화 활동으로 붕긋하게 솟아오른 화산―이 만들어진 사연에 관한 내용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런데 근래에 “설문대할망이 하늘과 땅을 떼어놓았다”라는 내용이 조사·보고되어 관심을 끌고 있다. 이것은 제주도를 넘어 창세 신화적 성격을 지니는 것이라서, 한국의 신화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왜냐하면, 3세기에 중국의 서정(徐整)이 기록한 〈삼오력기(三五曆紀)〉에 실린 창세 신화의 주인공은 남성인 반고(盤古)였는데 반해, 제주도 탄생 설화에서는 그 주체가 여신이므로 구전되는 후자가 문자로 정착된 전자보다 시대적으로 더 앞선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문제는 앞으로 좀 더 연구되고 보완될 필요가 있다.
4-신, 온 천하에 머무르다
고대 신화나 원시종교는 대체로 외부 세계에 대한 관념이나 인식의 산물로, 자연의 위대함을 기리고 초월적 신령에게 돌봄과 보호를 기원하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고대인에게 특히 생과 사의 문제는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신비의 영역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자연스럽게 이러한 주제는 하늘, 또는 하늘로 대표되는 초월적인 신령에게 귀속되었다. 고로, 죽은 이들의 안식처인 무덤에 그려진 사신도는 하늘을 향한 기원과 바람을 뒷받침한다고 할 수 있다.
사신도는 사신(四神)이라고 불리는 청룡, 백호, 주작, 현무가 천상에 존재하는 영물로 그려진 그림이다. 사신의 이야기가 유래된 시기는 분명치 않으나, 그림 속에서 처음 완성된 모습이 등장한 시기는 중국의 진한(秦漢) 시대다. 우리에게 사신도,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고구려의 고분벽화 역시 중국 한나라의 풍습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사신도에 있어서 고구려는 특히 주목할만하다. 전 시기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데다가, 고구려 후기에 이르러서는 고분 장식의 중심 주제이자 단독 주제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이는 중국뿐 아니라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고구려만의 특징이다.
장의, 장례 예술의 하나였던 사신도 안의 이야기는 하늘의 별자리로 확대되었다. 고분 내에 그려지는 위치와 크기, 형태의 변화는 조금씩 있었지만 사신은 청룡과 백호가 짝을 이루어 동쪽과 서쪽에, 주로 한 쌍으로 표현되는 주작과 암수가 한몸인 현무는 음양의 짝을 이루어 남쪽과 북쪽에 배치되었다. 네 개 방향에 배치한 신수들은 각기 네 개의 색깔—청(靑), 백(白), 주(朱), 현(玄)과 연결된다. 후기 고분벽화 시기에 이르면 중앙에 황룡이 등장하고, 이는 황(黃)색과 연결된다. 선조들은 다섯 신묘한 짐승이 동서남북과 중앙의 다섯 방위에 자리를 잡고 다섯 빛깔을 가졌으니 바야흐로 음양오행(陰陽五行)에 의한 우주의 질서가 완성되었다고 보았다. ‘오방색’의 뿌리와도 같은 이 다섯 색은 이후 한국인의 생활에 점점 친숙하게 들어왔다.
5-구운몽, 욕망이란 이름의 달콤씁쓸한 꿈
고전소설은 주인공과 주인공의 적대자, 혹은 주인공과 주인공이 처한 환경 사이에 갈등이 벌어지는 우리 이야기 문학이다. 대부분 착한 사람은 복을 받고 나쁜 사람은 벌을 받는다는 권선징악의 결말로 끝난다. 이런 소설은 신라 말부터 신소설이 나오기 이전까지 약 1,100년 동안 창작되고 유통되었으며, 특히 조선 후기인 영·정조 시기에 가장 많이 쏟아져 나왔다. 당시 한글 보급과 맞물려 작가층과 독자층이 넓어지면서 국문소설이 더욱 활발하게 쓰였기 때문이다. 덕분에 작품의 수준도 크게 향상되었고, 대중들과 한층 가까워지면서 상품화되고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고전소설을 즐겨 읽었던 독자들은 왕과 왕족을 비롯한 궁궐 사람들부터 사대부 가문의 여성들, 역관 신분의 중인들, 서민 남녀, 아이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이들이 고전소설을 접하는 과정 역시 천차만별이었다. 우선 길거리에서 신명 나게 고전소설을 낭독해 주는 직업적 이야기꾼 ‘강독사’를 통해 듣는 방법이 있었다. 혹은 책 대여점인 세책가에서 돈을 내고 빌려 보거나, 직접 책을 사서 볼 수 있었다. 당시에는 붓과 종이를 이용하여 손으로 베껴 쓴 필사본(筆寫本), 목판에 글자를 새겨 찍어낸 목판본(木版本), 활자판에 납활자를 심어 찍어낸 활자본(活字本) 등이 시중에 나와 있었다. 이렇듯 고전소설은 여러 방식으로 활발하게 유통되었고, 그로 인해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전해질 수 있었다. 실물 책이 전해지는 고전소설의 수가 대략 1,000편이 넘는데도 매년 새로운 작품이 발굴되고 있는 것을 보면 당시 고전소설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다.
조선 숙종 때의 문신인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 1637~1692)이 1687년에 쓴 〈구운몽(九雲夢)〉은, 한국 고전소설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작가 김만중은 평안도 선천으로 유배되었던 1687년, 멀리 혼자 계시는 어머님을 생각하며 이 이야기를 지었다. 유복자로 태어난 그는 어머니 윤씨에 대한 효심이 남달랐고, 윤씨는 유독 고전 소설을 좋아했다. 어쩌면 김만중은 어머니가 자기 작품을 읽고 잠시라도 걱정을 내려놓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되면서 펼쳐지는 이야기로, 중국 당나라 때의 남악 형산 연화봉이라는 시공간을 배경으로 한다. 성진은 서역에서 불교를 전하러 온 육관대사의 제자이다. 어느 날 성진은 연화봉의 돌다리에서 위 부인의 제자인 여덟 명의 선녀와 마주치고 그들과 잠시 대화를 나눈 뒤 헤어진다. 그런데 절에 돌아와서도 온통 팔선녀의 아름다운 모습이 아른거려 혼란스러워하던 성진은 긴 꿈을 꾸게 된다.
꿈속에서 그는 스승인 육관대사에게 질책을 받고 지옥으로 추방되어, 회남 수주현에 사는 양 처사의 아들 양소유로 다시 태어난다. 팔선녀도 지옥에 떨어졌다가 각기 다른 여자로 환생한다. 그리고 전생의 일을 까맣게 잊은 양소유와 여덟 여인은 차례차례 만나 열렬한 사랑을 나눈다. 결국 양소유는 진 어사의 딸 진채봉, 낙양기생 계섬월, 정 사도의 딸 정경패, 정경패의 시종 가춘운, 하북 기생 적경홍, 토번 자객 심요연, 동정 용왕의 딸 백릉파, 황제의 누이난양공주와 결혼을 하고, 한집에서 화목하게 살아간다. 그 사이 과거에 급제하고 오랑캐도 물리쳐 높은 관직에까지 올랐으니, 이들 가족은 온갖 부귀영화와 명예까지 누리게 된다.
더 바랄 게 없을 듯한데, 양소유와 여덟 여인은 문득 인생의 허무함을 느낀다. 그래서 이들은 불도를 닦아 영생을 구하기로 결의한다. 이때 성진은 꿈에서 깨어나고 꿈속 양소유의 이야기도 끝이난다. 꿈을 통해 큰 깨달음을 얻은 성진은 육관대사에게 용서를 빌고, 팔선녀도 육관대사를 찾아와 가르침을 구한다. 이에 비로소 성진과 팔선녀는 불도를 열심히 수행하여 극락세계로 가게 된다.
January23_Topic_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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